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명은 아무것도 굴복시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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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희경 자유경제원 사무총장 |
김만덕(1739~1812).
조선시대 제주 여성의 몸으로 상업을 통해 큰 부를 이루고, 흉년으로 기근이 들자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아 많은 제주 백성을 구휼했다. 1796년 여성의 벼슬 중 가장 높은 내의원 의녀반수에 명해졌다.
김만덕이 제주를 벗어나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2010년에 와서야 비로소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고, KBS드라마 <거상 김만덕(2010년)>이 방영되면서 관심이 고조됐다. 김만덕은 18세기 중엽, 영조 15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김만덕은 불행한 여인이었다. 11살이 되던 해에 제주와 나주를 오가며 장사를 하던 아버지 김응렬이 풍랑에 휩쓸려 죽고 이듬해엔 어머니까지 충격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다. 2남 1녀 중 막내였던 김만덕은 외삼촌 집에 맡겨진 두 오빠와 달리 제주 관아의 노기 월중선의 하녀로 들어갔다. 노동력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여자아이다 보니 입을 덜어주는 것이 남은 식구를 돕는 길이었다.
김만덕은 이를 기화로 제주 관가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양인이 아닌 관기의 삶을 살게 되었다. 조선시대 신분의 구분은 단호했다.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양반과 노비, 남성과 여성, 뭍사람과 섬사람을 구별해 달리 취급했다. 노비는 사고 팔리는 물자와 다를 바 없었고, 여성은 주체가 아닌 남성세계의 그림자였다. 제주는 대역죄를 지은 양반들의 유배지에 불과한 미개한 땅이었다. 조선의 신분제하에서 제주도 태생 관기 김만덕은 말 그대로 최하층의 ‘미물’이었다.
그러나 김만덕은 신세한탄과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동안 단 한명의 여성도 시도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했다. 김만덕은 상업의 위력에 눈을 떴다. 제주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미미한 곳이었으나 경제적으로는 특수한 경쟁력을 가진 곳이었다. 육지와 제주를 가로막은 거대한 바다를 건너는 일은 당시 조선의 선박기술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항해였다. 자연히 물자의 이동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육지에서 건너온 물자는 비싼 값에 팔렸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제주의 독특한 풍토는 다른 지방에는 없는 여러 특산물을 얻을 수 있는 보고였다. 제주의 말총, 미역, 전복, 표고버섯, 녹용, 귤 등과 같은 물건들은 육지에서는 때론 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하는 귀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흔하나 저들에게는 귀한 것’을 팔면 큰 이문을 남길 수 있다는 교역의 자연스러운 진리에 눈을 뜬 순간, 김만덕을 둘러싼 세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다. 김만덕은 침착하게 계획을 실행했다. 우선 멸시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관기의 신분을 벗는 것이 시급했다. 상업은 상대방과 거래를 하는 것인데 관기를 사업상대로 삼아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만덕은 제주목사 신광익과 판관 한유추를 끈질기게 설득해 본래의 양인신분을 되찾았다. 이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김만덕은 제주와 육지를 오가며 장사를 했던 부친에 대한 기억과 관기로 있으면서 터득한 식견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상업에 뛰어들었다.
김만덕이 상업에 매진한 18세기 후엽은 내륙을 중심으로 5일장인 장시가 서고 해안과 강가의 포구도 활기를 띄어가던 때였다. 보부상이 출현하여 전국적으로 물산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중 포구는 당시 교통과 유통의 중심지였다. 제주의 귀한 특산품들이 가가호호에 있어도 이것이 육지로 나가 제 값을 받으려면 유통망이 깔려 있어야 했다. 바다길만 열려있는 제주에서 포구는 상업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김만덕은 우선 산지천 동쪽 금산기슭에 객주를 차렸다. 객주는 숙박업 역할도 했지만 외지 상인들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거나 거간하는 매매중개상 역할도 했다. 김만덕 상단은 바다를 시련이 아닌 기회로 활용할 줄 알았다. 당시 제주에서 나는 물품이 강경까지 가는 데는 나주나 영암에 도착해 말을 타고 가야 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많은 물자를 실어 나를 수도 없는 방식이었다. 김만덕은 달랐다. 물길이 험한 칠산 앞바다를 정면 돌파했다. 강경까지 배로 직접 물건을 운반했다. 이 방식은 물품을 대량으로 싼 가격에 유통시키는 것을 가능케 해서 김만덕 상단의 경쟁력을 배가시켰다.
