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번 최순실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의혹만으로 국가가 이렇게 혼란스러워 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광우병 사건을 다시 보는 것 같다. 최순실 씨에게 잘못이 없을 거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형법은 모든 국민들에게 ‘무죄추정의 원칙’을 밝히고 있다. 전 근대적인 ‘네가 네 죄를 알렸다’가 유행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회에 이토록 선동이 판칠 수밖에 없는 원인을 꼬집고, 근본적인 개선방안을 밝히고자 한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고양이들이 사는데 이 고양이들은 참 경계가 심하다. 나와 얼굴을 몇 년 동안 마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나가기만하면 꼭 저 멀리 갔다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먹이를 주거나 주변에 머물러도 소용이 없다. 내가 친해지려고 노력하면 한동안은 가까워졌다가 반드시 나를 경계하는 상태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구내식당에 자리 잡고 사는 고양이들은 신기하게도 나를 처음 봤지만 저언혀 경계하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 보던 경계심 많은 고양이들을 보다가 식당 고양이를 보고 정말 신기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원인을 알게 됐다. 그 식당은 육ㆍ어류소비가 많은 곳이어서 그날 사용할 분을 떼고 난 뒤 고양이 먹이로 식당 뒤편에 던져주곤 했다. 고양이들은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고양이를 위협하는지 아닌지 의심도 없이 달려들어 먹기 시작했다.
이건 먹이를 주는 사람과 장소를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거기 먹이를 노리는 경쟁자가 많기 때문에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먹이의 신뢰성보다 속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이 고양이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겁을 주거나 잡아가려해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속도경쟁으로 인해 사람에 대한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심리학용어 중에 ‘초두효과’와 ‘노출효과’라는 게 있다. 초두효과는 첫인상과 같다. 먼저 들어온 정보가 앞으로 들어오는 정보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노출효과는 첫인상보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통해 보다 호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노출효과는 그래서 첫인상보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정보를 통해 보다 본질적인 정보를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
|
|
▲ 광우병 사건을 다시 보는 것 같다. 최순실 씨에게 잘못이 없을 거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 사회에 이토록 선동이 판칠 수밖에 없을까./자료사진=JTBC 뉴스룸 캡처 |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이 초두효과를 강제한다. 우리나라는 학교라는 제도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 사회 속에서 죽을 때까지 ‘시험’이라는 제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초·중·고 최소한 12년, 보통 14~16년을 이 시험제도 속에서 보낸다. 그리고 이 제도를 통과해야만 어떤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사회는 아이들을 식당에 사는 고양이로 만든다. 시험을 내는 선생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에 관해 고민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오직 시험성적이라는 먹이를 향해 전력으로 내 달려야 한다. 이 먹이를 주는 사람이 나를 사냥하려는 것인지, 속이려는 것인지, 선의에서 하는 것인지는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시험은 날짜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제도아래에서 학생들은 주어지는 모든 정보를 100% 참이라고 가정하는 수밖에 없다. 정해진 시간까지 전력으로 뛰어야하기 때문이다. 정보의 신뢰성, 사실성이 아니라 오직 속도만이 추앙받게 된다.
사회가 아이들을 평가하는 이 한 가지 잣대로는 아이들의 심리에 초두효과 밖에 작동할 수 없다. 아이들은 십 수 년 동안 시험제도아래에 노출 돼 왔다. 초두효과에만 반응하도록 시험제도아래 십 수 년 간 노출시켜온 것이다. 심지어 그 교육이 끝나고 난 뒤에도 시장에서 ‘시험’을 통한 결과물의 분배를 요구한다.
토익시험을 보고, 자격증을 따고,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얼마나 봉사했는지가 아니라, 법이 보장하는 자격증을 통해 내가 생산의 결과물을 분배받을 정당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시장을 지배하는 원리가 정치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험제도는 정말로 경제인의 종말을 부르고 있다. 시험에 중독된 이들이 시장에서도 시험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기준을 달성한 우리 기업에 특혜를, 이 기준을 넘어간 기업에 제재를, 인증을 만족한 우리에게 보조금을.
우리의 교육제도는 현재 정부 독점상태다. 우리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기준만이 입력된다. “주어진 시험을 통과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사회가 시험으로 이뤄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은 경쟁으로 이뤄져 있다. 시험에서 통과하는 것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의 모형이다. 그런데 자라나는 세대가 시장의 본질은 못보고 모형만 보다보니 세상 돌아가는 원리인 ‘경쟁’을 ‘시험’이라는 모형에 끼워 넣으려고 한다.
