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08)-서양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정신 
히포크라테스(BC 460?~BC 377?) 『히포크라테스 선집』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나는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환자를 이롭게 하기 위해 섭생법을 쓰는 반면, 환자가 해를 입거나 올바르지 못한 일을 겪게 하기 위해 그것을 쓰는 것을 금할 것이다.
나는 그 누가 요구해도 치명적인 약을 주지 않을 것이며, 그와 같은 조언을 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서양의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히포크라테스의 저작 <선서(orkos)>에 나오는 열 가지 선서 가운데 두 가지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400여 년 전에 소크라테스는 의사로서의 윤리 규범을 정립하고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그는 자신이 천명한 규범을 지킬 것을 맹세하지 않는 학생들을 문하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늘날 모든 의학도가 의사로 입문하면서 수행하는 '선서'의 기원이 여기서 나왔다.

히포크라테스는 의신(醫神)으로 추앙받은 전설 속의 인물인 아스클레피오스의 19대 후손이라고 말해진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 아폴론의 아들로 일컬어진다.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에서는 아스클레피오스를 섬기는 신전과 병원 시설을 갖춘 성역을 조성하여 복합 의료센터의 기능을 하게 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도시 국가 에피다우로스는 기원전 6세기부터 의학의 성지가 되었고, 히포크라테스가 태어나서 의술을 펼친 에게해 코스 섬의 아스클레피오스 성역도 기원전 4세기부터 최고의 의료기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대부터 의술이 번성함에 따라 자연스레 그리스의 의사들은 의술의 명문가문인 아스클레피오스 가문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가업으로 계승되던 의술의 특성으로 보아 실질적으로도 특정 가문 출신들이 의사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것으로 보는 게 무리가 아니다. 아무튼 히포크라테스는 실존했던 숱한 의사들 가운데 최고의 명의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자신의 독창적이고 탁월한 의술을 여러 저작에 남겼다. 지금까지 60여 편이 남아 <히포크라테스 전집>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말 전집은 발간되지 못했다. 그나마 다섯 편의 글이 묶여 <히포크라테스 선집> 형태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동안 고대 그리스 인문 고전들은 고대 헬라어 원전의 번역서들이 상당 수 나오고 있지만, 자연과학이나 의학 분야의 번역 작품은 희소했다. 이런 척박한 상황에서 서양의학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서를 일부나마 접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플라톤의 대화편 43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고대 헬라어 원전이 번역된 것은 아직도 20여 편에 불과한 상황이니 대중성이 떨어지는 히포크라테스의 저작 가운데 다섯 편이라도 번역된 것은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사정이 이러하니 서양고대의학을 집대성한 로마의 명의 갈레노스(Claudios Galenos, 129~199)의 명저 <오페라(Opera)>가 아직도 번역되지 못한 것을 탓할 계제가 아니다.  

이 책은 서양 고대의학 전문가인 연세대 의사학과(醫史學科) 여인석 교수와 그리스 고전 연구자들의 학술공동체인 정암학당의 이기백 박사의 협동 작업으로 탄생되었다. 이들 번역자들은 그리스 철학과 의학에 대한 연구와 강의를 통해 축적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번역과정에 녹여냈다. 꼼꼼한 주석에서 이들의 전문성과 열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의학적 전문지식이나 헬라어 번역 역량 가운데 어느 한쪽만 가지고는 도저히 해 낼 수 없는 힘든 작업을 두 분야에 최고의 전문성을 갖춘 두 사람의 협업을 통해 훌륭히 완수해 냈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저작은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정신과 고대 그리스 의학의 특징을 개관하는데 도움을 준다. 특히 당대의 의학 수준과 의사들의 의학 지식, 그리고 인간의 몸과 질병의 본질에 대한 고대기의 지적 기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선서(orkos)>를 비롯, <공기, 물, 장소에 관하여>, <신성한 질병에 관하여>, <전통 의학에 관하여>, <인간의 본질에 관하여>가 이런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대대로 의술을 가업으로 전승한 히포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활동하면서 그리스 고대 의학의 꽃을 화려하게 피워냈다. 이제 히포크라테스의 저작에 나타난 그의 의학정신과 의학지식의 일면을 살펴보자. 히포크라테스는 독을 사용한 안락사의 금지와 낙태의 금지를 서약하도록 했다. 고대 그리스 의사들에게 매우 엄격한 윤리규범을 요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내용이 작품 <선서>에 담겨있다.

