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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
보수-진보의 본질, 문제점, 극복 1)
1. 문제 제기
한국에서 보수-진보의 이념대립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사회갈등의 중요한 축이 되어왔다. 세계화(globalization)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그리고 IT혁명의 시대에도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 갈등과 대결 프레임(frame)은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보수에게 진보란 ‘대안(代案) 없는 무능한 집단’이며, 진보에게 보수는 ‘완고(頑固)하고 부패한 집단’이라는 고정화된 이미지 만들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보수-진보’ 모두 19세기내지는 20세기적 문제의식과 해결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의 지진아(遲進兒)’일 뿐이다.2) 이유는 보수는 21세기에 무엇을 보수하고 보전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3) 진보는 사회 진보의 방향이 어디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개념 혼란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한국의 ‘보수’는 ‘우파’의 다른 이름이고, ‘진보’는 ‘좌파’의 별칭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명칭 혼란에 관하여 양동안 교수는 한국에서 ‘보수-진보’라는 명칭은 ‘우파-좌파’의 이념적 명칭을 대신하여 잘못 붙여져 사용되었기 때문임을 지적한 바 있다. 좌파는 해방 이후 자신들의 좌파 이데올로기를 탈색하여 대중(大衆, mass)의 지지를 이끌어내겠다는 정치적 목적에 더하여, 6·25 전쟁 이후에는 ‘반공(反共)’을 국시(國是)로 삼은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identity)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좌파-우파라는 ‘이데올로기’ 명칭 대신 진보-보수라는 ‘사고(思考) 성향(性向)’ 명칭을 대신 사용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좌파’라고 해야 할 부분에 ‘진보’라고 썼고, 이러한 용법 사용이 사회적으로 정착되었다는 지적이다. 이는 좌파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좌파’ 대신 사용해온 ‘진보’라는 용어가 한국사회에 잘못 관행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이러한 혼란의 근원에는 한국사회 언론과 정치권이 ‘극우(極右)’를 ‘보수(保守)’로, ‘극좌(極左)’를 ‘진보(進步)’내지는 ‘혁신(革新)’으로 표기한 일본식 용어를 무분별하게 도입하여 고착시킨 때문도 있다.
구체적으로는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북한과의 대결하며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과 동서 냉전의 상황에 좌파 이데올로기를 탈색하여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겠다는 정치적 목적이 작용했고, ‘반공’을 국시로 삼은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 아래에서 이념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한 정치적 상황에서 ‘좌파’ 대신 ‘진보’라는 명칭으로 변환하여 사용하게 된 때문이다.4)
‘좌파’는 해방 직후 의도적으로5) ‘진보(進步)’와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용어와 개념을 선점하여 사용하며 자신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다. 초기에는 대중에게 긍정적이고 쉽게 받아들여지는 서양식 용어를 차용한 듯하고, 이후 국제적으로 냉전이 심화되자 ‘빨갱이’ 색깔공세를 피하려 했던 의도가 있었다고 보여 진다. 물론 ‘보수’라는 명칭도 보수세력이 스스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좌파가 우파의 이념을 폄하하고, 도덕적 우위를 점유하기 위하여 부정적인 의미로 명명하고 사용하였다.6)
따라서 ‘보수-진보’라는 사고(思考) 성향 명칭보다는 ‘우파-좌파’라는 이데올로기적 명칭이 원래 맞는 용어이겠다. 하지만 해방 이후 ‘보수-진보’라는 용어가 ‘우파-좌파’라는 용어를 대신하여 사용되어 사회적으로 관례(慣例)화 되었기에 정명(正名)운동에 의한 교정 노력에도 불구하고 되돌리기는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을 회피하고자 일부 언론에서는 ‘보수·우파-진보·좌파’라는 병기 용법이 임시방편적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보수-진보’ 구분은 ‘우파-좌파’를 대신해서 사용하는 바른 이름 사용법, 즉 정명(正名)에 근거한 용어 사용이 아니기에 개념의 불명확성과 자기 모순적 오류를 발생시키는 근원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개념의 불명확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보수는 무엇을 보존(保存)하고 수호(守護)해야 하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답해야 한다. 한마디로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와 시장경제(market economy)라는 제도와 가치이다. 그러면 ‘반공’은 무엇인가? ‘반공’은 보수가 북한 공산주의자로부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고 목적은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동안 ‘반공’이 국가의 목적으로 잘못 설정되었기 때문에 21세기 탈냉전의 시대에 보수의 목적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공고화 과정을 밟고, 선거민주주의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 세계 상위 20위권의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어도 자유주의는 크게 확산되지 못하였다. 민주주의의 만개에도 불구하고 ‘경제민주화’에 대한 정치인들의 압도적 지지 또는 ‘사회적 기업’ 주장들에서 보듯이 도리어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자유주의는 퇴조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렇다면 보수주의자가 보수해야할 제1의 가치는 자유와 자유주의(liberalism)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자유주의란 고전적 의미의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로서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국가의 권한보다 중요하고 커야하며, 재산권과 시장에서의 교환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사실 ‘민주’는 ‘자유’를 약속하지 않았다. 이는 한국의 민주화가 자유화를 담보하지 않았음에서 명확하다. 본래 자유가 근원이고 의사결정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자유 실현의 도구이자 방편이었다. 그것도 매우 불완전한 형태로 자유를 보장했고 심지어는 '다수에 의한 독재'(the dictatorship of the majority)나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형태로 자유의 극심한 제한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처칠(Sir Winston Churchill)이 민주주의를 “지금까지 시도된 모든 정부 형태를 제외하면 최악의 정부”(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from time to time.)라고 한 평가는 탁월하다.
