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소녀의 눈을 통해서 본 평양의 실상…평범한 모습속 조작된 현실
자유경제원은 27일 리버티 홀에서 ‘한편의 영화로 북한 공산체제를 배운다: 다큐영화 『태양 아래』, 왜 봐야 하나’ 토론회를 개최했다. 영화 『태양 아래(Under the Sun)』는 러시아 감독 비탈리 만스키가 평양에 사는 8세 소녀 ‘진미’와 함께 1년 동안 생활하며 깨달은 북한 전체주의의 광기를 폭로한 리얼 다큐멘터리다. 러시아와 북한 정부의 상영금지 압박으로 러시아 개봉이 취소된 바 있다. 『태양 아래(Under the Sun)』는 한국에서 자유경제원 토론회와 함께 27일 전 세계 최초로 개봉했다. 이 작품은 최근 제21회 빌뉴스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제40회 홍콩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상 등 6개의 국제영화제를 수상한 바 있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최공재 영화감독은 “영화 태양 아래의 화면 프레임이 깨지면서 나타나는 현실은 가히 충격적”이라며 “북한 평양에 사는 진미 가족의 평범한 모습은 조작된 현실임이 드러난다”고 전했다. 최 감독은 “감독의 모험은 북한의 충격적인 실체를 더욱 강렬하게 관객에게 전달하는데 성공한 것”이라며 “가장 성공한 북한인권 영화 ‘김정일리아’도 인터뷰로 점철됐고 다른 영화들도 북한의 폐쇄적인 구조상 한계점을 보이는 화면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이 영화는 완성된 작품의 모습을 갖췄다”고 평했다.

최 감독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엄청난 시각의 확장성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며 "영화에서 우리는 한 개인이 아닌 나라 전체가 트루먼쇼인 놀라운 순간을 발견한다"고 강조했다. 아래 글은 최공재 영화감독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최공재 영화감독
슬라이드 영사기의 불빛 프레임 안으로 귀여운 아이와 가족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 초반, 평범하고 평온해 보이는 평양시내와 사람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보여지다 어린 진미의 등굣길을 챙기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과 학교생활이 보인다. 뭔가 어색해 보이지만 그건 연기가 미숙한 출연자로 이해하고 화면을 계속 응시한다.

다른 곳과 다를 바 없는 한 평범한 가족이 필름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잔잔히 보여지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 그 가족들의 앞으로 불쑥 나타난다. 영화스텝인줄 알았지만 그로 인해 화면의 프레임이 깨지면서 나타나는 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는 북한의 감시원이었고, 진미 가족의 평범한 모습은 조작된 현실임이 드러난다.

픽션 프레임이었던 화면은 논픽션으로 전환되며 관객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영악한 감독은 위험한 모험을 한다. 두 개의 프레임을 만들어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북한의 현실을 보여주기 시작하는데 감독의 그런 연출의도는 정확하게 관객에게 인식된다. 감독의 모험은 북한의 충격적인 실체를 더욱 강렬하게 관객에게 전달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 영화 '태양 아래' 타이틀시퀀스의 프레임.


   
▲ 영화 '태양 아래'에서 프레임이 깨지는 순간


이 영화는 기존의 북한인권을 다룬 다큐멘터리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북한 내에서 촬영했다는 장점을 떠나 제대로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모습을 갖췄다.

그간의 북한관련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보면 기존 자료들이나 인터뷰에 근거한 작품들이 많았다. 가장 성공한 북한인권 영화 ‘김정일리아’도 인터뷰로만 점철되어 있고, 여타 다른 영화들도 북한의 폐쇄적인 구조상 그 한계점을 보이는 화면에 국한되어 있어야만 했다.

오로지 증언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영화들은 그 증언의 신뢰도를 떠나 영화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터뷰들은 지루하고, 익숙하지 않은 북한 말투는 때론 거부감이 들거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북한관련 영화들은 논픽션이 아닌 픽션으로의 도전을 시도하지만, ‘크로싱’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눈에 띄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모 탈북자 출신의 영화인 앞에서 북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남한에서 태어난 걸 저주라 말하는 한국 영화계의 현장에서 노골적인 탈북자나 북한인권 영화를 제도권으로 끌어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뿐더러,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저예산으로만 만들어지고 작품의 퀄리티는 낮아진다.

하지만, 영화계의 좌파들은 그것마저도 인정하지 못했다.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2010)’는 탈북자를 다루지만, 실상 그 안의 내용은 남한의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탈북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의 행적을 따라가지만 보여지는 것은 그 개인의 삶이 아니라 그 삶을 파괴시키는 현 남한사회의 문제점들이다.

