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자유 확대…전체주의와 맞서 싸운 투쟁가
우남 이승만이 100년 전 한반도에 가져다 준 첫 번째 선물은 바로 ‘자유주의 정신’이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조선시대, 그리고 이어진 일제시대 사람들에게 ‘자유’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당시 한반도에 ‘자유주의 정신’은 어떻게 상륙하게 되었을까. 자유주의는 위대한 국가탄생의 서막이었다. 자유경제원은 지난 15일 리버티홀에서 열린 ‘이승만과 그의 저서, 자유주의 정신이 상륙하다’ 세미나를 통해 이를 풀어보았다. 

패널로 나선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은 “우남 이승만이 개인들의 자유 확대를 위한 민주주의를 지향했다”며 “우남은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데 미국의 민주주의가 현존하는 모델이 됨을 분명히 했고, 더 나은 제도적 모델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김 원장은 우남이 자유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전체주의와 투쟁했음을 밝히기도 했다. 아래 글은 김광동 원장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
 자유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이승만의 헌신

1. 집단과 분리된 자유주의적 개인을 지향하다 

이승만이 자유주의 확립에 기여한 것은 집단과 분리된 각각의 개인과 백성을 주체로 설정하는 그의 세계관 정립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봉건체제에서 계속되어 온 방식에 따라 집단의 한 부분으로 개인을 위치지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란 개인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집합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라는 일관된 방향에 입각하여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고자 하였다. 봉건체제와의 확고하고도 무시무시한 결별이다.

봉건체제였던 1890년대부터 이승만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를 가진 주체임을 확고히 했고, 그 혁명의 완성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승만은 반봉건 투쟁의 상징이다. 신분제도와 왕조적 군주제의 폐지를 역설하며 공화주의(共和主義)를 지향하는 투쟁에 나선 것은 이승만의 당연한 귀결이다. 서재필과 함께한 토론회였던 <협성회> 활동과 <협성회보> 편집장 활동이 그것이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활동이 그것이다. 그리고 <만민공동회> 활동은 물론이고, 왕조제를 폐지하고 ‘봉건제도를 혁파’하여 ‘공화제’를 도입하려는 일관된 활동과 그에 따른 5년 7개월의 감옥생활을 하게 된 것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승만이 1911년 전국의 학교와 교회를 돌며 한 강연에서 외친 것도 자유주의였으며 자유사상을 통한 민권의 각성과 민족의식의 함양이었다. 이승만은 이미 1904년 <독립정신> 집필 때부터 미국 헌법의 개인 권리를 명시한 권리장전에 대한 구체적 소개하고 있다. 봉건체제를 살아온 그에게는 “아무리 귀하고 높을 지라도 놀고먹는 자 없나니”가 되는 세계가 바로 개인이 스스로 서는 독립된 세계이며, 자유주의 사회이다.

그리고 이승만이 그런 자유주의 세계관을 확립한 지 44년이 지난 1948년에 드디어 한반도에 대한민국을 세우고 자유주의 제도를 정착시켜냈다. 농지개혁으로 지주와 토지에 긴박되었던 봉건적 농업체제를 해체한 것이나, 전체주의에 긴박되어 있던 공산주의 소속의 군인들에게 자유선택을 부여한 것이나, 북한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는 우리 민족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이나, 전체주의 북한에 속아 북송되는 재일 북송교포를 막으로 한 것 등은, 모두 다 그의 자유사상이 얼마나 확고하며, 실천적인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2. 개인들의 자유 확대를 위한 민주주의를 지향하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로 보다 더 완결된다. 이승만은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데 미국의 민주주의가 현존하는 모델이 됨을 분명히 했고, 아직 다른 더 나은 제도적 모델을 찾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접해본 적이 없던 민주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견해는 동양의 고전에 나오는 이상향적 ‘요순(堯舜) 세상’의 현시적 제도라고까지 말한다.

