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힘이 없으면 국민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목도했다. 역사적 경험이 의미 있는 교훈이 된다는 점에서, 역사의 어느 시기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판단하는 일은 중요하다. 1945년 미군에 의해 해방된 이후 7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친일이라는 낙인이 횡행하고 있다. 자유경제원은 ‘친일’이라는 낙인이 건국-산업화 인물들을 옥죄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15일 ‘2016 친일을 생각한다’ 생각의 틀 깨기 연속세미나를 열었다.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더 큰 세계로 뻗어나가자는 주장이 ‘친일’이 되는 현실을 비판하는 자리였다.
패널로 나선 김승욱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우리나라 교과서에서 묘사한 일제 수탈론의 왜곡에 관하여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전국의 농지의 4할을 수탈한 것으로 쓰여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근거 없음으로 밝혀졌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 쌀을 10% 정도 증산한 후 절반의 쌀을 수탈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또한 절반의 쌀을 일본으로 수출한 것이며 수탈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일제가 토지로부터 가혹한 세금을 거두었다고들 하지만 지세 및 공과금은 3%에 불과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일제가 조선을 통치한 1905년 이후 40년 중 통제경제 시기는 1937 또는 1938년 이후 약 7-8년 기간”이라며 “그 이전 일제 강점기의 효과를 부정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래 글은 김승욱 교수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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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욱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 |
‘일본에 대한 의도적 적대의식과 민족가치의 유린’에 대한 토론문
이 글에서 쇠말뚝와 신작로 등에 대한 보도를 통해 민족정기 말살이란 시각으로 일본을 비난하는 점이나 근대적 변화를 식민지배적 민족 말살로 왜곡한다는 발표자의 견해에 동의를 한다.
이러한 발표자의 주장을 보완하기 위한 교과서의 일제 수탈론의 왜곡을 몇 가지 더 지적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교과서에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전국의 농지의 4할을 수탈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조정래의 장편 역사소설 『아리랑』에 조선인 모리배들이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토지를 수탈하는 것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학술적으로는 신용하교수의 『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지식산업사)에 의해서 이러한 주장이 의심에 여지없이 교과서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없음이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 밝혀졌다.1)
또한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의 쌀을 10% 정도 증산한 다음에 절반의 쌀을 수탈했다고 알려져 있다. 절반의 쌀을 일본으로 수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수탈이라고 보기보다 수출로 보아야 한다. 당시에는 이출이라고 표시했다. 이영훈교수는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신체호의 ‘조선혁명선언’ (1923)에 일제의 수탈을 상세히 고발하고 있지만, 토지 수탈과 쌀의 수탈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일제가 토지로부터 가혹한 세금을 거두었다고 생각하지만, 토지조사사업(1912년 5월 - 1918년 10월)시 사용한 지가 산정 공식을 보면 지세 및 공과금은 불과 3%에 불과했다. 이는 지주들에게 매우 유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지주제가 확대되는 것이다.
일제 하에 조선에 들어와 있는 일본인은 가장 많을 때도 75만 명으로 인구의 2.7%에 불과했다. 이들 만으로는 조선을 통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인 지주들을 통치의 회유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해서도 지주들에게 유리한 세금제도를 유지했다.
일제 시대에 가장 큰 것은 신분제 철폐이다. 사실 일제 시대에 양반들은 매우 소극적으로 협조했다. 반면에 신흥지주들은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1925년 군수 250명의 조선인 대부분은 중인 계층이었다. 사실 일제가 수탈했다기 보다 조선에 투자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옳다. 1946년에 북한 800개 이상의 대규모 공장이 가동, 제철, 제련, 전기, 화학 등 당시 세계 최첨단 수준이었다. 대규모 공장이 200개가 넘었고, 북한의 1인당 철도길이는 일본보다 높은 수준이었으며, 1인당 발전량도 일본을 능가했다.2)
일제가 조선에 철도, 도로, 항만 등을 건설하고 발전소나 비료공장 등을 건설한 것은 식민지통치를 위한 제국주의적 목적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의 발전에 기여한 것이 제국주의의 이중성이라고 해석을 한다. 일제가 자신들의 통치목적으로 실시한 근대적 개혁과 하부구조가 한국경제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는 별도의 문제이다.
즉 의도가 나쁘더라도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고, 의도가 좋더라도 결과가 나쁠 수 있는 것이다. 일제의 조치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감사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그것의 효과를 부정하는 것도 또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의 생활수준이 착취로 인해서 나빠졌는지, 나아졌는지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지만, 부정하기 어려운 한 가지는 일제 강점기를 통해서 인구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할 당시 1863년의 인구가 600만으로 추정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는 징병과 과세 등을 위해 <조선의 인구 현상>을 발행했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1904년에 5,92만 명이었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서 집계된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총인구수는 1910년의 1,312만 명에서 1925년에는 1952만 여명으로 증가했으며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2,590만 여명으로 증가했다. 여기에 해외이주자가 300만 명 정도였다. 1910년부터 1940년까지 인구는 연평균 1.3%로 증가하여 30년 만에 거의 2배 정도 증가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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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일제 하 인구변화. |
경제사에서 인구의 변화는 생활수준 변화의 가장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이다. 일제강점기를 통해서 인구가 증가한 것이 여러 통계자료에서 확인이 되기 때문에 이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경제사학회가 위치한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발행한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0』에 의하면 1910~1940 년간 조선의 경제는 연평균 3.6% 정도 성장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인구증가율을 고려하면 이 기간 중에 조선의 일인당 실질소득은 연평균 2.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며, 당시 세계 경제가 대공황을 경험하는 등 주요 자본주의 국가가 정체와 위기의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경제성장률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었다.