   
▲ 히포크라테스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질병이 신적인 요인에 유래한다는 과거로부터의 전승 지식을 부정하고, 자연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보는 합리적 접근을 시도했다. 질병의 원인이 풍토, 기후 등 자연환경과 인간마다의 체질적 특징, 그리고 음식물의 섭취에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 환경의학을 주창한 셈이다. 그는 환경과 인간, 그리고 음식과의 관계를 다양한 조합을 통해 설명하면서 발병의 원인과 그 치료법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히포크라테스가 “천문학이 의학과 무관하기는커녕 전적으로 크게 기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환경적 요인이 인간의 건강과 본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지를 정확하게 통찰했다. 기후나 풍토는 물론, 나아가 국가의 제도가 인간의 신체적 건강은 물론 용기, 인내, 노력, 기개 등 인간 본성의 생성과 발휘의 정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아시아 지역 사람들이 유럽인들에 비해 호전적이지 못하고 유순한 것도 일정한 계절이 가장 큰 원인이며, 게다가 자율적이지 못해 왕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파악한 점도 인상적이다.

특히 희랍인이건 아시아인이건 "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다스리며 자신들을 위해 어려움을 감내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호전적"이라며, 정치제도가 사람들의 본성의 변화도 가져올 수 있다고 통찰해내는 대목에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의사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본성을 깊이 이해한 히포크라테스의 철학자적 면모까지 느낄 수 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국민성이 국가제도의 영향에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을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들 사이의 사고와 행태의 차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 기원전 4세기 히포크라테스의 후예들이 의술을 펼치던 페르가몬의 아스클레피오스 성역의 한 회랑. ⓒ박경귀

히포크라테스는 실증의학의 효시를 보여준다. 그의 실증적 정신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궁구로까지 나아갔다. 그는 인간은 물, 불, 공기, 흙의 요소로 이루어졌다는 기존에 널리 유포된 4원소설을 거부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실증의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피, 점액, 황담즙, 흑담즙으로 이루어졌다는 4체액설을 주장했다. 4체액과 온냉건습(溫冷乾濕)의 요소가 상호 결합하여 다양한 질병의 상황을 만들어낸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인류 최초로 질병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파악해 보고자 했던 시도에 다름 아니었다.  

또한 자연환경이 인간의 건강과 질병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 그의 관점은 환경의학의 고전적 정신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그가 환자 개개인에 대한 정확하고 엄밀한 관찰과 임상 사례를 강조한 것은 실증의학의 방법론적 토대가 되고 있다. 그의 의학 정신과 접근방법, 인간의 몸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19세기까지 2400여 년 동안 서양의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서양의 모든 의사들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히포크라테스는 "신이 아니라 질병이 몸을 손상시킨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일깨우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초자연적인 주술이나 정화로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배격했다. 인간의 질병도 자연적 현상의 하나로 파악하고 그 원인을 규명하고 궁극적인 치료법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물신숭배(animism)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고대에 히포크라테스가 보인 실증적 사고는 놀랄 만한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추구한 합리적 과학정신의 대변으로 볼 수 있겠다. 

히포크라테스는 자신의 관찰과 임상 경험을 치밀하게 기록하고 분석했다. 의술의 전수 방식도 달랐다. 동양에서는 개인적 비의로 의술을 전승했다. 히포크라테스보다 600여년 후에 등장한 중국의 전설상의 신의(神醫) 화타(華佗)의 의술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와 달리 히포크라테스는 자신의 관찰과 임상 분석을 토대로 시행한 실제 의술의 사례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후세 의사들에게 전수했다. 이러한 경험주의적 태도와 성과는 '서양의학의 아버지'로서 손색없는 탁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또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여기서 그가 말한 원래의 '예술'이란 오늘날 쓰는 '아트(Art)'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는 고대 헬라어로 '테크네(techne)'란 용어를 썼다. 당시 이 말은 '기술'이나 '기법'을 폭넓게 의미하는 말이었으니 여기서는 '의술'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테크네'가 로마시대에 라틴어 아르스(ars)로 바뀌고 오늘날 '아트'의 개념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아무튼 히포크라테스는 이 말을 통해 필멸의 인생들을 위해 봉사해야 할 의사들의 소명이 얼마나 중요하고 영속적일 수밖에 없나를 강조한 것이었으리라. 독자들은 바로 이 책에서 영원히 살아남은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정신을 통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Ars longa Vita brevis)'의 참뜻도 더불어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히포크라테스 선집』, 히포크라테스 지음, 여인석․이기백 옮김, 나남(2011), 272쪽.
[미디어펜=편집국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