이미 1904년 “민주정치라 하는 것은 백성이 주장한다는 뜻”이라며 백성은 주체가 되는 정치가 민주정치이며 “백성이 백성을 위하여 백성으로 조직한 정부”라고 명확히 규정하였다. 특히 “가령 백성이 모여 한 땅을 작만하고 평균히 나누어 집을 지을새 각각 제 몫에 오는 따을 한 조각도 내놓지 않으려 할진데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은 길이 없어 밖으로 통(通)치 못할지니, 마땅히 백 집이 조금씩 내어놓아 길도 내고, 공원지도 만들어서 일체로 평균하게 하여야, 능히 그 사회를 유지할지라”라며 자유와 함께 공동체의 민주적 운영원리를 제시한 바 있다.

자유 권리의 보장과 함께 자유 권리는 서로를 위해 공화주의적으로 상호 견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 자유민주적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로, 이승만은 1919년 민주공화제를 실현할 목적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고,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한반도에 자유주의를 실현시킬 정부의 수반이 되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 우남 이승만은 전체주의의 대표적 체제가 바로 일본 군국주의, 소련 공산주의, 그리고 파시스트와 나치스트라고 명확히 규정지었다. 우남은 자유를 지향하는 체제와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로 구분 지었고, 전체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사진=연합뉴스
 

자유에 대한 이승만의 헌신은 정치적 자유권리로서 정당에 대한 자유선택과 지도자와 정치인에 대한 자유선거제도를 정착시킨 것은 물론이고, 그 어떤 신생국가나 봉건전제체제라는 동일한 경험 하에 있던 아시아 국가들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수준의 언론 자유와 종교 자유의 보장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낸 것이나, 일관되게 자유무역과 자유주의 문화가 한국 전역에 뿌리내리게 되고, 성숙된 방향으로 가게 된 것은 이승만이 만들고 쌓아 올린 자유주의 사상의 실천적 결과물이다. 

3. 자유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전체주의와 투쟁하다.

자유주의 사상만을 가지고 자유체제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가 도입된 나라를 세웠다고 자유주의가 뿌리내리는 것도 전혀 아니다. 자유가 공짜가 아닌 것이듯, 자유를 지향하며 자유를 위협하는 구체적인 적(敵)인 전체주의(全體主義)와 싸웠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자유주의 체제가 가능했다.

이승만은 세계를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대결구도로 보았다. 1941년 여름에 출간한 그의 책 을 보더라도 제15장의 제목을 ‘Democracy Versus Totalitarianism(민주주의 對 전체주의)’라고 정하고 있다. 그 내용에서 이승만은 세계적 차원의 대립과 다가올 세계전쟁은 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간의 대결이고 그 대결에서 민주주의가 승리해야만 세계에는 평화가 오고, 약소국들은 독립되고, 미국도 민주주의를 존속시킬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대한민국이 독립되고 자유체제가 되는 것도 결국은 세계적 차원의 전체주의를 극복하고 승리할 때 가능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승만은 전체주의의 대표적 체제가 바로 일본 군국주의, 소련 공산주의, 그리고 파시스트와 나치스트라고 명확히 규정지었다. 자유를 지향하는 체제와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로 구분 지었다. 세계로 확산되는 전체주의에 맞서 싸워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미국도 민주주의의 고립된 섬에 불과하다고 경고하였다.

이승만은 일본의 군군주의 뿐만 아니라 소련의 공산주의도 극복해야 세계는 자유와 민주체제가 완성되고, 독립과 평화도 온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그런 차원에서 소련과 공산 전체주의와도 감연히 투쟁에 나섰다. 그런 면에서 이승만은 자유주의를 확립,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으로부터 독립만이 아니라, 자유를 위협하는 더 큰 위협인 공산주의까지 극복해야함을 명확히 인식하고 대결한 지도자이다.

그 결과로, 대한민국은 전체주의 소련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신탁통치를 거부하고, 공산주의를 대변하는 세력과의 좌우합작을 거부하고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있었다. 또한 자유 대한민국을 붕괴시키려는 소련과 중국 및 북한 공산주의체제의 침략전쟁이자 공산 제국주의 확장전쟁인 6.25전쟁에 맞서 세계 민주주의 국가와 연대하며 대한민국의 자유체제를 지켜내고 발전시켜 낼 수 있었다.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
[김광동]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