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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記者)는 기록하는 사람을 뜻한다. 기자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기(記)의 한자적 뜻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록할 기(記)는 말씀 언과 자신 기의 합성이다. 지난번 설명했던 믿을 신의 경우는 사람인과 말씀언의 합성이었고, 기록할 기는 말씀언과 자기자신 기의 합성인 것이다.
자신이 직접 들은 말을 자신이 직접 글로 쓴다는 것이 함축된 표현이다. 자기 기(己)는 기사와 소설을 나누는 분깃점이 된다. 기사는 자신이 직접 들은 사실확인의 과정을 거치지만, 소설은 자신이 직접 들은 사실이 아닌, 상상속 창작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직접 듣고, 보고, 체험하고, 판단한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은 기록함의 사명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이는 저널리즘의 기본원리에서 ‘사실확인의 객관성’으로 불린다. 그러나 현 언론사들의 형태는 사실확인의 객관성이 퇴색된 지 오래되었고, “기자는 믿을 수 없는 직업인?”으로 전락되고 있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떠도는 유령같은 유언비어가 공신력있는 언론의 지면에 익명의 취재원의 제보로 둔갑해도 그 사실확인을 독자는 확인할 방도가 없다. 그러한 출처 불명의 기사가 어디 한두 개만 있겠는가? 아니면 말고식 추측 및 과장 보도는 교묘한 문법장치를 이용해 왜곡보도의 사선을 집안 문턱 넘나들듯 ‘왔다 갔다’한다. 이 정도는 표현의 자유, 언론보도의 자유라는 소도안에 속해 있으니 누구를 탓하랴.
소설과 기사의 경계선은 기자들이 기사의 영역을 소설로 확대하면서 점차 무너지고 있다. 먼 훗날 “기사는 부분적 사실을 근거로 한 기자의 순수 창작물”로 불릴 때가 올 수도 있다. 명백한 의미로 기사가 사실확인의 정확성과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언론을 향한 독자들의 신뢰성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언론이 스스로 조심하지 않는다면, 즉 사실확인이 안된 추측성 보도를 사실 보도로 확대해석한다면, 언론은 스스로 ‘양치기 소년’의 무덤을 팔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각자가 속한 언론사의 탄탄한 공신력이 과장성을 가려줄 수도 있을 지 모르겠지만, 먼 훗날 그러한 기사의 기록들이 후손들의 엄중한 잣대속에 사실과 전혀 다른 ‘쓰레기’같은 기사들로 낙인찍힐 기사들이 상당할 것으로 나는 판단한다.
기자증도 없고, 기자고시도 없는 기자의 직업이 ‘記者’로서 존립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기사에 대해 최소한의 지적 양심인 사실확인에 엄중한 잣대가 필수품일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이 기록할 기(記)가 던지는 기자의 정의다.
“사실확인의 규율이 없으면 이러한 중립적 목소리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덮는 투명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자신의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취재원을 선택하고, 중립적인 목소리를 사용해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이게 하는 기자들은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 저널리즘의 기본원칙 - 사실확인의 저널리즘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