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한 시대의 문제를 꼬집고 비판하는 문학작품은 대중의 환영을 받아왔다. 그 중에서 일제시대에 태어나 소시민적 슬픔이 담긴 시를 썼던 김수영은 1960년 본격적으로 사회참여시를 쓰기 시작하며 평단에 이름을 알린 대표적 인물이다. 김수영 시인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일찍 등졌지만 그의 작품은 문단의 지지를 받으며 더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김수영의 사회참여시는 대중의 분노를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자유경제원은 ‘김수영 가짜 신화’가 만들어진 배경과 문단권력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를 비판하는 자리를 14일 마련했다.
패널로 나선 이문원 미디어워치 편집장은 “시(詩) 장르 자체가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 벌어진 ‘김수영 붐’은 언뜻 난데없는 현상으로 비쳐지기 쉬우나 배경을 살펴보면 일목요연한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편집장은 “지금의 김수영 붐은 젊은 세대에 ‘힐링 아닌 킬링’을 외치고 나온 강신주로부터 시작됐다”며 “그의 저서 <김수영을 위하여>와 관련 강의들이 소개되면서 갑자기 불 지펴진 유행”이라고 밝혔다.
이문원 편집장은 “이는 직접 체제에 대항하며 요구하라는 선동으로서 김수영을 위치시키겠다는 의도”라며 “김수영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도 그 자리이지만 그를 필요에 의해 이용하는 세력이 꾸준히 바뀌어갈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 편집장은 “문학이 젊은 세대 의식을 지배했던 1970~80년대에는 백낙청과 같은 좌익문학 진영이 그를 이용했고 지금은 강신주와 같은 기괴한 아나키스트 멘토들이 뛰쳐나와 그를 내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래 글은 이문원 편집장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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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원 미디어워치 편집장 |
때 아닌 ‘김수영 붐’ 연결고리에 ‘강신주’가 있다
발제자는 “좌파문학 진영은 자유주의 문단의 거장 미당을 끌어내린 자리에 누군가를 올려놓아 자기들의 문학이념을 대변할까를 고심했다. 그 간택 대상이 김수영이다. 지난 30여년 김수영 신화는 미당의 동상을 끌어내린 자리에 새 우상을 세웠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저들의 복합적 노림수가 있었다. 그걸 노리는 민중문학 진영에게 김수영은 충분한 전술-전략적 가치가 있었다.”면서 “그러자 모더니스트에서 출발했으나 열렬한 현실참여파로 분류되던 김수영을 끌어안았는데, 그건 신의 한 수였다. 저들이 원하는 건 좌파문학의 맹장을 내세우는 게 아니었다. 좌파 냄새를 별로 풍기지 않는 인물을 내세워 한국문학 전체를 먹는 작업이었다.”고 좌익문학 진영의 김수영 ‘간택’ 이유를 밝히고 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대단히 섬세하게 선택되고 실행된 정략적 ‘운동’에 가까웠다. 그러면서 발제문은 “그 생생한 사례가 거대 지상파 방송인 SBS가 만든 김수영을 주제로 한 카드뉴스다. 어째서 이런 위험천만한 기사가 지상파 뉴스에 버젓이 올라올 수 있었을까?”“다음 ‘나는 왜 조그만 일에 분개하는가’는 그런 그들이 만들어낸 카드뉴스의 하나인데, 백낙청 일파가 만들어낸 김수영 가짜 신화가 요즘 저널리즘을 통해 어떻게 무제한 증폭되고, 대중을 선동해 결국 대한민국을 위험에 빠뜨리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분명 맞는 논리이지만, 필자는 백낙청 일파와 스브스뉴스 사이에서 기능한, 다시 말해 좌익문학 진영 자체의 대중적 파급력이 ‘죽어가고’ 있을 시점 다시 김수영을 띄워 올려, 발제자의 설명처럼, “거대 지상파 방송인 SBS”의 카드뉴스로까지 이어지게 한 연결고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철학자’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각종 서적과 강연, 그리고 방송 등에서 맹활약 중인 새로운 좌익문화진영 슈퍼스타 강신주가 바로 그 연결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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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영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도 그 자리이고, 앞으로도 그 자리일 것이다. 다만 그를 그때그때 필요에 의해 이용하려는 세력이 꾸준히 바뀌어가고 있을 뿐이다./자료사진=SBS 스브스뉴스 |
김수영이 ‘사라졌던’ 시대의 기억
일단 시대 상황을 다시 점검해보자. 대략 1990년대부터 2010년 이전까지 15~20년 정도는 실질적으로 모든 문학 장르와 정치운동의 명확한 하강기였다. 1990년대는 이미 386세대의 정치과잉에 몸살을 앓고 이른바 ‘탈정치 선언’을 시작한 포스트386세대의 전성기였다.