개념의 불명확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진보’(progress) 역시 인류 사회가 어디로 진보해 가야하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21세기에 사회 진보란 무엇을 의미 하는지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은 진보였다. 하지만 환경보호(environmental protection)가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면 환경은 인간에게 종교(religion)를 대체하는 또 다른 인간 속박(human bondage)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인권은 진보였다. 하지만 인간의 인권(human right)이 진보의 가치로 설정된다면 그 가장 중요한 인권의 내용은 배고픔으로부터의 자유, 재산축적의 자유, 신체의 자유,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될 것이고 이 모든 자유는 이미 자유주의에 의해 주창되어 왔다. 따라서 진보의 목표는 경제민주화도, 사회적 기업도, 사회주의도 아닌 인간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가 되어야 할 것이다.
평등은 진보였다. 하지만 가장 높은 수준의 평등을 추구하던 공산주의 국가는 가장 불평등한 국가였으며, 쿠바나 미얀마와 같은 사회주의적 평등 국가는 저성장으로 국민을 빈곤의 나락에 빠뜨렸다. 한국사회의 진보세력과 진보언론이 진보적이지 못하고 ‘종북’ 또는 ‘국가사회주의’와 혼동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 글은 한국사회 보수-진보 개념의 무정형성과 모순을 설명한 뒤 ‘보수-진보’가 추구해야할 가치로서 ‘자유’와 이념으로서 ‘자유주의’를 결론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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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보수할 것인가라는 보수의 가치와 내용에 대하여 복거일은 “우리 사회처럼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구성 원리로 삼은 사회에서 보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자본주의 체제를 잇고 감싸는 태도”를 가져야 함을 명확히 한 바 있다./사진=청와대 홈페이지 |
2. 보수-진보 개념의 무정형성(無定型性)과 모순들
2-1.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리서치앤리서치가 2012년 12월 2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보수는 33.2%, 진보는 28.7%, 중도는 31.8%, 모름/무응답은 6.3%로 조사되었다.7) 비슷한 시기에 현대 리서치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보수는 37.5%, 진보는 21.2%, 중도는 36.0%, 잘 모름은 5.3%로 조사되었다. 1년 전 보다 보수는 8.7% 늘고, 진보는 6.8% 줄어들었다고 한다. 한국사회에서 진보가 줄어드는 중요한 이유는 사회의 고령화 현상으로 20~40대의 ‘진보 이탈’ 현상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서민층 응답자 가운데 진보가 22.2%로 보수라 34% 응답에 비해 12%나 적은 비율이다. 빈민층 응답자의 경우 보수가 45.8%, 진보가 20.3%로 서민층-빈민층의 경제적 상황과 이념적 성향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8) 강남좌파, 강남진보가 출현하고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투표 현상을 보이는 것 역시 한국사회에서 경제적 상황과 이념적 성향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여론조사의 문제점은 표본 집단이 작기 때문인지 동일한 시기의 여론조사임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균일하지 않고 들쑥날쑥하다는 것, 그리고 과거와 비교하는 시계열 분석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동아시아연구원은 의미 있는 보수-진보 시계열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2003년 6월과 2013년 4월의 여론 조사 결과 비교분석에 따르면 진보성향 응답자 중 “한미 동맹 강화하자”는 여론이 10년 사이 29%에서 62%로, 보수성향 응답자 중 “대북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응답이 10년 전 33.9%에서 47.6%로 늘었다. 즉, 한국사회에서 지난 10년간 반미, 반북 논란을 거치면서 시민들의 정치정향 또는 의견이 일정한 균형점으로 수렴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의미이다. 