주인공 탈북자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고, 온전히 그것은 그의 선택이 아닌 사회의 부조리가 된다. 결국, 이 영화는 북한이나 남한이나 똑 같은 지옥이라는 묘한 결론을 내리지만 관객은 이 영화에 반응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관객은 탈북자들의 삶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욕지기를 쏟아내고 싶은 남한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계기로 탈북자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전규환 감독의 ‘댄스타운(2010)’ 역시 탈북 여성으로 주인공인 ‘라미란’이 나오지만 거기서 보여지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 자본주의 사회의 슬픈 자화상일 뿐이다.

   
▲ 영화 '태양 아래'에서 우리는 한 개인이 아닌 나라 전체가 트루먼쇼(1998, 피터 위어 감독)인 놀라운 순간을 발견한다./사진=영화 '태양 아래' 스틸컷


제 1회 북한인권영화제의 단편영화 제작지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만난 시나리오들은 가히 충격적일 정도로 왜곡되고 일그러져 있었다. 오로지 증언에만 의존하고 자료라곤 쉽게 접할 수 없었던 한계는, 그렇게 탈북자와 북한인권은 소재 이외에는 더 이상 확장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독립예술영화관들을 장악한 영화계 좌파권력으로 인해 조그맣게라도 만들어진 북한인권 영화들(48미터, 겨울나비 등)은 제대로 된 극장을 잡아보지도 못하고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만 돌아다니는 탈남(?)영화 신세가 됐다.

2014년, 그러던 북한관련 영화가 한계에 직면할 무렵 하나의 놀라운 현상이 벌어진다. 그것은 바로 김진무 감독의 ‘신이 보낸 사람’이 독립영화계가 아닌 일반 상업영화 배급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진 것이다.

기독교영화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42만 명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만들어 냈고, 그것은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들이나 관객들에게 북한인권을 제대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후, 영화계 창작자들에게 북한인권과 탈북자는 매우 중요한 소재로 자리잡으며 많은 감독들이 시나리오를 발굴하고 있다.

물론 탈북자를 통해 남한의 비판하는 것과 북한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양분되었기는 하지만 이제 그것이 무시할 수 없는 소재인 것만은 확실하다. 무엇보다 그들(창작자)에게 중요했던 것은 탈북자들의 확신할 수 없는 증언이 아닌 확실한 자료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확실한 자료들이라곤 탈북자들의 탈북 과정이나 뭐 그런 것들뿐이다 보니 대부분의 영화들이 ‘크로싱(2008)’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탈북자들이 만드는 영화들(김규민 감독의 ‘겨울나비’ 같은)은 너무 자기 감정에 함몰되어 버렸고, 상업영화에서의 탈북자들은 차라리 너무 멋진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그러다 이제 비탈리 만스키 감독의 ‘태양아래’를 만나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북한, 자칫 평화롭게도 보일 수 있는 그 픽션의 허상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 2014년 '신이 보낸 사람'은 기독교영화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42만 명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만들어 냈고, 그것은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들이나 관객들에게 북한인권을 제대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사진=영화 '신이 보낸 사람' 포스터


서두에서 말했듯 그 픽션의 프레임이 깨지는 순간 펼쳐지는 논픽션의 확장된 북한 모습은 관객들도 놀라고, 한국의 창작자들도 놀라게 될 것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그 엄청난 시각의 확장성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한 개인이 아닌 나라 전체가 ‘트루먼쇼(1998, 피터 위어 감독)’인 놀라운 순간을 발견한 것이니 말이다.

또한, 그간 정체되어 있고 발전을 할 수 없었던 북한인권 관련영화에도 상당한 영화적 확장성을 제시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 한편의 영화를 통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이상 창작자들 역시 그 동안의 의문점이나 한계를 해소하고 드디어 의식의 확장 작업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뭔가 부족하기만 했던 그간의 북한관련 영화들의 한계를 넘어서고, 영화 속에서 직접 프레임을 깨면서 드러내는 픽션과 논픽션의 조합은 이런 영화들도 이제 완전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다. 영화는 대중들에게 다가서기엔 올드한 편집으로 자칫 지루해 보일 수도 있고, 그래서 흥행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극장은 과연 얼마나 잡혔을까도……

하지만, 북한을 다룬 영화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보여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영화인 것만은 확실하다. 외국인이 만든 이 한편의 영화를 통해 직접적 당사자인 한국의 관객들과 영화인들이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할 때임을 자각해야 한다. 북한 문제. 그 누구보다 할말 많고 잘할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이 영화가 대한민국에 던지는 숙제다. /최공재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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