그리고 영상세대이기도 해 이 시기부터 영상 장르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며 일약 문화계 최대 파이로 올라섰고, 문학 장르는 이 시기부터 점차 힘을 잃고 내려앉아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불과 10여년 사이 출판시장은 실질적으로 1/4토막 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출판시장을 버티게 해준 것은 각종 자기계발서와 학습만화 등의 위력이었지, 문학 장르는 거의 화제에 오르기조차 힘들 정도로 그 위력이 감소됐다.
이 시기 동안, 김수영이란 이름은 그저 고등학교 시절 수업시간에 배웠던 것 외엔 딱히 기억에 남지 않고,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이름이었다. 필자 기억으로도, 단 한 번도 사적대화에서나마 거론된 적이 없었다. 미디어 등 논의의 장에선 더더욱 그랬다.
문학 자체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늘 마이너 위치였던 시(詩)장르에 대해선 관심조차 가지 않았다. 그나마 남아있던 문학 향유층에서도 주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위시로 한 일본 사문학이 중점적으로 거론됐고, 범문화 소비층에선 일본 애니메이션 등에 대한 관심이 더없이 끓어오르던 때다.
그 대표 격인 ‘신세기 에반게리온’(불법 다운로드를 포함해 파일이 약 1000만 건 이상 다운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상실의 시대’ 등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집단주의에 대한 혐오와 개인주의에 대한 방어심리다. 나아가 극단적 이데올로기 자체를 증오하며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의 한계에 대한 고찰이 시작됐다. 이 모두가 김수영, 그리고 김수영의 시가 절대 재부상하지 못할 이유로 작용했다.
이제 강신주란 인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일개 재야 학자로 활동해오던 그가 처음 대중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불과 5년 전, 2011년 정도부터다. 방송계 인맥의 힘을 얻어 KBS2 ‘TV특강’에 출연하고, 곧이어 MBC라디오 ‘김어준의 색다른 상담소’에 고정 출연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이런 흐름을 타고 같은 해 출간한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 인문서적으로서는 경이적인 10만 권 이상 판매고를 올리며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
이후부턴 승승장구였다. TV 및 라디오 등 출연이 잦아지고, 강연시장에서도 맹활약하며, 2013년 출간 <감정수업>은 무려 30만 권이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한다. 결국 2014년 SBS <힐링캠프> 출연을 기점으로 강신주는 김용옥을 제치고 ‘철학자’란 타이틀을 지닌 가장 대중적인 메신저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강신주 붐’은 사실상 카운터 컬처 역할로서 시작됐다. 2008년 광우병 난동 이후 급격히 밀려온 ‘힐링 붐’이 2010년에 이르러 각종 출판시장 및 방송시장을 석권하며 일대 사회현상으로 등극하자 그에 대한 피로도도 점차 쌓여갔다. 이때 ‘반(反)힐링’ ‘탈(脫)힐링’을 외치며 등장한 게 바로 강신주다.
그의 캐치프레이즈는 ‘힐링이 아닌 킬링’이었다. 그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류의 힐링 서적들이 사회적 부조리 등에 대한 저항을 잠재우는 아편 역할을 한다고 비판하며, 청년이라면 위로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직접 체제에 대항해 얻어낼 것을 얻어내야 한다고 주장해 화제를 모았다.
당연히 지닌 사상도 좌익적이지만, 스탠스가 미묘하다. 일단 ‘자본주의가 인간에 반(反)하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곤 있지만, 실질적으론 개인의 자유를 빙자한 아나키즘에 가깝고, 유명한 경향신문 기고칼럼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에서도 알 수 있듯 반문명주의 성향이 강하다. 당연히 성장을 중심으로 한 체제에 반기를 들어 한 강연에선 “현실이 어떻게 보이느냐? 대통령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란 발언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런 그가 <철학이 필요한 시간>과 <감정수업> 사이 2012년에 출간한 책이 바로 김수영에 대한 전기적 비평서 <김수영을 위하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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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이 젊은 세대 의식을 지배했던 1970~80년대에는 백낙청과 같은 좌익문학 진영이 그를 이용했다. 그리고 지금은 강신주와 같은 기괴한 아나키스트 멘토들이 뛰쳐나와 그를 내세운다./자료사진=SBS 스브스뉴스 |
강신주가 끌어낸 ‘새로운 김수영’은 어떤 식으로 소비됐나
일단 강신주와 ‘김수영 붐’ 사이 연결고리를 더 명확히 짚어보겠다. 2012년 출간된 <김수영을 위하여>는 출간 즉시 좌익미디어의 열화와도 같은 리뷰 행진을 이끌어냈다. 특히 각 미디어의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시한 보도자료 내용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특히 자주 거론됐다.