위험을 이윤기회로 바꾼 탁월한 전략은 김만덕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포구에 적극적으로 선상을 유치했고, 창고와 선박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유통의 전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되면서 사업의 규모와 이윤의 규모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김만덕은 안주하지 않았다. 상품거래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금을 제공하는 금융업과 창고시설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를 대여하는 창고업까지 사업을 다각화 시켰다. 김만덕 상단은 제주 최대의 상단으로 관가의 물품을 조달하고, 선상들의 물품을 독점적으로 거래하는 여객주인권, 포구의 상품유통을 독점적으로 담당하는 포구주인권도 따냈다. 김만덕이 이토록 성장하는데는 채 10년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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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눔 실천의 대표 여성인 조선시대 거상 김만덕(金萬德·1739∼1812년)의 객주 모습이 지난 2월 제주시 건입동 옛 객주터에 재현됐다. 제주도는 지난 2008년부터 총 35억5900만원을 들여 김만덕 객주터 재현 사업을 벌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2. 조선 – 세계사의 조류에서 철저히 비껴난 왕조의 비극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이야 말로 진실로 나라가 아닙니다. 나라가 날로 썩어 하루가 다르게 붕괴되어 가는 큰 집에 불과합니다.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너지는, 어느 대목(大木)도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율곡, <만언봉사>)
율곡이 16세기에 상소문에 적은 비참한 조선의 현실은 조선의 개국 때부터 배태된 것이었다. 1392년 개국한 조선은 성리학을 나라의 근간으로 삼았다. 공맹을 숭상하는 선비를 최우선으로 하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소수의 양반을 위해 절대다수의 백성이 동원되는 구조였다. 천민이 아닌 양인들은 세금과 군역을 담당해야 했는데 국가의 근간에 해당하는 의무를 다해도 주어지는 권리는 보잘 것 없었다.
조선왕조 내내 노동과 돈은 천시되었고 자급자족적 농업경제가 국가의 경제기반이었다. 가뭄과 홍수에 국가 전체의 운명이 좌우되는 취약한 경제였다. 기근이라도 들면 백성들의 삶은 더욱 비참해졌다. 아사자가 속출하고 이런 끝에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인구수가 급감했다. 이런 시기에도 세금의 부담은 줄지 않아 스스로 노비가 되거나 마을을 떠나 유리걸식하는 이들이 넘쳐났다. 무려 500여년에 걸쳐 27대에 이르는 왕이 통치한 유구한 왕조 내내 이런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김만덕이 살았던 18, 19세기 영·정조 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기로 부르기도 하나 이때의 작은 변화들이 조선 전체의 근간을 흔들지는 못했다. 시장이 서고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이 미약하게 시작되었으나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것과는 요원하였다. 결국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지속적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자격미달의 왕조가 억지로 왕조의 목숨을 이어가는 동안 발빠르게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의 격차가 심하게 벌어졌고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다.
