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한번쯤 누구나 어느 날 갑자기 투명인간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을 법하다. 누군가에게 은닉되는 것, 즉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해방은 현실의 갖가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언제 투명인간이 되고 싶은가.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풀기 위해서? 아니면 돈, 권력, 쾌락을 위한 은밀한 접근을 위해서? 인간이 사회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에도 늘 고고한 행태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신독(愼獨)은 어려운 경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의 구성원과 맺은 여러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타인과의 관계망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은 적절히 통제되고 조절된다. 그렇다고 보면 사회에서 표출되는 인간들의 언행은 어느 정도 가식과 위선적 측면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기만적 행태를 서슴없이 하는 악의적인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정상적인 교유관계에서 그런 예를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완전히 숨겨질 수 있을 때 역설적으로 인간의 잠재된 욕망이 적나라하게 펼쳐질 수 있다. 로마 시대의 작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Lucius Apuleius, 124?~170?)의 『황금당나귀(Asinus Aureus)』는 이성을 갖지 못한 당나귀 앞에서 인간들이 벌이는 위선과 기만, 원초적 욕망이 분출되는 정경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고고한 척하던 인간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당나귀 앞에선 더럽고 추잡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투명인간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

『황금당나귀』는 인류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신화와 서사시가 문학의 대종을 이루던 시대에 소설의 형식을 갖춘 긴 산문이 나왔다. 원 제목 『Metamorphoses』가 말해주듯이 이 소설은 당나귀로 변한 인간이 겪게 되는 파란만장한 이야기이다. 변형담(變形譚)이라 불리는 이유다. ​

오비디우스의 『변신(Metamorphose)』은 신의 개입으로 신이나 인간이 동물로 변신하는 신화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인간에서 변신한 동물은 동물의 형태와 기질을 그대로 갖는다. 그저 인간성을 상실한 동물일 뿐이다. 따라서 변신한 동물은 더 이상 인간과 교감할 수 없고 더군다나 인간 사회를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는 이런 제약을 뛰어넘는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동물로 변신한 인간이 인간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가정한 것이다. 인간에서 변신한 당나귀는 동물인 당나귀가 맞지만 인간의 영혼을 지닌 인간적 당나귀가 된다. 이로 인해 주인공 루키우스는 동물적 소임을 다하면서 인간적 고통과 번민을 동시에 겪게 된다.​

저자가 이런 인간적 동물을 창조한 것은 인간이 아닌 동물 앞에서 인간들이 벌이는 추한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기 위해서인 듯싶다. 인간의 지성과 영혼을 가진 당나귀는 실은 위선과 기만으로 가려진 인간 사회에 보낸 투명인간인 저자 자신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당나귀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들의 관음증을 충족시키고 있다. 루키우스가 당나귀로 변신하게 된 연유는 지나친 호기심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진기한 행위나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마련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그리스의 테살리아다. 주인공 루키우스는 마술을 부리는 팜필레라는 여인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녀의 하녀 포티스를 유혹하여 사랑에 빠지고, 종국에는 팜필레가 변신의 마법을 부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루키우스는 자신도 마법을 통해 변신하고 싶었다. 그런데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는 새가 되고자 했지만, 포티스의 실수로 다른 향유를 바르는 바람에 원치 않던 당나귀로 변신하게 된다.​

루키우스는 완벽한 당나귀의 육신을 갖게 되었지만, 인간의 정신 능력을 온전히 갖고 있었다.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가 차라리 완전한 동물이 되었다면 자신의 변신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영혼을 그대로 지니게 된다. 그의 인생유전, 아니 동물유전이 그렇게 시작된다.​

그는 여러 주인들을 거치며 당나귀로서의 식생활과 고된 노동, 수시로 채찍과 학대를 받아야 했다. 그는 도둑떼에 이끌려 다니는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환생하고자 장미꽃을 따 먹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인간들의 채찍과 감시, 우발적인 상황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다. 또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잔인한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는 루키우스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그는 늘 거세당할 위험에 전전긍긍해야 했고, 끊임없이 죽음의 두려움과 위협에 떨어야 했다.​

주인공이 갖은 고초를 겪는 동안 아무런 경계심 없이 동물 앞에 드러내는 인간들의 민낯은 때로는 흥미진진하지만 대부분 음탕하고 추악하며 탐욕에 찌든 모습이다. 이 소설에는 액자 속의 액자처럼 다양한 사건들을 삽입해서 보여준다. 도둑들이 선량한 사람들의 재산을 거리낌 없이 약탈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 또 남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속임수를 써서 그 남편을 살해하고 청혼하는 가증스런 인간이 징벌을 받는 이야기도 있다.