“19세기 프랑스에는 자본주의라는 거대 구조를 파고드는 철학자 벤야민이 있었다. 그는 인간이 자본에 억눌리고 잠식되는 현실을 깨부수고자 당시 자본주의 최첨단의 도시였던 파리에 침투했다. 그는 거대 구조의 바깥에서 이를 적당히 관조하는 철학자에 머무르지 않았고, 현실에 침투하여 구조를 직시하는 글을 썼다. 결국 그는 강력한 인문학자로 남는다.
그런데 우리 곁에 그와 같은, 아니 그에 비할 수 없이 강력한 인문정신의 소유자가 있었다. 시인 김수영이다. 그는 참여 시인이나 모더니스트 시인으로 오랫동안 오해되어 왔다. 그러나 김수영은 시인이자 혁명가였고, 진정한 인문정신의 소유자였다. 이 책은 그를 바로 보고, 곧추세우는 책이다.”
스티브 잡스 등 외부의 요인으로 시작된 ‘인문학 열풍’의 무드에 편승하면서, 김수영을 앞으로 내세워 “현실에 침투하는 혁명가”적 정신이 바로 “진정한 인문정신”이라고 선동하고 있다. 그러면서 강신주는 책 속에서 이 같은 구절을 밀어넣는다.
“자유에는 이념이 없다. 오직 사람뿐이다.”
2012년은 대선이 있던 해다.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의 “사람이 먼저다” 캠페인과 맞물려 <김수영을 위하여>는 좌익문화진영은 물론 좌익정치진영으로부터도 극단적인 주목을 이끌어냈고, 곧 대선 당시 ‘김일성 만세’ 등이 거론되며 정치적 선동문구로서 ‘새삼’ 다시 지목되는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대선 이후부터다. 다음은 대선 직후 한 좌익 성향 블로거의 포스트 내용이다.
“선거의 결과야 어떻든, 다수결의 횡포이든 어쨌든 최선을 다했으면 결과에는 승복해야 한다. 최선이 있었다면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다는 것은 뻔히 아는 사실 아닌가? 나 역시 그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롯이 홀로설 수 있어야 하는 한 인간으로서. 오롯이 홀로설 수 있어야 하는 인간.
누가 무엇을 하든 결국에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었다. 자본가와 권력 그리고 그 권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나를 말하기 전에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홀로 설 수 있는가. 나는 정말 그러한가? 어디에 있건 결국 내가 아니었던가?
김수영은 시를 택했다. 그리고 시 보고 침을 뱉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침 뱉는 것이 무슨 이익을 주는 지 생각하는 마당에 우리는 침을 제대로 뱉을 수 있을까? 아니 침을 뱉을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자본의 하수인으로 살고 있는 나는 매일 누우며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결코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지는 않는다고 스스로를 자위하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새로운 그의 책에서 깨달았다. 그래도 지금은 슬프다는 것을 숨기고 싶지 않다.
하지만 누웠으니 이제는 일어날 일을 생각하고 싶다. 썽썽하게 일어나서 살아있음을 확인시키고 싶다. 새로운 선거의 결과에 실망하신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다시 일어서는 날을 기도하며 그리고 일어섰기에 부끄럽지 않았다고 자식들에게 말하고 싶다.”
김수영은 2012년 대선 이후의 좌익세력 또는 좌익 성향 대중에게 이런 식으로 기능하며 그 위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패배감과 환멸감에 시달리는 좌익 대중으로 하여금 꿋꿋하게 자신의 이념을 보전하고 개인적 투쟁을 계속해 나갈 것을 주문하기 위해,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위해 체제에 대항한 인물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저 무의미한 힐링에 지친 젊은 세대를 선동하기 위해, 김수영은 지난 수년 간 그 기능을 담당하다 급기야 SBS 카드뉴스에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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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브 잡스 등 외부의 요인으로 시작된 인문학 열풍에 편승하면서, 강신주는 김수영을 앞으로 내세워 "현실에 침투하는 혁명가적 정신이 바로 진정한 인문정신"이라고 선동했다./자료사진=SBS 스브스뉴스 |
곧 ‘제2의 김수영’을 찾아 나설 범좌익세력 망령들
필자가 지목하는 부분은 바로 여기다. 김수영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도 그 자리이고, 앞으로도 그 자리일 것이다. 다만 그를 그때그때 필요에 의해 이용하려는 세력이 꾸준히 바뀌어가고 있을 뿐이다.
문학이 젊은 세대 의식을 지배했던 1970~80년대에는 백낙청과 같은 좌익문학 진영이 그를 이용했다. 그리고 지금은 강신주와 같은 기괴한 아나키스트 멘토들이 뛰쳐나와 그를 내세우고, 그로 인해 얻어진 새로운 유명세를 좌익정치진영이 받아 또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김수영이라는 시인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든 그 누구라도 근대사 속에서 집어내 새로운 선동도구로서 활용하는 범 좌익세력 망령들일 지도 모른다. /이문원 미디어워치 편집장
[이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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