조선이 건국한 14세기 말은 세계사적으로 큰 변화의 시기였다. 14세기 이전까지 국가간의 교역은 국경이 접해 있거나 바다로의 이동이 용이한 가까운 국가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경제의 틀이 근거리, 동일문화권에서 전세계로 확대된 데는 항해술의 발달이 주요했다. 15세기 말 시작된 ‘대항해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세계로 교역무대가 확대되었다.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국가주도하에 무역과 수출을 장려하고 국부의 증진을 추구하는 중상주의가 펼쳐지다가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본격적인 산업화, 도시화가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부를 축적한 새로운 신분인 부르주아가 출현했고 이들은 종래의 귀족사회의 신분질서를 흔들면서 정치, 사회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선의 영·정조 시대에 해당하는 18세기, 19세기의 세계는 이전까지의 변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혁명적 변화를 구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칭하면서 500년 조선왕조에서 구별지으려하는 영·정조시대에 세계는 말 그대로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와 진보를 겪고 있었다. 변화의 속도와 범위는 그것을 일으키는 사람들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조선에도 변화의 기회는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패배는 일본과 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조선의 정치, 군사, 경제력을 절감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양 난을 전후해 조선은 일본과 청에 관리와 학자들을 보내 문물을 살피도록 하였으나 제대로 된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의 고양이 우선이라는 아전인수식 해석을 늘어놓거나 있는대로 실상을 거론하면 당파싸움의 단초가 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실사구시의 정책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기엔 역부족이었다.
신식 무기 조총을 앞세운 막강한 일본의 공세에 국왕이 신의주까지 쫓겨 가는 수모를 겪고 백성들의 희생이 그토록 컸음에도 저들의 기술의 원천인 서양에 대해서 알아볼 궁리도 하지 않았다. 청에게는 임금이 이마를 땅에 대며 절을 하는 수모를 겪었으면서도 그 때 뿐이었다. 전란이 끝나자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였다. 아니 전만 못한 상태가 되었다. 여전히 패망한 명나라를 붙들고 그들을 이긴 청에 대해 경원시 했다. 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이 여러 국가와 교역을 하고 신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조선은 스스로 빗장을 걸고 도태됐다. 거의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10년간은 오히려 쇄국이 곧 국시였다. 그 결과 조선의 백성은 가난에 허덕이고 세계의 문명사적 발전에서 낙오된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개인의 노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운명 앞에 할아버지, 아버지, 자식세대 모두가 그러한 삶을 살다갔다. 조선인의 비극이 끝난 것은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시장경제를 택하고 산업화에 성공해 압축성장의 기적을 이루고 나서였다. 가난과의 질긴 인연을 끊을 수 있었던 기적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니었다.
3. 시장경제를 택하지 않으면 결국 백성이 굶어 죽는다.
애덤 스미스(1723~1790)는 1776년 현대경제학의 고전 <국부론>을 발표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개인의 주도적 경제활동과 상호 경쟁이 경제가 성장하기 위한 기본조건들임을 설파한다. 개인들이 잘살고 싶은 사익의 추구가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시장매커니즘을 통해 결국 인류 전체의 복리 증진으로 이어진다는 국부론의 진리는 조선과 너무도 멀리 있었다.
조선은 돈을 버는 행위, 상업을 통해 이문을 남기는 행위를 천한 것으로 치부했다. 그저 천시만 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양반 지배층은 상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통제하에 두려고 했다. 부의 획득이 신분제의 위협이 될 수 없도록 철저히 관리했다. 언제든 구실을 만들어 개인의 재산을 수탈할 수 있고 생명마저 앗아갈 수 있는 사회구조의 모순은 경제발전을 더디게 하는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돈을 벌기위해서는 지배계급과 결탁하거나 아첨해야 했다. 부정과 부패가 횡행한 것은 말할 나위 없었다. 개인은 시장에서의 경쟁에 사활을 걸기보다 손쉬운 지대추구 행위에 열을 올렸다.