비슷하게 “탈미 자주 외교를 해야 한다”고 답한 비율은 진보성향 응답자 중에서는 31.7%에서 24.0%로, 중도 성향에서는 15.4%에서 12.8%로, 보수성향 응답자 중에서는 11.9%에서 11.0%로 각각 줄었다. 2003년의 정치적 상황 즉 여중생 미군 장갑차 사고와 이어진 대선에서 친미-자주 대결의 구도로 형성되었던 정치상황이 변화하고 지난 10년 동안 미국에 대한 국민의 의식이 새로이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시대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보수-진보층은 변화하며, 최근에는 남북관계나 한미관계와 관련한 한국사회의 논쟁이 잠잠해지면서 중간층, 즉 친북진보(좌파), 반북진보(좌파), 반북보수(우파), 친북보수(우파)로 나뉘어 이념집단이 다양화 되어 형성되고 있다고 하겠다. 물론 선택 항목을 세분화한 여론조사 기법의 세련화 덕분에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주목할 사안은 최근까지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대북정책과 한-미동맹 이슈였는데9) 이제는 그것도 흐려져 보수-진보 개념 모순층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서구적 개념으로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복지가 핵심적인 이슈였는데 최근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와 복지확대라는 진보적 구호에 합의하면서 안보는 보수-경제는 진보를 자칭하는 정치 집단이 생겨나 보수-진보 구분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10)
2-2. 보수와 진보의 모순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보수와 진보를 정치적 이념이나 가치와는 관계없는 사회의 변화에 대한 대응, 수용의 태도, 사고(思考) 방식(way of thinking)으로 정의한다면 보수와 진보의 의미는 보다 분명해질 수 있다.
해방 이후 ‘보수-진보’의 독선적 태도는 한국사회에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대표적인 예로 ‘보수’ 또는 ‘우파’는 6·25 한국전쟁의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반공(反共)’을 표방하였으나 ‘반공’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평등 등 많은 인류 보편적 가치를 폄훼했던 과오가 있다. 문제는 탈냉전의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인 지금도 ‘보수’=‘반공’으로 한정하는 보수성을 지속적으로 지켜왔다는 점이다.
사실 보수의 가장 큰 가치는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자유’에 있음에도 자유라는 가치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전체주의 공산체제의 자유 억압 때문에 ‘반공’을 하는 것이지 ‘반공’ 그 자체가 추구해야할 가치도 목적도 아님을 간과했던 때문이다. 결국 ‘반공’의 목적인 ‘자유’를 강조하며 진보를 설득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반공’만 외치다보니 ‘자유를 위한 보수’가 아니라 앞뒤가 막힌 ‘생활 속의 보수꼴통’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11)
기본적으로 언어 사용에서부터 ‘진보’는 “앞으로 나아감”을 의미하고 ‘보수’는 “정체됨”을 의미하기 때문에 출발부터 보수는 수세적 위치에 처해있었다. 그리고 ‘진보’는 용어에 내재하고 있는 긍정적 가치와 ‘발전’내지는 ‘나아짐’을 원하는 인간 본성의 요구에 맞추는 특성 때문에 보수보다는 우위에 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언론과 학계가 ‘진보’의 대립 개념으로 ‘퇴보(退步)’가 아니라 ‘보수’(conservatives) 또는 ‘보수주의’(conservatism)라는 명칭을 오용했다는데 있다. 이러한 잘못된 명칭 사용이 보수-진보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수세적인 ‘보수’에 대해 도덕적·윤리적 프리미엄을 가지고 출발한 진보는 ‘말 진보’, ‘입 진보’라는 일반 대중의 비아냥과 비판에서 보듯이 ‘대안 없는 비판’과, ‘대한민국에 대한 정체성 부정’, 그리고 역사적 퇴행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 왕조체제 옹호를 숨기지 않았다. “행동은 없고 말 뿐”이고, “대안은 없고 비판뿐”이고, 일부 진보 집단의 경우 ‘친북’(親北)을 넘어 ‘종북’(從北)으로, 진보가 진보성을 잃어버리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보수보다 더 정체하고 김일성 봉건왕조를 옹호하는 퇴보의 병리 현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란 개념적으로 도대체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가? 