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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대표 |
진보라는 이름의 퇴보 그리고 정체불명의 한국 보수
한국 현대사에서 진보라는 이념과 집단은 이제껏 세 차례에 걸쳐 등장했다. 처음 쓰인 것은 해방직후다. 공산당은 자신들의 정체와 정책을 말하면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물론 그들이 말한 진보는 인민민주주의를 말한다. 6.25 전쟁이 터지면서 공산당은 지하로 숨고 덩달아 진보라는 말도 사라진다.
진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한 것은 오십 년 대 중반 진보당이 창당되면서부터다. 이들이 주장한 진보 역시 ‘민주주의적 사회주의’ 실현 이상의 다른 말이 아니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과 간부들이 간첩 사건으로 체포되면서 진보라는 단어는 한국사회에서 다시 모습을 감춘다.
진보가 세 번째로 등장한 것은 80년대 중반부터다. 혁명 운동권이 스스로를 ‘진보 세력’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양심적 지식인’같이 애매한 표현을 썼다. 이 표현의 원본은 북한이다.
한국 현대사에 세 번이나 등장한 진보라는 단어는 얼핏 들으면 ‘세상을 보다 좋은 상태로 변화시키려는 세력이나 노력’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 단어는 뿌리도 없고 내용도 없는 공허한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진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다. 마르크스는 저급한 생산양식에서 고급한 생산양식으로 옮겨가는 것을 진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노예제 생산 양식이 진보한 것이 봉건제 생산 양식, 봉건제가 진보한 것이 자본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본제가 진보한 것이 사회주의라는 논리다. 즉 사회주의에 가깝게 갈수록 그게 진보다. 다시 말해 진보라는 건 사회주의에 근접해 간다는 과정 외에는 그 뜻이 전혀 없는 빈 낱말인 것이다.
자신이 진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알고나 떠들어 대는지 궁금하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liberal과 progressive를 똑같이 ‘진보적’이라고 해석한다. 이건 심각한 문제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자유주의자liberals는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정부의 역할 확대, 도덕적 엄격성의 완화, 사회적 약자 계층에 대한 배려 확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말하기 때문이다(그러니까 민주당).
미국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진보progressives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건 자기들의 주장일 뿐 미국 사회에서는 이들을 과격세력radicals이라고 부른다. 시장 경제 바깥에 있는 세력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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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의 진보는 퇴보를 넘어 대부분 반동으로 치닫고 있다. 해양 문명으로 바꿔 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중국의 자장권으로의 편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학과 기술이 환경을 보호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해 무작정 환경보호만을 외친다./자료사진=연합뉴스 |
한편 보수 혹은 보수주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이념이다.
현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는 영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에드먼드 버크다. 버크가 쓴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은 그 직전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을 분석한 것인데 그는 여기서 급진적인 정치 변혁을 추구하는 프랑스 혁명은 결국 프랑스 국민을 공포 정치와 독재의 탄압으로 밀어 넣게 될 것이라 예언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보수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급격한 사회 변화는 반드시 공동체 구성원들의 불행을 초래하며 따라서 공동체의 운영은 기존의 전통과 경험을 존중하고 필요한 변화는 점진적으로 추진하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수주의가 보수하려는 것은 기존의 상황이 아니라 기존에 상황 속에 녹아있는 지혜다. 보수주의는 체계적인 사상적 이론을 가진 현대의 3대 이데올로기다. 나머지 두 개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렇다면 우리사회에는 진정한 보수의 개념이 있을까. 불행히도 없다. 문학도, 정치도, 사회현상 분석틀도 우리는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적이 없다. 모두가 수입품이고 외부로부터 이식된 것이다. 근대도 아니면서 우리는 근대라고 불렀고 봉건제도 아니면서 봉건제라 불렀다.
보수주의도 마찬가지이다. 보수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이것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선물 받았고 그것을 쟁취하느라 고생한 기억이 없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틈만 나면 흔들린다. 기억이 아닌 학습으로 이룩한 보수라고 그렇다.
사회주의가 성공했더라면 진보는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가야할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적지가 사라진 지금 진보는 방향을 잃었다. 방향을 잃으니 노선은 중구난방이다.
가령 서울시를 어떻게든 농업 공동체적 사회로 바꾸려는 시도가 그렇다. 인구 천 만의 대도시를 마을 공동체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해보겠다며 성미산 마을 같은 괴물을 만들었다. 사회적 기업이라며 전근대적 노동방식을 장려하고 산업구조를 19세기로 되돌리고 있다. 잘하는 사람에게 권한을 몰아주자는 근대적(주식회사적인) 사회운용을 거부하고 사방으로 쪼개진 작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가내 수공업 차원의 산업을 장려하는 중이다. 누가 봐도 이것은 진보가 아니라 명백히 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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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라는 단어는 뿌리도 없고 내용도 없는 공허한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칼 마르크스에 따르면) 진보라는 건 사회주의에 근접해 간다는 과정 외에는 그 뜻이 전혀 없는 빈 낱말이다./자료사진=연합뉴스 |
명분은 이렇다. ‘평등과 나눔 그리고 인간적 협동의 철학이 숨 쉬는 사회 건설’. 이것은 도시의 풍경과 거리가 멀다. 도시가 어떻게 문명을 발전시켜 왔는지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는 역사맹(역사 까막눈)이 빚어낸 비극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진보는 퇴보를 넘어 대부분 반동으로 치닫고 있다. 해양 문명으로 바꿔 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중국의 자장권으로의 편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학과 기술이 환경을 보호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해 무작정 환경보호만을 외친다. 이런 녹색 반동주의자들이 도처에서 활개를 치는 것이 대한민국 환경운동의 현주소다.