조선의 금난전권(禁亂廛權)도 이런 구조의 산물이었다. 조선 후기 난전이 일어나고 사상(私商)들의 활동이 두드러지자 육의전과 시전상인들은 자신들이 상권을 독점하기 위해 조정과 결탁하여 금난전권을 획득했다. 강력한 상업독점특권이었다. 금난전권은 소비자인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시전체계에 들어가지 못한 상인들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금난전권은 18세기 말경 통공발매정책(通共發賣政策)을 취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이 가진 금난전권의 특권을 혁파하고, 육의전에서 취급한 상품을 제외한 모든 상품을 자유로이 판매하게 되기까지 조선의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조선은 소수의 지배계급 외에는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다. 재산권(property right)이 없는 곳에서는 경제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다.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거나 불안정한 곳에서는 열심히 일할 이유도, 저축하고 투자할 이유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재산권은 시장거래가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사적 소유권을 바탕으로 하는 시장경제제도는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노동, 저축, 기술발전의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경제 성장을 일으킨다.
조선 500년 동안 세계는 물론 일본과 비교해서도 300년에 가까운 경제적 격차를 면치 못한 것은 조선이 백성들 개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유로운 계약과 이를 보호할 법적 장치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백성 상당수는 철저한 신분제 하에서 양반에게 예속되어 독자적인 경제활동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농민들은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세금을 내고 나면 연명할 만큼의 곡식도 손에 남지 않았다. 수공업자들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이 생산한 물건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조정에 공출되고, 생산품에 대한 특허권과 같은 보호장치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열심히 일할 아무런 유인이 없는 사회였다. 끊임없는 자기개발과 기술향상보다 관에 줄을 대는 편이 훨씬 편하고 이로운 사회가 조선이었다. 관의 영향력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보니 지위를 이용해 재물을 취하는 부정부패가 횡행했다. 일하고 싶지 않아 굶고 일해 봤자 빼앗기니 굶는게 조선 백성의 삶이었다. 시장경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라 백성의 비극이었다.
19세기 말 조선을 둘러 본 후 서양인 교사 윌리엄 길모어는 이렇게 기술했다.
“한국인의 성품이 가난하고 무례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노동하고 싶게 만드는 유인책이 없다. 한국인의 게으름은 본성이 아니다. 그들이 게으른 이유는 자신들의 노고의 열매를 생존에 필수적인 최소치만 빼놓고는 만족을 모르는 부패한 관리들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고, 자신들은 그들에게 대항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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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여성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윤석남 작가가 희생을 몸소 실천한 조선 시대 거상 '김만덕의 심장'을 주제로 개인전을 열었다. /사진=YTN 갭처 |
4. 김만덕, 채제공을 만나다
번암 채제공은 영·정조시대를 이끌어간 재상이었다. 그는 조선최초의 시장자유화 조치라고 할 수 있는 신해통공을 실시했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시전을 설치하고 그곳의 상인들에게 독점적인 상업특권을주고 대신 관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받아 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조선후기 상업이 활성화되자 독점권에 위협을 느낀 시전상인들은 군소 상인들을 단속할 수 있는 금난전권을 조정에 요청해 이를 획득했다. 시전상인들이 내는 세금이 필요했던 조정의 타협 결과였다.
18세기에 와서 시전상인들의 횡포가 극심해졌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물품의 판매를 독점하고 다른 상행위를 금지하여 시장의 성장을 저해했다. 체제공은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에 대한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을 단행했다. 정치적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한 이 조치로 시장과 상업에 자유로운 발전의 물고가 트이게 되었다. <정조실록,1793>에는 체제공의 뜻이 담겨 있다.