역사에서의 진보란 시대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서 그 내용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무엇이 진보인가, 도대체 무엇이 나아진다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개인마다 달라 일치된 합의가 어렵다는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보 환경론자들은 기후변화에 대응하여 신재생에너지 확충에 전념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진보는 원자력 발전이 위험하지만 신중하게 잘 관리하여 가난한 계층에게 값싸고 질 좋은 전기를 제공하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 자칭 진보가 주장하는 ‘골목상권 보호’와 ‘전통시장 보호’ 때문에 서민이 불편하고 경제적 손실을 보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대형마트가 강제 휴일과 영업시간 단축을 지키느라 납품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서민이 피해를 보고 있음은 외면하는 모순을 보인다. 또 진보는 대기업 노조를 보호하느라 중소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직은 차별과 저임금을 감수해야 하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렇게 진보는 설명이 불가능 하니 대책 또한 모순되고 퇴행적이다. ‘보다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어떤 상태로 가는 것이냐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는 ‘진보’의 모순성 때문이다.12)
‘보수’와 ‘진보’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느냐는 모호함을 뒤로 하고, 보수-진보가 추구하는 내용으로만 본다면 한국사회 진보는 개혁, 민주, 노동, 인권, 환경을, 보수는 국가(정부)의 권위와 시장의 자유를 들 수 있겠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수와 진보는 이념적 내용이나 가치에 대한 분명한 정의(definition) 없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무분별하게 추구하는 가치와 내용을 바꿔왔음을 알 수 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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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는 과거 반미를 핵심으로 둔 제3세계 운동을 주도한 중국의 논리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국가 안보 문제까지 미국에 대적하는 중국의 논리를 그대로 차용하고 대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대한민국 진보의 부인할 없는 슬픈 현실이다./사진=연합뉴스 |
3. 진보의 문제점
3-1. 진보는 아직도 제3세계 신드롬에 집착
진보세력은 제3세계 신드롬에 빠져 전혀 진보적이지 않았다. 도리어 퇴행적이었다. 아직도 한국을 미(美) 제국주의(帝國主義) 하에서 신음하는 ‘종속 국가’로 보고 싶어 하는 ‘제3세계(the Third World) 신드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와 체결하든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이야기만 나오면 국가적 이해득실 관계는 제쳐두고 한국을 제3세계의 한 국가로 규정하고 ‘경제 종속’을 들먹인다. 종속 극복을 위한 항미(抗美)와 반미(反美)가 진보가 싸우는 주요 전선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한마디로, "아직도 종속인가?"를 물어야 한다. 아직도 한국을 제3세계로 보고 싶어 하는 진보의 ‘제3세계적 세계관’ 고착만이 문제가 아니다. 통진당 해산이라는 이석기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좌파가 전체주의적 극좌에 대해 ‘아직도’ ‘여전히’ 온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진보진영의 ‘진보주의’ 정체성 혼란과 몰(沒)역사성을 보여줄 뿐이다.
최근 진보세력은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에서 극명히 드러내 보인 것처럼 진보는 과거 반미를 핵심으로 둔 제3세계 운동을 주도한 중국의 논리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국가 안보 문제까지 미국에 대적하는 중국의 논리를 그대로 차용하고 대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대한민국 진보의 부인할 없는 슬픈 현실이다.
3-2. 진보, 대안 없는 비판과 비합리적 주장
‘진보’는 흔히 한국사회 보수에 대해 보수집단 모두를 친일파 집단이자 권위주의 집단이라고 비하(卑下)하고 그에 대해 ‘민주화’가 유일한 해답으로 답하고 있다. 진보는 민주주의를 확장하여 사회 정의(justice)의 문제나 복지 문제를 '사회민주화'와 '경제민주화'로 환치하여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진보가 아직도 ‘민주’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증거이다. 사회민주화는 사회정의의 실현 문제이고, 경제민주화는 경제적 평등의 확보 문제일 뿐이다. 이렇게 진보가 굳이 ‘민주화’, ‘민주주의’를 이용하여 사회의 정의를 논해야 하는 상황은 진보가 과거부터 정의롭지 못했음 때문이다.
