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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원재 자유기고가 |
왜 젊은 보수들이 늘어나는가?
젊은 보수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편가르기 정치싸움’이 만들어 낸 부산물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정치담론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던 기성세대에 비해 오늘날의 젊은 보수들은 보수주의 정치철학, 정책, 원리 등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나는 지금 늘어나고 있는 이 젊은 보수들이 보수주의의 원류에 매우 가깝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의 아버지,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던 그 시선을 빼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너희의 군대를 만들어라. 나아가자, 나아가자! 더러운 피를 물처럼 흐르게 하자!”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의 가사 일부분이다. 이 곡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에 지어진 곡으로,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 혁명 정신을 잘 반영한 곡이라 평가된다. 그러나 가사에서 드러나듯, 프랑스 혁명의 영광 그 이면에는 폭력으로 얼룩진 광기의 역사가 있다.
혁명의 조짐이 보이던 1789년 파리의 어느 날 밤, 시민들은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을 갖춘다. 이윽고 그들은 구체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으로 쳐들어갔고, 대규모 전투 끝에 감옥은 시민들의 손에 함락된다. 파리의 봉기 소식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지방 곳곳에서 영주의 성이 습격 당한다. 혁명이 시작되었다. 인권선언문이 낭독되고, 시민들은 왕과 귀족에 대항해 총칼을 들었다.
한편 외국인의 입장에서 프랑스 혁명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한 사람이 있었다. 훗날 보수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정치철학자 에드먼드 버크였다. 1776년에 있었던 미국 독립 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던 그는 프랑스 혁명이 미국 독립 혁명과 같은 합리적 수순을 밟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버크는 이후 프랑스 혁명이 전개되는 과정을 보며 경악한다. 분노에 찬 군중들에 의해 혁명이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양상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1790년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이라는 글을 통해 프랑스 시민들을 비판한다.
버크는 혁명이라는 정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프랑스 시민들을 보며 개탄했다. 또 군중심리의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도덕적 타락의 민낯을 지적했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은 잔혹한 학살과 부당한 범죄의 온상이었다. 혁명군들은 혁명의 적으로 간주된 성직자와 귀족들을 갖가지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고, 강간했으며, 약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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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젊은 보수들은 진보세력의 급진적인 투쟁일변도 정치를 적대하기에 새누리당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지, 대한민국 우익의 정치가치에 동조해서 그들을 뽑는 것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새누리당은 정치철학적 중심이 없는 기회주의로 재미를 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특히 마리 앙뜨와네뜨와 관련된 일화는 유명하다. 혁명군은 1793년 7월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의 8살 난 왕자 샤를을 붙잡아 왕비와 격리한다. 혁명군은 왕자로 하여금 왕비에게 불리한 진술서를 쓰도록 협박했고, 왕자는 독방에 갇혀 세뇌교육을 받아야 했다. 어린 왕자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기도 했다. 결국 같은 해 10월, 마리 앙뜨와네뜨는 왕자 샤를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죄명으로 처형당한다. 혁명군에 의해 조작된 진술로 실시된 재판이었다.
왕비는 사형에 앞서 삭발당한 채 짐마차에 태워져 파리 시내를 한 바퀴 돌며 치욕을 당했다. 이후 그녀는 목이 잘렸고, 시민들은 정의가 실현되었다며 환호했다. 마리 앙뜨와네뜨는 실제로 친절하고 검소한 여인이었으나, 혁명군들에 의해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조작되어 천하의 퇴폐귀족으로 기록되었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왕비가 처형되고 나자 쓸모가 없어진 샤를 왕자는 독방에 버려졌다. 결국 1795년, 고작 10살의 나이로 폐렴과 영양실조로 인해 독방에서 사망한다.
이렇듯 혁명은 군중의 광기 속에서 급진적으로 이루어졌다. 혁명 이후 급진파가 중심이 된 혁명정부는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더욱 많은 선전활동을 했고, 혁명정부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공포 정치를 시작했다. 18세부터 40세에 해당하는 모든 남자를 징집하여 “혁명의 적”들을 찾아나서게 했다.
1년 동안 약 50만 명이 투옥되고, 3만 5천 명이 처형당했다. 물론 이 중에는 귀족과 성직자뿐만 아니라 새로 탄생한 혁명정부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 혁명군이 혁명 과정에서 저지른 잘못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으며 시작된 혁명은 이렇게 또 다른 억압과 공포로 귀결되었다.
에드먼드 버크가 제시한 보수주의는 바로 인간의 이러한 면을 경계하고 있다. 보수주의의 신념 그 가장 깊은 곳에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언제든지 실수를 할 수 있고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감정에 휘둘리기 쉬운 존재이며, 악의 유혹에 약하고, 어리석기까지 하다. 즉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는 사람들이 정의라 굳게 믿는 것을 통해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려 하는 순간을 가장 경계한다. 사회의 개선은 인류가 오랜 시간 이성을 통해 쌓아 올린 사회구조와 법치주의를 통해 천천히,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젊은 보수들을 관찰하며 늘 에드먼드 버크와 프랑스 혁명을 떠올린다. 오늘날의 젊은 보수들은 정치적 가치관이 형성되는 시기에 '광우병 사태’라는 중대한 사건을 목도했다. 끓어오르는 혈기에 시위에 직접 참가한 친구들도 있을 것이고, TV를 통해 시위를 바라본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이후 광우병 촛불시위가 얼마나 터무니없었던 것인가를 깨닫고 나서,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던 에드먼드 버크의 감정과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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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광우병 촛불 시위는 시민주권, 시민권의 표현이 아닌 왜곡·과장된 정보에 많은 사람이 속고 분노하여 움직인 중우정치(衆愚政治, oc-hlocracy, or mob rule) 내지는 '탈선한 직접민주주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는 젊은 보수들이 늘어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자료사진=자유경제원 |
이후 세월호 사고가 터졌다. 광우병 사태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밑바닥, 그 불완전성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던 젊은이들은 세월호 시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시위참가자들 사이에서 폭력이 등장한다. 젊은 보수들은 감정적인 사람들이 정의감으로 한데 뭉치면 어떠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더욱이 그 중심에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의 선동이 있다는 사실에 이를 간다. 즉, 젊은 보수들은 시장자유주의 등과 같은 우익적 가치관에 공감해서 보수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목격함으로써 문자 그대로의 보수주의자가 되었고, 또 진보진영의 감성정치에 대항하고자 우익의 스탠스에 들어온 것이다. 소위 '국민미개론’이 유독 젊은 보수 사이에서 큰 공감을 끌어내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만일 이러한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 젊은 보수들은 진보세력의 급진적인 투쟁일변도 정치를 적대하기에 새누리당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지, 대한민국 우익의 정치가치에 동조해서 그들을 뽑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새누리당은 제1야당이 빈사상태에 이르렀다고 해서, 또 연이어 승리를 거뒀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진보세력이 급진, 투쟁, 선동 등의 386 운동권 시대정신에서 탈피하는 순간, 자기 편이라고 생각했던 젊은 보수들에게 언제든지 외면당할 수 있다. 지금 우익 스탠스에 있는 젊은 보수들을 상대로 시장자유주의와 같은 우익적 가치관을 선보이고, 이를 설파함으로써 보수정당의 정치철학에 동조시켜야 한다. 그래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새누리당은 정치철학적 중심이 없는 기회주의로 재미를 보고 있고, 또 이를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근시안적이다. 진보가 쇄신하는 순간, 젊은 보수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우원재 자유기고가
(이 글은 자유경제원 젊은함성 게시판, '우원재의 청년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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