“도성 안에서 사는 사람과 도성 주변에서 사는 사람은 똑같이 나라의 백성이다. 행상이든 점포를 갖고 있는 상인이든, 또 물품이 많든 적든 장사를 하는 모든 행위는 모두 떳떳하다. 그런데 시전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자기 물건을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을 단속하고 내쫒아 도성 안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드는 일은 참으로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 이 사람도 백성이고 저 사람도 백성인데, 어찌 차별을 둘 수 있겠는가”
이런 채제공에게 여성의 몸으로 상업을 통해 거상이되고 이를 통해 제주 백성을 구휼한 김만덕은 그의 사상의 총아로 보였을 터였다. 그의 문집 <<번암집>>에 김만덕의 덕을 기리는 <만덕전>을 실었을 정도였다. 김만덕은 제주도민을 구휼한 공으로 그녀의 소원대로 임금을 알현하고, 금강산을 구경했다. 이 과정에 적극적 도움을 준 사람이 채제공이었다. 김만덕은 제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의 삶에서 이제 다시는 채제공을 볼 수 없음을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체제공은 당시의 재상으로써는 매우 드물게 백성들이 자유롭게 시장 경제에 참여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시장과 상업에 대한 그의 탁견은 김만덕의 업적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제도권에 알리는 가교 역할을 했다.
조선이 왜 망했는가를 분석하는데 있어 조선이 숭상해온 성리학에 많은 화살이 돌아간다. 도덕과 윤리를 규범으로 삼아 인간의 최고 가치를 정신적 삶에 대한 추구에서 찾은 성리학은 엄격한 신분제하에서 지배층을 위해 일생을 봉사해야 하는 백성의 삶에는 족쇄이고 굴레였다. 온갖 의사결정에 명분이 중시되고 이를 둘러싼 탁상공론만 오가는 동안 백성의 삶은 파탄나고 피폐해가던 터였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채제공을 위시하여 이런 흐름과는 다른 학문적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들은 물질생활이 정신적인 삶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여기고 부국안민과 부국강병을 주창했다. 이들 조선후기 실학자들중 중상주의 경제학의 대가로 불리는 사람이 <북학의>의 저자 박제가이다. 박제가는 조선의 경제발전과 부국을 위해서는 상공업이 발전해야 하고 농업도 상업적인 경영이 가능한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를 위해서는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제가의 이런 사고는 채제공을 수행해 청나라의 사신길에 올랐던 경험에서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조선에서 오랑캐의 나라라 멸시하는 청나라의 발달한 문화와 문물은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가난을 청빈이라 자랑할 것이 아니고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새로운 문물의 편리속에서 살게 할 것이며, 어떻게 해야 굶지 않게 할 것이냐를 고민하는 열정에 불탔다. 박제가는 조선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상업이 부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소비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설파했다. 검소함이 미덕이라 여겼던 조선땅에 파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박제가는 소비가 있어야 생산이 촉진되고 상업이 활성화 될 수 있다는 근대적 믿음을 이미 갖고 있었다. 박제가의 위대함은 통상의 중요성을 강조한데서도 찾을 수 있다.
자원도 부족한 작은 나라가 오직 자기땅에서 생산되는 것에만 메달려 다른 나라와 통상을 하지 않는 것은 가난을 면할 수 없는 외고집이라 보았다. 또 이것이 경제적 불리함 외에도 백성들의 폐쇄적 성향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지금 보아도 뛰어난 경제논리였던 박제가의 사상은 조선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청나라는 오랑캐’라는 편견은 거대한 장벽이었다. 박제가에게는 오랑캐의 편에 서서 조선을 멸시한다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의 한 발 앞선 시도는 그를 뒷받침해주던 정조의 죽음과 함께 피어보지도 못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다. 박제가의 학문적 동지였던 박지원이 북학의의 서문에 적은 글귀는 지금의 우리 세태에도 뼈아픈 일침이 아닐 수 없다. 김만덕, 그녀의 시대에 이런 학문의 흐름이나마 있었다는 것이 조선땅에 태어난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할 따름이다.