진보가 정의롭지 못했던 또 다른 예는 북한의 권력승계, 북한 인권, 북한 핵에 관한 이슈에서이다. 진보는 북한에 대하여는 ‘민주화’와 ‘인권’은커녕 어떠한 변화도 요구하고 있지 않다. 북한의 인권 문제나 민주화 문제에서 진보와 진보 시민단체는 지극히 보수적으로 대응하며, 세계사적 변화에도 응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3대 봉건 세습’을 미국으로부터 북한 체제를 보전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로 용인하고 이해하는 ‘너그러운’ 태도 때문에 진보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나 지지가 나아지지 않는 이유가 되고 있다.
이렇게 진보가 진보적이지 않게 비합리적 행동을 보인 사례의 정점은 진보적인 시민단체들의 이중적 태도였다. 진보적 시민단체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 정부와 결탁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도덕성과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폐기해버렸다. ‘정치 개혁’이라는 논리로 이루어진 시민단체의 선거 참여는 2000년 ‘낙천·낙선운동’으로 정치권의 일부가 되어 버렸고, ‘정치 지체’(political lag)14)와 ‘협치(協治)’라는 논리로 정당화된 시민단체의 정권 참여로 진보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떨어드리는 계기로 적용하게 되었다. 진보가 주도하는 시민사회는 더 이상 사회적 신뢰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또 진보적 환경단체는 천성산 도룡뇽 논쟁와 같이 환경보존을 무리하게 강조하다가 비과학적이 되어버리거나, 지역 이기주의와 결탁하여 이익집단(interest groups)이자 주창단체(advocacy groups)로 되어버렸다.15) 결론적으로 1987년 이래 진보-좌파는 스스로 자부했던 보수에 대한 도덕적·이념적 우위를 스스로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안 제시에도 변혁에도 실패했다.
이제 진보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진지한 자기 성찰(self-introspection)과 자기 반성(self-reflection)이다.16) 대기업은 무조건 나쁘고 노조는 무조건 옳다는 편향성을 극복하지 않고는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우와 청년실업 문제는 해결될 수 없음을 전투적 한국의 노조와 노조 출신 정치인들을 빼고는 모두 동의하는데 이러한 노(勞)-정(政) 패권(覇權)는 스스로의 반성 없이는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성찰과 자기 반성에 근거할 때 진보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발전전략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정치 전략을 동시에 갖추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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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에게 진보란 ‘대안(代案) 없는 무능한 집단’이며, 진보에게 보수는 ‘완고(頑固)하고 부패한 집단’이라는 고정화된 이미지 만들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4. 보수의 문제점
4-1. ‘반공’에 집착하느라 자유주의를 간과한 보수
역사적으로 본다면 한국사회에서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에는 진보는 거의 사회주의내지는 좌파적 이념주의자를 의미했다. 반면에 당시 보수는 반공을 이념으로 한 체제 수호세력이었다. 하지만 1960~80년대에 와서는 한국의 보수-진보의 구분은 반공이냐 좌파적 이념보다는 근대화 세력이냐 민주화 세력이냐로 구분이 가능했다. 권위주의를 인정하고 완고하고 부패한 보수와 민주주의와 민주화를 지지하는 젊은 비판 세력으로서의 진보 개념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변화의 모멘텀은 1987년 민주화의 성공과 1989년 동구 공산권과 소련 공산주의의 몰락, 그리고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의 쇠락이었다. 민주화의 성공으로 인하여 더 이상 ‘민주’를 둘러싼 한국사회 민주-반민주의 대결이 무의미해지고, 냉전의 종식과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인하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 대결이 무의미 해졌음에도 보수는 반공을 극복하지 못했고, 진보는 사회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북한은 공산주의도 아니고 김일성주의에 의한 국가의 사유화가 일어난 나라인데 보수는 반공으로 무장했고, 진보는 전체주의 반(反)사회주의적 북한 사회에 온정적이었다. 한국의 보수-진보는 자기반성이나 쇄신 없이 지금 21세기까지 ‘그대로’ 유지하여 왔다는 점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보수는 ‘반공’을, 진보는 ‘민주’와 ‘사회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직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모든 사안을 진단하는 도구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보수는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가 결국 북한 때문이며, 친북·공산주의자의 문제로 귀착시키고 있다. 즉, 한국사회의 보수는 무엇을 보수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고, ‘반공’이라는 부정 의식과 반대 행위에 몰두하고 있다. 보수가 보수해야할 가치가 ‘반공’과 보안법이라면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너무 초라하고 빈약한 보수다. 때문에 최근 뉴라이트 세력이 ‘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이념화하려 했지만 한국사회에는 자유주의의 기반이 빈약하고 과거 자유민주주의가 ‘반공’과 동일시된 전력 때문에 이슈화에 실패하였다.17)
