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 건국' 릴레이인터뷰③]“건국절 논란 벌이려면 백성의 ‘국적’부터 판단해야”
박근혜 대통령이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1948년 건국’ 발언을 한 것과 관련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얼빠진 주장”이라고 반박했고, 야권의 총 공세가 시작됐다. 이들은 ‘1919년 4월11일 상해 임시정부 건립’을 대한민국 뿌리라고 주장하는 대신, 현재 남한을 미제강점기로 규정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분단의 원흉으로 여긴다.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달리 보는 이 두 가지 시선은 우리 사회를 분열시켜온 근본 요인이다. 자기 나라의 생일도 모른 채 ‘건국’을 부정하는 일을 중단시키기 위해 우파 진영에서는 ‘건국절’ 제정의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이에 미디어펜은 건국절 논란을 정확하게 진단해보고자 전문가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한다.<편집자 주>

[미디어펜=김소정 기자]‘지금 건국절 논란에 국민의 국적 문제가 빠져 있다.’

김학은 연세대학교 교수는 19일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 “1919년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볼지 1948년 8월15일을 건국으로 볼 지 따져보려면 국민의 국적부터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건국을 말하려면 먼저 국가권리가 나오는 주체의 국적을 따져야 한다”며 “임시정부 당시 국민의 국적이 일본인데 대체 어떤 나라를 건립했다는 것이냐”고 김 교수는 반문했다.

1919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항일세력은 상해를 비롯해 중국과 러시아 4곳에 임시정부를 만들고 독립운동을 펼쳤다. 1945년 해방을 맞은 뒤에도 3년여간 미군정하에 있다가 1948년 비로소 국가를 선포했고, 비로소 국민들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따라서 임시정부는 정식 국가가 아니다. 당시 우리 국민들도 호적상 일본의 주장대로 ‘천황폐하의 신민’이었다. 즉 국민의 국적이 일본에 있었고, 국가의 원수에 대한 정식명칭도 없었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획득하지 못했다. 

김 교수는 “임시정부는 앞으로 국가를 건립하겠다는 선언적 의미를 갖고 건국의 원동력이 됐지만 정식 국가는 아니었다”면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적 노력으로 비로소 국제기준에 맞는 건국을 이룰 수 있었다”고 말했다.

   
▲ 김학은 연세대학교 교수(좌로부터 두번째)는 19일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 “1919년 임시정부는 정부일 뿐 앞으로 대한민국 건립을 선포한 것일 뿐”이라며 "1948년 8월15일 비로소 국가의 구성요소를 갖추고 건국됐다"고 말했다./미디어펜
사실 우리처럼 독립선언 건국까지 과도기를 거친 사례는 우리나라 외에도 많다. 먼저 동맹국인 미국도 영국과 지리한 전쟁 끝에 1776년 7월4일 독립선언을 한 뒤 1789년 헌법을 만들고 국민에 국적이 부여되면서 비로소 건국됐다.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1934년 독립했지만 여전히 영국연방자치국으로서 국가의 원수는 영국의 국왕이었다. 국민의 국적이 영국에 속해있었던 것이다. 이후 1937년 헌법을 개정해 국가원수 항목에서 영국 국왕을 삭제했다. 비로소 국민들이 아일랜드 국적을 가지면서 진정한 독립국이 됐다.

김 교수는 “지금과 같은 건국 논란은 불필요한 것”이라며 “건국은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표준의 문제이고, 세계의 많은 국가가 따르는 개념대로 건국일을 정한다면 1948년 8월15일이 맞다”고 했다.

이렇게 김 교수는 “건국절 논란도 세계의 사례를 학문적으로 접근해 논리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한반도가 분단된 역사적 사실은 불행한 일이지만 그 원인을 대한민국 건국일을 밝히는 것과 연관시켜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국적 얘기를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국적이 궁금해졌다. 독립운동을 했던 많은 인사들이 중국이나 미국 국적을 취득한 사실이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단 한번도 미국 국적을 취득한 일이 없다고 한다.

김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으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 박사야말로 미국에 오랫동안 있었지만 ‘국적’을 취득한 사실이 없다”면서 "반면 당시 중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중에 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이유는 그 나라 시민이 되기 위해 충성 맹세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평소 지론 세가지, ‘해외에 나가서 공부하되 반드시 돌아와서 나라를 위해 일하라’ ‘국적을 버리지 말라’ ‘다른 나라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라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김 교수는 “하지만 이 대통령은 평소 지론과 달리 마지막 항목인 다른 나라 여성과 결혼하지 말라는 항목은 지키지 못했다"며 "대신 독립운동가로서 핵심 덕목인 ‘국적’을 버리지 않았고, 이는 국제사회의 기본 룰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건국일, 1948년 8월 15일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가로서 갖춰야 할 모든 구성요소를 갖추고 세계의 지지를 받으며 자유로운 투표를 통해 만들어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탄생순간은 '상식’으로서 통용되어야 할 엄연한 '사실'이다./연합뉴스
그리고 이 대통령은 취임한 뒤 진정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 대통령은 우리가 여러 나라와 교역하면 특정 국가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통상외교를 시작했다. 통상과 선교는 국경이 없으므로 이 두가지를 개방한 것이다. 

김 교수는 “건국 이전과 이후의 독립운동을 비교해봐도 국가의 존재감에 차이가 있다”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이 투쟁과 희생의 역사였다면 건국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로 독립운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외교력을 갖추지 못했으니 투쟁의 독립운동일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값지고 고결한 희생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을 하고 나니 비로소 외교를 통해 영구한 독립이 가능했다.

임시정부가 병력을 모아서 전쟁 준비를 했지만 미국이나 영국이 도와주지 못한 것은 1818년부터 존재한 ‘중립법’때문이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다민족 출신이 모여 나라를 구성한 미국은 일찌감치 자국에서 어떤 민족도 병력을 키울 수 없도록 하는 중립법을 만들어놓았다”며 “이 중립법 때문에 임시정부 인사들이 미국에서 군사훈련을 하지 못했고, 당시 한일들을 마구 학살하는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병력을 모으는 일이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1919년 건국을 주장하려고 해도 기본 조건을 못 갖춰 허점이 너무 많다”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기준에 맞는 건국을 추진했고 이를 위해 자신의 국적을 버리지도 않았다. 당시 세계 최강인 미국을 이용해 대한민국을 건국한 비상한 인물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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