우리 조선의 선비들은 세상 한 모퉁이 구석진 땅에서 편협한 기풍을 지닌채 살고 있다. 발로는 청나라 땅을 단 한 차례도 밟아 보지 못했고 눈으로는 청나라 사람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조선 땅을 벗어나 본 적도 없다. 긴 다리의 학과 검은 깃털을 가진 까마귀가 제각각 자신이 타고난 직분을 지키며 사는 꼴이고 우물 안 개구리와 작은 나뭇가지 위의 뱁새가 자신이 사는 곳이 최고라고 자랑하며 사는 꼴이다. <북학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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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여성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윤석남 작가가 희생을 몸소 실천한 조선 시대 거상 '김만덕의 심장'을 주제로 개인전을 열었다. /사진=YTN 갭처 |
5. 김만덕, 제주도민의 구휼하다-자발적 자선의 아름다움
김만덕이 제주 기녀의 신분으로 상업에 성공해 거상이 되었다는 것에서 그녀의 이야기가 끝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조선의 공식기록인 실록에 그녀의 공적이 오르고 채제공을 비롯해 이가환, 박제가, 정약용, 김정희 등의 사대부들의 그녀의 공덕을 시문으로 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만덕이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나눔을 실천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김만덕은 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해 절약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은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해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활철학을 갖고 있었다.
정조 16년(1792)부터 정조 19년(1795)까지 제주도에는 4년 동안 흉년이 계속되었다. 제주의 흉년은 다른 시도에 비해 더 끔찍한 것이었다. 제주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농사지을 땅이 부족해 자주 기근에 시달리고, 흉년이 들면 조정만 바라봐야 하는 속수무책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전기에는 기근을 피해 유민이 되어 배를 타고 육지 다른 지방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제주 사람이 뭍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출륙금지령이 내려진 조선후기 이후에는 이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섬에 갇힌 채 아사자가 속출했다. 그 수가 17,963명에 달했다. 사태가 심각하자 정조는 1795년 2월 제주도민을 구휼하기 위해 구호곡물 1만1천석을 보내지만, 수송선단 중 5척이 침몰하면서 제주도의 상황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때 김만덕은 자신의 전재산을 출연하여 육지에서 쌀 500여석을 사오게 해 관에 진휼미로 내놓아 제주도민을 구휼했다. 김만덕이 제주를 살렸다는 칭송이 널리 퍼졌다. 조정에도 공적이 알려졌다.
정조는 김만덕의 덕행을 치하하고자 제주목사를 통해 김만덕의 소원을 물었다. 김만덕의 소원은 어찌보면 소탈하고 자세히 보면 매우 발칙한 것이었다. 그녀는 서울에 가서 임금님이 계신 궁궐을 우러러보고 천하명산인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을 소원으로 들었다. 당시 제주 여인들은 1692년 제정된 월해금법으로 출육이 금지되어 있어 한양과 금강산은 고사하고 육지를 구경하는 것도 불가능한 때였다.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고 남이 꿈꾸지 못하는 것을 꿈꾸는 거상의 면모가 보이는 소원이 아닐 수 없다. 정조는 말을 하사하고 그녀의 여행편의를 돕도록 했다. 여성으로는 제일 높은 지체에 해당하는 의녀반수에 명해 공을 기렸다.
김만덕의 구휼행위는 제주라는 섬 하나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냈다. 쉽게 이룬 부가 아닌만큼 선뜻 큰 재산을 내놓기란 그녀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김만덕은 베품을 선택했다. 그녀 자신이 제주를 기반으로 부를 이루었고 앞으로도 그녀의 터전은 제주가 될 것이기에 제주도의 불행은 곧 그녀의 불행이었다. 그녀의 선행이 구체적으로 이후 상업활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으나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긍정적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자명하다. 만약 조정에서 혹은 제주 관아가 나서서 김만덕에게 강제로 구휼미를 내놓도록 했다면 결과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자신의 상단이 처한 환경에 부합하지 않는 구휼행위가 그녀의 사업을 망가뜨렸을 수도 있고, 이를 받아들이는 제주도민도 감사의 마음이 크게 일지 않았을 것이다. 자선이란 자발적일 때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이를 무시하고 요즘 기업에게 요구되는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은 규범적이고 강제적인 경우가 많다. 사회적 책임을 들이대며 많이 할수록 무조건 좋은 것이라 강요되기 일쑤다. 그 과정에서 전달비용과 같은 사회적 낭비도 발생한다. 기업이 알아서 전략적으로 사회의 공유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여력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김만덕의 나눔은 기업이란 개념도 없었던 조선, CSR이란 말은 더더욱 요원했던 조선에서 자발적 자선, 사회적 공헌의 위력을 보여주었다는 큰 의미를 지닌다.