4-2. 보수는 무엇을 보수(保守)하는가
한국사회에서는 6·25 전쟁의 영향으로 체제 수호를 위하여 ‘반공’이 국시(國是)로 인정될 정도로 ‘반공’이 이념화 되었다. 이러한 반공의 강조에 보수집단이 앞장을 섰었고, 이 때문에 보수와 반공이 일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면 보수가 반동(反動)인가? 이 문제는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에 국한된 현상일 것이다. 문제는 남북한 군사적 대결 속에서 이러한 의식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의 종식으로 탈냉전의 시대가 20년 넘게 지속되었음에도 보수는 여전히 ‘반공’을 지속하고 있다. ‘반공(反共)’이 ‘반동(反動)’이 되어버린 시절이 되었음에도 ‘반공’을 아직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강조하고 있다. 보수집단의 집회라고 하는 모임에는 퇴역군인들과 해병대 전우회, 월남전파병 동호회 등 많은 반공과 관련된 전쟁에 참여했던 퇴역 군인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보수집단 구성원의 문제는 진보가 아니라 일반인으로부터도 심각한 조롱거리가 되었다. 보수가 과거에만 머물러 있다면 보수가 아니라 반동일 뿐이다.
결국 무엇을 보수할 것인가라는 보수의 가치와 내용에 대하여 복거일은 “우리 사회처럼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구성 원리로 삼은 사회에서 보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자본주의 체제를 잇고 감싸는 태도”를 가져야 함을 명확히 한 바 있다.18) 그러나 앞서 지적하였듯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이념이란 자유주의(liberalism)와 민주주의(democracy)의 결합일진데 한국사회에서는 민주주의는 이룩하였지만 민주에 선행하는 가치인 ‘자유’는 아직 확보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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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회에서 진보라고 자칭하는 좌파들은 과거 우리의 역사를 바르지 못한 역사라고 부정해왔다. 대신 김일성의 논리에 따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설립에 정통성을 부여했다./사진=연합뉴스 |
5. 보수와 진보의 과제 - 자유화를 시대정신(zeitgeist)으로
보수-진보는 모두 비합리적인 ‘무조건 논리’에 경도되어 왔다. 보수에게는 무조건 ‘반공’이어야 하며, 진보에게는 환경은 무조건 보존되어야 하며, 평화는 돈을 얼마를 내던 지켜야 하며, 인권은 어떤 경우든 그 무슨 가치보다 우선 했다. 한국사회에서 보수도 진보도 논리적 주장 없이 ‘무조건’이었다.
하지만 21세기 정치에서 아무리 보수 세력이라 할지라도 인권과 평화, 환경을 부정하는 정강이나 정책, 법안을 거론하기는 힘든 현실이다. 이미 진보의 가치지향인 인권, 평화, 환경은 더 이상 진보적인 것이 아닌 일상이 되었다. 다시 말하여 현대는 보수-진보의 불분명한 경계 속에서 또는 보수-진보를 넘어서는 생활(生活) 속에 살고 있음에도 보수와 진보는 대안도 없고 논리도 없고 오직 ‘반공’과 ‘민주’만 외쳤고 지금도 외치고 있다. 진보는 선거 승리를 위해 포퓰리즘적 정책들에 몰두했고, 우파는 우파대로 선거 전략으로 복지 포퓰리즘을 이용했다. 보수와 진보 모두 한국사회 미래 발전은 안중에 없었고,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는 역사적 발전 단계에서 우리가 '산업화'(industrialization)와 '민주화'(democratization)를 이룩했으나 ‘자유화’(liberalization)를 달성하지 못하여 사회의 나아갈 길로 제시되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면 자유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경제적 자유의 확보와 확실한 재산권 보호이다. 물론 서구의 역사에서 경제적 자유가 확보되면 정치적 자유는 따라 이룩되는 것이지만 - 경제적 자유가 정치적 자유에 선행 -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정치적 자유가 경제적 자유에 선행하였다. 건국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반공국가를 만들어 ‘방어적 자유민주주의’를 세웠고, 대신 ‘사상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민주화 세력은 산업화 세력의 ‘반공’에 근거한 민주주의 탄압에 대항하여 민주주의의 회복을 자유주의 정착보다 우선시 하였기에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자유주의’가 자리 잡을 기회가 없었다. 때문에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처럼 꽃 피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에서 ‘자유주의’와 ‘자유화’가 뿌리 내리지 못한 이유이다.