문제는 이런 주장들이 대중들의 심정적인 동의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엉망인 것은 보수 역시 마찬가지다.
보수의 가치를 몸으로 체험하지 못해 원칙을 지켜야 하는 싸움에서 툭하면 포퓰리즘에 휘둘린다. 중도니 통합이니 하는 말들이 바로 그런 부실한 사고의 산물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이런 탈선을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보수는 지켜야 할 가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진보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중이다.
우익과 좌익은 각각 다르게 세상을 이해하지만 인간의 번영 추구라는 큰 목적에서 동일하며 그 수단으로 정치를 활용하는 점에서도 상호 동의한다. 그렇다면 그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가 중요해진다.
결국 자유다. 여기에서 둘은 갈라진다. 우익은 개인에서 출발하고 좌익은 공동체 혹은 국가에서 출발한다. 좌익은 개인의 욕망을 탐욕으로 몰고 가고 시장경제를 그 배후로 본다. 그래서 시장경제를 끝내야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주장한다. 그 실험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전, 선동의 수단으로는 유효하다. 그리고 이념 후진국인 대한민국은 이에 대한 방어체제가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다. 자유주의자들이 분발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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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사회에는 진정한 보수의 개념이 있을까. 불행히도 없다. 문학도, 정치도, 사회현상 분석틀도 우리는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적이 없다. 모두가 수입품이고 외부로부터 이식된 것이다. 보수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선물로 받았다. |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과 자유주의 운동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자유주의자는 선동가가 되어야 한다는 선인의 말은 그래서 의미가 크다. 그는 자유주의 선동에 이어 이런 말을 덧 붙였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가 실패하면 그 피해는 가난한 나라와 그 국민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빈곤에서 탈출하고 자유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는 진정한 의미의 진보인 셈이다. 2013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자유시장주의자인 시카고 대학 유진 파마 교수는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몇 개 옮긴다.
“정부, 중앙은행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마라. 국민은 정부에 많은 것을 바라고 있지만 정부는 바람대로 일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현재 상황에서 정부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부가 잘 돌아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부가 무언가를 더 해주길 바란다. 말이 안 된다.”
“현재 세계경제에서 가장 큰 위험 요소는 지나친 규제다. 지금은 금융업을 시작하거나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물론 규제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규제가 너무 심해 사업을 시작하거나 유지하지 못하게 한다. 지금보다는 적은 수준으로 규제를 풀어야 한다.”
“시장이 부의 재분배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특정 그룹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생산적으로 경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그들은 점점 더 부유해질 것이다. 정부가 이들의 부를 재분배하려 하면 그들은 더 열심히 일하고 혁신하려고 하는 원동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기껏 번 돈을 다시 정부에 돌려줘야 한다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소득 불평등은 줄어들겠지만, 결국 모든 사람이 더 가난해질 것이다. 그건 별로 좋은 결과가 아니다. 유럽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노력을 1970년대부터 해왔다. 그 결과 유럽은 이전과 비교해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40년째 저(低)성장을 겪고 있다. 유럽에선 경제성장률이 2%만 되어도 높다고 여긴다.”
“미국에서는 부자들이 자신의 판단에 의해 거액을 기부해 부의 재분배를 실천한다. 기부 문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부자들이 자신의 돈 사용처를 고를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세금을 통해 정부에 주거나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기부하거나 아니면 빈민층을 돌보는 민간 재단에 맡기거나 그 결정을 부자들 스스로에게 맡겨야 한다. 부자가 번 돈을 어디에 쓸지 결정하는 것을 정치인이 하면 안 된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최고경영자(CEO)는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에 거액을 기부한 후 ‘정부보다 게이츠재단이 그 돈을 더 잘 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게 기부 문화의 핵심이다. 정부는 돈을 효율적으로 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돈을 적절한 곳에 쓰라고 장려하는 게 훨씬 낫다. 정부가 부자들에게 부를 재분배하라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획일적인 것은 곤란하지만 자유주의자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대한민국 자유주의도 갈 길이 멀다.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대표
(이 글은 자유경제원이 5일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연속세미나 ‘생각의 틀 깨기 16차: 진정한 진보는 자유주의다’에서 남정욱 대문예인 공동대표가 발표한 토론문 전문입니다.)
[남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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