6. 거상 김만덕과 기업가정신
오랜 시간 고전경제학에서 기업가정신은 논의의 장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업가정신은 경제현상과 기업의 성패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체다. 기업가는 불확실성과 위험을 감수하고 혁신을 이뤄내는 존재다. 현상을 뒤집고 해체하며 창조적 파괴를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기업가들은 변화를 정상적인 것으로, 그리고 건강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들은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추구한다. 언제나 변화를 탐색하고 그것에 대응하며, 그것을 하나의 기회로 활용한다.
기업가에게 필요한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한 투자를 행하는 도전의식이며 미래의 불확실한 위험요소를 발전 기회로 전환시키는 능력이다. 따라서 기업가정신이란 위험부담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전제로 하여 가치 있는 그 무엇을 새로이 창조하는 과정이다. 모험과 도전을 극복하고 어려움에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남다른 인내심과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는 자세 등이 기업가정신이다.
김만덕은 18세기 조선에서도 변방인 제주에서 시대변화와 흐름을 미리 읽어내고 세상을 꿰뚫는 안목을 바탕으로 객주에서 출발하여 창고업, 유통업, 금융업, 해운업 등으로 사업을 뻗어나갔다. 통찰력과 안목이 강한 추진력과 결합되면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는 성과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기업가정신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제한되었고 경제활동을 한다 하더라도 그 대상과 영역이 지극히 여성적인 것에 한정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김만덕은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끊임없이 발전의 기회를 창출해냈다.
여성, 기녀라는 한계를 그녀의 사업을 위한 유리한 자원으로 되바꿔 활용하는 지혜를 그녀는 갖고 있었다. 김만덕의 삶은 그 자체로 변화와 모험, 도전으로 대표되는 기업가정신의 총체라고 할 수 있겠다. 김만덕은 여성과 기녀라는 성과 신분, 제주라는 지리적 한계와 사농공상의 틀에 얽메이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했다. 김만덕은 기녀로부터 양인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끈질긴 호소와 설득으로 기녀의 신분을 벗어나자 다시 기업가의 삶으로 뛰어든다.
남성중심의 유교문화에서 뛰어난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부를 이룬 그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한다. 이를 통해 임금을 비롯하여 체제공, 후에 추사 김정희 등 남성 사대부의 칭송을 받기에 이른다. 아무리 불리한 여건도 그것을 박차고 일어서려는 불굴의 정신 앞에서는 장애가 될 수 없음을 김만덕은 일생을 통해 증명했다. 이런 도전과 개척이야 말로 그녀의 삶을 성공으로 이끈 가장 큰 요인이다. 김만덕은 사업을 경영하는데 있어 원칙을 세웠다. 그녀만의 강단과 고집이 있었다.
첫째는 이익은 적게 남기고 많이 파는 박리다매, 둘째는 적정한 가격으로 판매해서 원망을 사지 않는 정직매매와 신용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여성의 몸으로 남성들도 하기 힘든 상업의 성공을 이뤄낸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그녀가 시장의 읽는 능력을 가졌으되 얄팍한 상술에 현혹되지 않고 잠시의 손해에 연연하지 않고 후일을 크게 내다보는 대범함을 가졌음은 그녀의 상단의 가파른 성장으로 증명되었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았더라면 결코 이뤄내지 못할 성취였다.