두 번째는 법치(法治)의 확립이다. 사회가 심각한 분열로 타협에 이르지 못한다면 결정은 다수결이든 비례에 의한 나눔(합의제)이든 법(法)으로 정한 방식으로 결정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합리적 토론이 끝나면 민주주의의 규칙(룰)에 따라 신속한 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민주주의 규칙으로 실행한 방식에 의한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반대하며 계속 폭력을 사용하는 세력은 더 이상 진보를 넘어선 무정부세력일 수밖에 없다. 진보가 법치를 용인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사회를 부정하므로 사회통합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진보의 기반도 보수의 원칙도 모두 법치(法治)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역사를 긍정해야 한다. 익히 알고 있다시피 한국사회에서 진보라고 자칭하는 좌파들은 과거 우리의 역사를 바르지 못한 역사라고 부정해왔다. 대신 김일성의 논리에 따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설립에 정통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지난 2012년 대선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은 잘못된 것이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이끌었던 이승만 대통령을 파렴치범으로 낙인찍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무차별적으로 배포하였다. 사회주의 혁명 공작과 유사한 그람시의 진지전적 이데올로기 구축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 사회는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가 분단과 건국, 이후의 근대화에 대하여 좌파 편향의 역사 서술에 기반한 왜곡을 보임에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과 6·25전쟁으로부터 국가 수호,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와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국민의식의 확립, 또한 일제 강점기 이후 지속된 패배의식의 극복, 그리고 성공적인 민주화와 선거 민주주의의 정착 등의 긍정의 역사관을 미래 세대가 가져야만 자랑스러운 대한국민으로 뭉칠 수 있음에도 현재의 일부 편향된 역사 교과서들은 이를 반영하고 있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의 갈등과 분열과 대립만을 강조하고, 반미·반일의 국수주의적 사고로 점철된 역사 교과서를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교과서에 근거한 역사교육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보수와 진보가 함께 동의하는 역사교과서를 만들기 힘든 현실이라면 합의에 의한 교과서를 만들기 보다는 서로의 교과서를 놓고 아무런 간섭 없이 자유롭고 공정하게 선택하게 하고 경쟁하게 하는 것이 올바르다. 그러한 상황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진보가 전교조 선생들에 의해 채택되는 자신들의 교과서만 쓸 수 있다면 국가의 개입이 임시적으로 필요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임에 동의한다면 많은 진보주의자들에게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소중히 해줄"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19)
결론적으로 이 시대 보수든 진보든 보수와 진보의 노력은 “자유화로 의 길”이어야 함을 다시 강조하는 바이다.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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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기업은 무조건 나쁘고 노조는 무조건 옳다는 편향성을 극복하지 않고는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우와 청년실업 문제는 해결될 수 없음을 전투적 한국의 노조와 노조 출신 정치인들을 빼고는 모두 동의하고 있다./사진=미디어펜 |
1) 본 글은 김인영, “한국에서 보수-진보의 개념과 한계, 그리고 미래,” 송호근, 양일모, 권용립, 김상조, 김인영 지음, 『좌·우파에서 보수와 진보로』, 서울: 푸른역사, 2014, pp.181-219을 기반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
2) 김일영, “한국 보수에게 미래는 있는가?”, 한반도선진화재단·한국미래학회·좋은정책포럼 공편, 『보수와 진보의 대화와 상생』, 서울: 나남, 2010, p.212.
3) 김무성 새누리당 전(前)대표는 2016년 11월 23일 19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합리적 보수 재탄생의 밀알이 되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발표문 어디에도 합리적 보수의 내용, 즉 무엇을 보전하고 지키려하는지 내용은 없다. 또 “보수의 썩은 환부를 도려내고”라고 했는데 보수의 썩은 부분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이 주장하는 ‘합리적 보수’와 자신이 반대하는 ‘썩은 보수’의 차이는 무엇인지, ‘합리적 보수’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앞장 서겠다”는 자신의 행동과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설명이 불분명하다. 이러한 개념의 혼란은 보수가 지향해야 하는 가치와 목표에 대한 인식의 혼란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여 진다. 유병훈, “김무성 "대선 불출마, 새누리당 탄핵발의 앞장설 것,” 『조선비즈』, 2016년 11월 23일.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1/23/2016112301075.html.