1906년에 이미 재정기구를 정비해서 왕실재정과 국가재정을 분리하고, 왕실재정을 대폭 축소시켜 국가재정으로 귀속시킨다. 그리고 식민통치에 필요한 철도, 항만, 도로, 통신을 위한 재정지출의 기초를 수립한다. 그리하여 한일합방(1910년) 이전에 이미 경부선(1905년)과 경의선을 (1906년)을 완공하고, 합방 직후에 평남선, 경원선, 호남선, 함경선을 건설하고, 압록강 철교도 개통시켜, 1910년대에 철도의 길이를 2배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1905년에 토지조사사업을 준비해서 합방 직후인 1912년에 바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해서 1918년에 완료해서 1914년에 지세령을 공포했다. 이를 통해서 근대법적 토지소유제도를 확립하고 지세체계를 정비했으며 광대한 국유지를 만들어서 식민통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1912년에 조선민사령을 발표해서 사유재산제도 하에 ‘사적 자유의 원칙’을 세웠다.
즉 재산권에 관한 근대 민법의 기본 원리인 소유권은 절대적이며, 국가도 이를 임의적으로 침해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소유권 절대의 원칙’과 재산권을 양도하거나 처분함에서 소유자의 자유의사에 기초한 계약만이 법적으로 유일하게 유효하다는 ‘계약자유의 원칙’을 확립했으며, 모든 재산권은 국가가 정한 법에 따라 등기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1912년 ‘ 조선부동산등기령’을 시행했다.
그리고 1920년까지 대부분의 관세를 폐지시켜 조선과 일본을 한 경제권으로 만들었다. 조선이 자주권이 없다는 측면에서는 다르지만, 요즈음 용어로 하자면, 한일FTA(자유무역협정)이 맺어진 셈이다. 그리하여 조선과 일본 사이에 무역이 크게 늘고, 많은 자본이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투입되어 농토를 개간하고 많은 공장을 세웠다.
이를 식민지수탈론에서는 일본자본에 의한 조선 수탈로 파악하는 반면에, 식민지근대화론에서는 요즈음 해외시장이 확대되고, 해외자본을 유치하면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듯이 식민지의 경제성장을 이끈 요인을 일본의 시장과 투자라는 관점으로 파악하여, 조선은 수탈이 아니라 투자를 통해 한반도를 일본인의 소유로 만들어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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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은 일제가 토지로부터 가혹한 세금을 거두었다고 생각하지만, 토지조사사업(1912년 5월 - 1918년 10월)시 사용한 지가 산정 공식을 보면 지세 및 공과금은 3%에 불과했다./사진=연합뉴스 |
일본이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1905년 이후 약 40년의 기간 중에 내선일체(內鮮一體, ないせんいったい)라는 구호를 내걸고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한 것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일이다. 1929년 세계대공황을 계기로 세계는 블록화가 진행되던 시기이다. 일제는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설립하고, 1937년에 중국본토를 공격하였다. 1938년 11월에 정부 성명으로 공식적으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블록을 형성했다.
이를 위해서 조선을 대류침략의 전진 병참기지로 만드는데 주력하면서 군수공업을 일으키고 광업개발에 열을 올렸다. 이때부터 조선어도 폐지(1938년)시키고, 일본식 성명을 강요(日本式姓名强要)(1940년 2월)했다. 중요산업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도 1937년의 일이다. 1938년에 시국대책조사횔를 열어서 통제를 강화하고 1939년에는 쌀을 강제로 공출하고, 배급을 실시했다.
이렇게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발동해서 총동원체제로 들어간 것은 중국과 본격적으로 중일전쟁을 벌리면서부터이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패망에 이르는 1945년까지를 15년 전쟁기로 표현하는데, 실제적으로 일제가 조선을 통치한 1905년 이후 40년 가운데 통제경제를 실시한 시기는 1937 또는 1938년 이후 약 7-8년 기간이다. /김승욱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
1) 이영훈, 「토지조사사업의 수탈성 재검토」, 『역사비평』, 22호, 1993; 이영훈, “국사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성과 그 신화성” 《시대정신》, 28, 2005; 김홍식 외 5인,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 (대우학술총서) 민음사(1977),
2)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3) 낙성대경제연구소, 『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0』.
[김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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