김만덕은 기업이라는 개념이 조선땅에 들어오기도 전에 CSR에 눈을 뜬 기업가였다. 그녀가 일개 거부가 아닌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이 될 수 있었던 데는 그녀의 통 큰 나눔과 베품이 있었다. 자선을 사익추구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은 자선행위의 가치를 깍아내리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자선은 자신의 충만감을 위해서도, 기업의 전략상으로도 할 수 있는 행위다.
사익과 자선은 배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할수록 자선의 여지는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그 빈틈은 정부가 세금을 통해 메울 수 에 없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낭비와 복지를 권리로 여기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김만덕의 나눔은 제주도의 특수성에 대한 그녀의 이해를 바탕으로 비롯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그녀와 제주도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제주의 기녀출신으로 한양땅과 궁궐을 돌아보고 금강산을 구경한 여인. 그것은 경제적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다. 김만덕은 베품과 나눔을 통해 주변을 이롭게 했음은 물론 그녀 스스로도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다.
7. 오직 조선땅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소이다.
김만덕은 남녀의 구별, 반상의 구별, 육지와 섬사람의 구별이 지엄했던 조선조에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아내, 누구의 딸도 아닌 자신의 이름 석자로 일어선 여성이었다. 여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지던 정절, 효, 시문서화에 뛰어나 다른 여성들의 귀감이 되라고 역사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거상, 거부라는 여성 앞에 감히 놓일 수 없었던 타이틀을 거머쥔 여성이자 나랏님도 구제못한다는 가난에서 제주사람들을 살려낸 여성이었다.
김만덕에게 제주, 여성, 기생, 사농공상의 지엄한 신분은 굴복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었다. 이런 김만덕에게도 오직 하나 조선땅에 태어난 운명만은 굴레였고 속박이었다. 김만덕이 살았던 18세기 무렵 세계는 이미 지리적 한계와 국경이 경제활동에 장애가 되는 시대를 벗어나 있었다. 커다란 상선들이 대양을 누비며 새로운 물품과 문화를 실어날랐다.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올라가고 전근대를 탈피한 근대적 생활양식이 꽃피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정치적 자유가 신장되고 백성이 아닌 시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당당한 주체들로 바뀌고 있었다. 오직 조선만이 은둔의 땅, 고립의 땅이었다.
성리학만이 우주의 질서로 존재하고, 신분제하에서 대다수의 백성이 짐승처럼 살아가는 곳이었다. 이미 여러 조선의 관리와 학자들이 청나라와 일본을 통해 이런 변화를 감지했으나 엄연히 눈으로 본 신문명을 부인하기 일쑤였고, 기개가 있는 학자들은 정치적 파워게임에서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김만덕은 이런 시대를 살아낸 여성이었다. 그녀는 바다를 도전의 장으로 여겼지만 그녀의 바다가 저 멀리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을 향해 뻗어 있음을 알지는 못했다. 그녀가 조선땅에 태어난 비운이었다. 그녀가 조선이라는 멍에를 쓰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는 조선 제주의 거상이 아니라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거상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만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역사인 500년 조선왕조를 바로 보아야 한다. 가난을 달고 살았던 나라, 탁상공론에만 능하고 나라가 망하는 그 순간까지 빗장을 닫아 걸었던 나라, 무수한 백성의 삶이 피폐해도 소수 양반의 삶의 고양만이 미덕이었던 나라. 바로 그 조선의 망령이 아직도 우리 주변에 남아 제 2, 제 3의 김만덕의 탄생과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통상국가로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나라에서 한미FTA를 반대하는 시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박제가의 절망의 탄식을 듣는다.
지금 이순간에도 기업활동을 얄팍한 정치논리로 제단하는 규제입법들을 만들고 거기서 이익을 취하는 정부, 정치권을 보며 과거 금난전권 시절과 무엇이 다른가를 반문하게 된다. 이제 대한민국의 새롭고 수많은 김만덕을 조선에서 놓아 보내자. 세계의 상인으로 뻗어나가게 하자. 조선땅이 아닌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희망이었노라 말하게 하자. /전희경 자유경제원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