4) 양동안, 『사상과 언어』, 파주: 북앤피플, 2011, pp.38-39.
5) 좌파는 서구의 매력적인 개념을 도입하여 대중에 어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자세한 것은 권용립, "한국 ‘보수’ 개념의 역사적 특징”, 송호근, 양일모, 권용립, 김상조, 김인영 지음, 『좌·우파에서 보수와 진보로』, 서울: 푸른역사, 2014을 참고할 것.
7) 『동아일보』, 2013년 1월 1일.
8) 인홍욱, “1년전 보다 보수 8.7%p 늘고 진보 6.8% 줄어...이념 지형 우클릭”, 『경향신문』, 2013년 1월 1일.
9) 최근까지 북한에 관하여 진보는 유연한 태도, 보수는 강경한 태도를, 통일에 관하여 진보는 남북한 공존 및 교육 후 통일을, 보수는 흡수통일과 비핵화를 주장하는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김일영,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의 의미 변화와 현위상: ‘뉴라이트’, ‘뉴레프트’, 그리고 자유주의”, 『철학연구』, 제100집, 2006, p.36.
10)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인한 박근혜 대통령의 몰락이 곧 ‘보수’의 몰락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노인연금, 정부 주도 ‘창조경제’, 정부 주도 문화융성 등의 정책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보수의 이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진행되고 있는 박근혜 정권의 추락이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건국, 근대화, 산업화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패러다임인 정부 주도에 의한 산업화 추진을 폐기하고 자유시장 가치에 근거한 ‘경제 자유화’를 추진했더라면 산업화-민주화-자유화의 대한민국 근대화 트라이앵글을 완성시키는 성공한 보수 리더십이 되었을 것이다. 송복 교수는 보수의 원칙을 “과거 경험을 중심하고, 끊임없이 잘못된 것을 보수하며, 도덕성이 높고, 성실함”으로 정의하며, 진보를 “이성적이고 급진적이며, 이상과 비전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정의하고 있다. 지금의 소위 ‘보수 정치세력’은 과거 경험을 무시하고, 도덕적이지도, 성실하지도 못하다는 점에서 ‘사이비 보수’라고 규정하고 현 박근혜 정권의 실패를 보수의 실패가 아니라 ‘사이비 보수’의 실패로 평가한다. 하지만 송복 교수는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성향을 제시한 것이지 ‘보수-진보’의 이념이나 가치를 규정한 것은 아니다. 김성현, “국정농단 & 탄핵정국...‘보수의 길’을 묻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조선일보』, 2016년 11월 28일.
11) 남북한 군사 대치의 상황에서 ‘반공’이 필수적이라는 주장도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기는 하지만 북한을 공산체제로만 정의하여 반대에 집중하는 것은 보수적 가치의 수호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을 김일성 주체사상에 근거한 전체주의 체제로 규정하고 개인을 말살하는 전체주의, 집단주의에 반대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북한의 통제·명령 경제가 가져온 빈곤 극복을 위해서 자유시장경제가 도입되어야 함을 강조해야 한다.
12) 신중섭, "사회통합을 위한 바른 용어 연구: 사상적 측면", 현진권 편, 『사회통합을 위한 바른 용어』, 한국경제연구원, 2013, p.44.
13) 김경미,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에 대한 이론적 좌표 설정 모색", 『정치·정보연구』, 제12권 1호, 2009, p.46.
14) ‘정치 지체’의 의미에 관하여는 조희연, "‘정치지체’와 낙천·낙선운동", 『창작과 비평』, 107호(2000년 3월), pp.331-337을 참조하시오.
15) 송호근, 『이분법 사회를 넘어서: 좌우 진영 논리를 넘어』, 파주: 다산북스, 2012, p.70.
16) 김일영, "한국 보수에게 미래는 있는가?", p.212.
17) 현재는 자유경제원(구 자유기업원)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자유주의'에 대한 이론화와 이념화 작업이 성실히 추진되고 있다.
18) 복거일, 『보수는 무엇을 보수하는가』, 서울: 가파랑, 2011, p.7.
19) 최장집·박세일, “진보에게는 보수의 현실을, 보수에게는 진보의 시각을”,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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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자유경제원이 5일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연속세미나 ‘생각의 틀 깨기 16차: 진정한 진보는 자유주의다’에서 김인영 한림대 교수가 발표한 발제문 전문입니다.)
[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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