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은 지난 18일 우리사회에 만연한 ‘잘못된 생각’을 깨는 연속세미나 「생각의 틀 깨기」를 개최했다. 자유경제원의 1차 세미나 주제는 자본주의·시장경제를 비판하는 논리 중 하나인 ‘소외’였다. 개인이 사회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의미인 ‘소외’는 좌파들의 대표적인 선동 용어로 산업화, 도시화의 성공을 폄훼하며 비일비재하게 사용되고 있다.
선동가들은 ‘소외’를 천하에 없는 심각한 문제인양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는 허상에 불과하다. ‘소외 같은 것은 없다’ 세미나를 통해 자유경제원은 전문가들과 함께 실체가 없는 ‘소외’에 대해 집중 점검해보았다. 아래 글은 패널로 참석한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의 토론문 전문이다. 남 교수는 “유사 이래 인간은 언제나 외롭고 고독했다”며 “마르크스와 프롬의 주장은 유토피아-낭만주의”라고 지적했다. 마르크스와 프롬이 꿈꾼 인간과 사회는 이상사회가 아니라 환타지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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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유사 이래 인간은 언제나 외롭고 고독했다
먼저 마르크스의 아름다운 어록부터 감상하자.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특수한 배타적 활동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두가 각각 자기가 원하기만 한다면 어느 분야에서도 소양을 쌓을 수 있다. 보편적인 생산은 사회가 통제한다. 또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은 이 일을 또 내일은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며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고기를 잡고 저녁에는 양떼를 몰고 저녁식사 후에는 비판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결코 직업적인 사냥꾼, 어부, 양치기 또는 비판가가 되지 않고서도 내가 원하기만 하면 그 모두를 다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멋진 생각을 떠 올린 마르크스는 대체 얼마나 위대한 인간이란 말인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오늘, 내일 바꿔가며 할 수 있는 사회, 그래서 나는 고등학생 시절 기꺼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그 결심의 타이밍이 ‘고등학생’ 때라는 거다. 지력의 이행 단계로 보았을 때 마르크시즘은 고등학생 정도에게 배정되는 것이 적당하다.
고등학생의 특징은 머릿속에 선악 구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옳거나 그르거나 아니면 검거나 희다. 옳은 것 같으면서 그르거나 검은 듯 흰 것을 보기에 고등학생의 시력은 탄력이 떨어진다. 마르크시즘의 가장 큰 매력은 명료함이다. 세상이 너무나 잘 보인다. 설명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가야 할 길이 뚜렷하다.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나이가 더 들고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게 된다. 더 나아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숫자와 공식으로 되어 있지만 ‘다스 카피탈’이 실은 경제학 도서가 아니라 유토피아 ‘문학’이라는 사실을.
마르크시즘은 ‘낭만주의’ 문학이다. 그는 자신의 문학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방면으로 풀어썼다. 해서 살아있다면 그에게 돌아갈 상은 경제학상이 아니라 문학상이다(어쩌면 노벨상도 가능하다고 본다). 낭만주의가 꿈꾸는 세상은 천상天上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그 꿈을 꾸는 사람이 딛고 있는 땅은 질퍽한 흙탕길이다. 해서 낭만주의는 현실에서 당연히 패배한다.
그리고 코피를 흘리면서 투덜거린다. “젠장, 저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을 가로막는, 우리를 억누르는 이 비인간적인 괴물은 대체 뭐지?” 여기에 문학 수업을 정치학 수업으로 착각하고 들어간 인간들이 강의실을 나와 외치기 시작한다. “바꿔야 해! 바꿀 수 있어!! 혁명이야!!! 골로 가라 자본주의!!!!” 이런 허술한 인간들 중 하나가 프롬이다. 프롬의 낭만지수는 마르크스보다 훨씬 높다. 증세가 매우 심각하다는 얘기다. 프롬은 현실의 인간 대신 자기가 머릿속에서 제 멋대로 창조한 인간을 놓고 역사와 세계를 설명한다. 대략 이런 식이다.
(1) 경제적 파탄의 위험을 피하고 무한한 성장이라는 목적을 버리고 선택적 성장을 추구해야만 할 것이다.
(2) 물질적 이익이 아닌 정신적 만족이 효과적인 동기가 되는 사회풍조와 노동조건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3) 과학적 진보를 촉진함과 동시에 이 진보가 실제로 응용됨으로써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바람직하다. 그러나 프롬에게는 인간이 이제껏 벌여온 피와 살육의 기록이 보이지 않나 보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이고 또 죽이고 확인사살을 반복한 인간의 역사가 선언만으로 단절이 가능한 것처럼 여겨지는 모양이다. 생각만 가지고 바꿀 수 있다면 지구는 진즉에 낙원이 되었다. 어제의 인간이 오늘의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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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 마르크스. 1818년 독일에서 태어나 1883년 영국 런던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공산주의 혁명가, 역사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이다. |
소외란 낯설다는 얘기다. 나를 둘러싼 제반 환경이 낯설게 느껴질 때 그리고 그것이 견디기 힘들 때 우리는 그것을 소외라고 부른다. 이런 수준의 프로파간다는 고등학생 정도에게 먹히는 게 정상이다. 그 나이를 넘어서도 소외 따위의 어설픈 선동에 넘어간다면 그는 자신의 지적 발달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인간이다. 그들(마르크스. 프롬 + 기타 등등)은 소외가 자본주의의 고유한 증상이라는 주장으로 현실을 비판한다. 단순화 시키면 이렇다.