또 주인공은 인간의 영혼을 가진 당나귀로서 인간처럼 먹고 마시는 행위를 인간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요상한 재주를 가진 당나귀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킨다. 인간처럼 행동하는 이상한 당나귀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주기도 하고, 음탕한 여인과 사랑을 나누는 엽기적인 행위도 체험한다. 급기야 원형극장에서 사형이 언도된 파렴치한 여인과 공개적인 성행위를 해야 될 상황에 처한 루키우스는 ‘인간적 치욕감’을 느끼고 탈출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차츰 쾌락에 젖어든 당시 로마 독자들의 관음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을 듯싶다. ​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는 쿠피도와 프시케의 사랑이야기이다. 저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로스와 프시케의 비극적 사랑을 각색하여 들려주고 있다. 사랑 그 자체의 시작은 언제나 아름답다. 하지만 에로스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프시케의 호기심이 비극을 만들어낸다. 쿠비도는 아프로디테의 허락을 받지 않은 비밀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프시케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다.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는 자주 심술을 부린다. 프시케에게 달콤한 행복을 안겨 주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낭군의 모습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던져 준 것이다. ​

프시케의 행복을 질투하는 두 언니들의 사악한 충동을 이기지 못한 프시케는 사랑의 침대에 아름답게 잠든 쿠비도의 모습을 불빛을 비추어 확인하고 만다. 이후에 쿠비도와 프시케는 아프로디테의 질시와 증오에 찬 갖가지 시험으로 고통을 당하게 된다. 물론 두 사람의 결혼으로 해피 앤딩으로 끝나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신과 인간들의 이기와 질투, 삐뚤어진 욕망은 신과 인간 모두 늘 이성과 절제로부터 취약하다는 엄연한 현실을 보여준다. ​

루키우스 역시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선량한 여인의 도움과 이시스 여신의 가호를 받아 결국 인간으로 돌아온다. 그는 신의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사제가 되어 신을 섬기게 된다. 당나귀 루키우스가 겪었던 일들의 단초는 그의 지나친 호기심이었다. 마법에 대한 호기심이 루키우스를 당나귀로 만들었던 것이다. ​

호기심은 루키우스의 경우처럼 순진한 동기에 의해 생기기도 하지만, 프시케의 예처럼 사악한 충동에 의해 자기 확신이 흔들릴 때에도 불쑥 튀어나오게 된다. 어느 경우이든 호기심을 충족하면 얻게 될 행복과 만족만큼이나 예측하기 어려운 불행과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이 소설은 잘 보여준다. ​

사악한 욕망과 지나친 호기심을 경계하는 저자는, 한편으론 인간이 당나귀로 변신하여 겪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독자들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한다. 이런 면에서 그는 작품의 소재와 테마의 전개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호흡이 긴 장편 소설을 엮어내면서 이야기 속에 또 다른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삽입한 것도 그 한 예다. 이런 천일야화 방식의 전개를 처음 접했을 로마인들이 계속 이어지는 갖가지 이야기들에 쉽게 빨려들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 소설 속에 묘사되는 현실은 당대의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의 무대는 그리스 북부의 테살리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부에 위치한 코린토스다. 결국 로마가 위치한 이탈리아 본토가 아닌 당시에 로마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 땅이다. 숱한 신화와 전설이 어린 그곳을 무대로 택한 이유는 이 소설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이야기와 변신과 같은 신비로운 이야기를 펼치기에 어울리는 곳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보면 이 책에서 묘사되는 인간들의 음욕과 탐욕이 넘치는 타락한 도시의 모습은 꼭 당시의 그리스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기보다 오히려 고급의 오락과 쾌락이 넘치던 로마나 주변의 유명 도시들의 타락상을 풍자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화산 폭발로 땅속에 묻혀버렸던 폼페이를 통해 당시의 화려했던 도시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루키우스가 로마인들의 성적 욕망과 도덕적 타락을 직접 대놓고 꼬집기보다 그리스를 배경으로 신비로운 이야기와 섞어 우회적으로 풍자하고자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