그들에게는 시험만이 유일한 경쟁이기 때문이다. 이 교육제도의 정말 큰 문제는 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교육은 반드시 전체주의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똑같이 교육받은 코드에 부합하는 정보(친일, 독재, 민주, 부패 등)를 흘리기만 하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한 목소리를 낸다. 우리가 선동당해 있는지 아닌지는 오랫동안 알 수가 없다. 모두 다-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관이 득세하고 있는 동안에는 오직 ‘초두효과’만이 작용한다. 주어지는 정보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남보다 먼저 정보를 얻어야 결과물을 분배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점 더 사회 구성원들은 고립되고 분리된다. 이 정보(먹이)에 먼저 도착한자가 독식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시험에 통과한 자가 통과하지 못한 자의 몫까지 모조리 먹는다. 심지어 그것도 일회가 아니라 자격증을 통한 지대추구가 영원히 보장된다.
원래 News는 North, East, West, South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동서남북의 소식들을 전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News는 최신의 것이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우리 세계관이 실체보다 속도를 중요시하게 되면서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변하게 된 것이다. 이 뿐 아니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그렇다. ‘속도, 속도, 속도’만이 요구되는 사회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길어진 수명을 느낄 수 있는 여유는 줄어들었다. 초등학생이 고교 교육수준을 요구받는 사회다. 오직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다.
|
|
|
▲ '국정농단 의혹'을 받는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씨가 10월 31일 오후 3시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모자와 안경을 쓰고 도착했다. 시위하는 시민과 기자단을 거쳐 검찰 청사 안에 들어선 최순실 씨. 안경과 모자가 보이지 않는다. 최순실 씨는 신발 한 짝이 벗겨지기도 했다./사진=연합뉴스 |
우리의 정신세계는 속도에 과민반응 하도록 설계 돼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괴벨스가 끊임없이 재생산 된다. 사기당하는 사람이 사기당하는 줄 영원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속으면 속을수록 더욱 더 열렬히 속게 된다. 고시치는 사람들과 똑같은 심리구조를 갖고 있다. 도박하는 사람과도 같다. ‘한번만, 딱 한번만...’하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사회가 이런 방식으로 운용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삶은 길다.
단 한 번의 경쟁으로 평생이 결정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요구가 아닌가. 단 한번의 경쟁이 모든 것을 보장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평생을 걸고 시험에 승부를 거는 것이다. 공무원도, 전문자격증도 모두 그런 것이다. 삶의 불안을 법을 통해, 지대추구를 통해 보장받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그런 욕망이 진정으로 계급사회를 만들어 간다.
우리사회의 시험제도는 단언컨대 ‘단두대’다. 조선을 집어삼킨 과거시험의 망령이 아직까지 이 사회를 끊임없이 잡아먹고 있다. 과거시험이 제아무리 정정당당하게 치러진다하더라도 결코 공정해질 수 없다. 사회 계급, 계층을 단 한번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경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은 끊임없이 경쟁해야 한다. 단 한번의 경쟁만이 허락되는 것은 삶과 죽음이 경쟁할 때뿐이다. 학생들을 뽑는 모든 곳에 선발권을 돌려줘야 한다.
그들이 오만가지의 방법을 통해 그들에게 적합한 학생들을 뽑도록 허락해야한다. 학생을 원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수 만 가지의 시험에 학생들이 다양하게 응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 삶은 단 하나의 시험이 아니다. 삶은 하나의 과거시험이 아니라 수 없이 다양한 경쟁으로 이뤄져 있다. 문제조차 알 수 없는 시험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 교육은 이 자연의 모방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우리의 미친 속도경쟁은 이 초두효과에서 기인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공정시험’을 혁파하고 사적자치에서 자율적인 인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초두효과는 결코 극복될 수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시험은 그 자체로 공정하지 않다. 시험이라는 단두대로 빚어진, 오직 속도만을 추종하는 초두효과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이 선동가의 늪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단언컨대 절-대로 없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을, 학생을 평가할 여러 기준이 필요하다. 돌려 달라, 우리들 정신세계에 자유를 말이다.
그대의 삶이 진정으로 경쟁(전쟁)이기를, 그대의 삶이 언제나 경쟁(전쟁) 한 가운데 서 있기를. 경쟁 속에서 평안을 누리기를, 평화 속에서 두려움을, 드러난 적(敵)이 아니라 숨겨진 적(敵)에 더 두려움을 느끼기를. 오직 경쟁만이, 오직 경쟁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경쟁에서 벗어나 연대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을 부디 자각(自覺)하기를. /손경모 자유인문학회 회장
(이 글은 자유경제원 젊은함성 '손경모의 자유인문'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손경모]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