“인간은 노동과정에서 소외된다(창의력을 상실하고 자본가가 시키는 대로 고통스러운 생산의 과정에 투입된다). 인간은 노동의 결과에서 소외된다(자기가 만들고도 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안 그런 세상이 있었나. 주장하는 사람들이 역사주의자들이니까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그 전 세대를 보자. 먼저 봉건시대다.
“인간은 노동과정에서 소외된다(창의력을 상실하고 영주가 시키는 대로 고통스러운 생산의 과정에 투입된다). 인간은 노동의 결과에서 소외된다(영주가 거의 다 가져간다).”
다음은 또 이전인 노예제 사회다.
“인간은 노동과정에서 소외된다(창의력을 상실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고통스러운 생산의 과정에 투입된다). 인간은 노동의 결과에서 소외된다(주인이 다 가져간다).”
마르크스와 프롬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소외를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생산과정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유를 뭐 대단한 통찰이라도 되는 듯 설명한다. 바로 분업이다. 이전 단계인 노예제나 봉건제에서 노동 계층은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혼자서 다 한다. 힘들기는 해도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는 안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 안에서 노동자는 하루 종일 철사를 구부린다. 그는 자신이 지금 옷핀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저 생산의 한 영역에서 하루 종일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그래서 그는 그걸 고통이라고 느끼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생산과정에서 소외된다는 설명이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들의 통찰이 고등학생용이라는 사실은 바로 드러난다.
누군가는 이 분업을 전체로서 대단히 효율적이고 긍정적인 것으로 본 반면 이들은 이 과정의 일부와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한다. 동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다. 접근 동기는 좋은 상황을 상상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매진하는 것이다. 반면 회피 동기는 나쁜 상황을 상상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매진하는 것이다. 회피 동기는 부분지각에서 온다.
일부만 보기 때문에 시야가 좁고 단순하며 몽매하다. 접근 동기는 전체지각에서 온다. 전체를 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의 힘든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쉽게 극복한다. 행복한 사람은 전체지각이 가능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부분지각으로만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은 그래서 부분지각만 가능하고 전체지각이 안 되는 덜 떨어진 사람을 가리킬 때 쓰인다.
이들은 소외가 극복이 가능하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태생적으로, 기본적으로 고독한 존재라는 사실은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이들이 상정하는 인간은 현실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외가 한국사회에서 먹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유난히 우리가 혼자이고 외로운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성장을 통해 자유주의를 획득한 것이 아니어서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내면이 없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고독에 순응하는 대신 결사적으로 저항한다. 저항하려면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때 이들을 도와주는 게 바로 소외라는 단어다. 그들은 나는 고독하다라는 말 대신에 나는 소외되었다고 외친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이들은 이 고독을 국가가 정부가 어떻게든 해달라고 보챈다.
소외가 한국에서 먹히는 두 번째 이유는 한국이 절정의 시기(猜忌)사회이기 때문이다. 시기와 질투는 인간 내면의 고유한 것이다. 누군가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증오와 연결시킨다. 전체적인 총량이 증가한 것은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현재의 내 지위와 위치가 남만 못한 것만 눈에 들어온다. 이때 이런 불만을 도와주는 것이 소외라는 단어다. 경제개발과 성장은 같이 했는데 자기는 거기서 빠졌다는 그래서 소외되었다는 주장이다. ‘경제개발에서 소외된’ 따위의 문장이 교과서에 태연하게 등장하는 것은 이런 발상에서 나온다. 소외된 사람은 없다. 전체는 상승했고 누군가는 다만 덜 가졌을 뿐이다.
신중섭 교수의 지적대로 마르크스와 프롬이 꿈꾼 인간과 사회는 이상사회가 아니라 환타지다. 설명이 깔끔하다.
“(전략) 이상사회라면 우리가 곧 도달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환타지는 그렇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도 실현될 수 없는 상상의 세계이다. 이런 환타지 같은 인간관과 사회관을 설정하고 그것으로 산업사회와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고 비판하고 평가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꿈이 아니라 망상을 쫒는 것이고, 현실을 부정하고 파괴를 선동하여 사람들을 방황하게 하고 희망이 없는 죽음의 골짜기로 몰고 가는 것이다. (중략) 경제적으로 시장의 활성화는 인류에게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어느 시대에도 가능하지 않았던 놀라운 해방을 제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외’ 개념에 포획되어 그 개념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시장의 가져다준 해방의 메시지를 전혀 읽지 못하고 시장을 악마 취급하고 있다. 자신들이 시장의 수혜자라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공식적인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나라의 사람들은 어느 시대보다도 잘 먹고, 건강하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완전한 세계도 이상적인 세계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존재해온 세계 가운데 최상의 세계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이나 사회를 ‘백지’에다 새롭게 그려 그것을 현실에 구현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점을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평소 소신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세상은 더 좋은 세상이 아니라 더 나쁜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게 접근동기이고 전체지각이고 긍정의 세계관이다. 그리고 인간은 아주 엉망이지도 아주 희망도 아니지만 기특한 구석이 하나 있다. 신중섭 교수의 말이다.
“(전략)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나 프롬의 생각과는 달리 인간은 환경이나 사회를 수동적으로만 반영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맹목적으로 적응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적응한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생각을 가지고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략)”
바로 밈이다. 인간은 유전자와 싸워 이긴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다. 이런 장점을 모른 채 혹은 외면한 채 ‘소외’라는 단어에 빠져드는 순간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완벽하게 소외된다. 아마도 얼마 후에는 소각될 것이다. 무지로 가끔은 오기로. 소외라는 단어는 스스로 불행을 부르는 자들의 이마에 둘러진 공통의 슬로건이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남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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