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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정욱 대문예인 공동대표 |
하나의 나라가 세워지고 그 나라가 70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성장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대한민국은 그 상상의 끝을 보여준 나라다. 국민소득은 400배로 늘었고 125개 국 중 맨 밑바닥을 맴돌던 경제규모는 11위로 뛰어올랐다(사실 100등 밖으로 나가면 등수가 별 의미가 없다. 사흘에 한 끼 먹는 나라나 두 끼 먹는 나라나 거기서 거기).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이런 기적은 처음이다.
기적이란 불가능의 다른 말이다. 수십 년 앉은뱅이가 일어나거나 피 토하던 말기 암 환자가 갑자기 낫거나 트럭에 머리가 깔리고도 살아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모든 조건이 최악이었다. 땅 속에 석유나 다이아몬드가 지천으로 숨어있던 나라도 아니었다. 아무리 파도 땀만 나는 메마른 땅이었다. 난방을 산에 있는 나무에 의존하던 나라였다. 밥 지을 때도 산에서 긁어 온 잔가지로 불을 피우던 나라였다. 아이들이 간식으로 풀뿌리와 아카시아를 따 먹던 나라였다.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은 5.16 다음 해인 1962년 이동원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권한대행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무래도 내가 쿠데타를 잘못한 거 같아. (정권을 잡고 나서야) 나라가 도둑맞은 초가집 꼴인 것을 알았소.” 정권을 잡고 보니 할 일이 너무 많고 그러나 정작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어 난감하다는 얘기였다. 그런 나라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물론 다른 나라들도 형편은 대부분 나아졌다. 그러나 빈곤에서 탈출한 나라는 있지만 번영에까지 이른 나라는 많지 않다. 반면 번영의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에 좌절한 나라는 수두룩하다. 대한민국은 심지어 이 대열에도 끼지 않고 넘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기적이다. 기적은 한번 뿐이라서 의미가 있다. 인류 역사에서 이런 일은 절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대한민국 형 경제발전모델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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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힘들게 여기까지 온 대한민국은 현재 뿌리 채 흔들리거나 최소한 심각한 정체 중이다. 누구나 한 달에 100만원은 벌 수 있는 나라가 우리의 한계인지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지 도무지 앞이 안 보인다./사진=연합뉴스 |
리더가 영명해도 백성이 신통치 않으면 여기에 이르지 못한다. 신념에 찬 리더 옆에 악에 바친 국민들이 있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탄광으로, 사막으로, 전쟁터로 달려갔다. 외국으로 못 나간 사람들은 미싱에 코를 박고 열 두 시간 씩 재봉틀과 싸웠다. 나라를 위해 그런 게 아니었다.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그랬다. 아이들이 자신들처럼 가난한 삶을 이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충분히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 이름들이 파독 광부, 중동 근로자, 파월 장병 등이다. 그 이름 덕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 발제문은 이러한 성과를 잘 설명하고 있다. 다만 추가하거나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 몇 가지 보충한다.
월남 파병은 1964년에 임박하여 결정되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61년 첫 방미 당시 박정희 의장은 케네디와 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월남 파병을 제안한다. 미국 정부가 이 부분을 삭제한 채로 공개했기 때문에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실은 1996년 미 국무부가 ‘미국의 외교’라는 문서를 발간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당시 박정희 의장은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파병에는 미국의 승인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케네디는 당장은 필요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박정희 의장의 이 제안은 월남 사태가 급변하면서 현실화된다.
1963년 응오딘지엠 월남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즈엉반민 장군과 월남 군부의 쿠데타 모의를 묵인했던 미국은 응오딘지엠에 이어 대통령이 되었지만 총체적으로 무능했던 즈엉반민을 대신하여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의 전쟁을 떠맡게 된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월남이 기사회생하면서 북베트남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끌고 나갔다면 우리 군의 월남 파병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에 이어 2위의 규모였다. 한국 외에도 호주, 필리핀, 뉴질랜드, 태국 등이 같이 싸웠다. 재미있는 건 미국이 지급한 월 보수가 제각각이었다는 것이다. 소위를 기준으로 보면 미군이 435달러였다. 필리핀 군의 경우 441달러로 오히려 미군보다 많았고 태국군도 389달러였다. 한국군은 151달러였다. 핏값도 국력에 따라 달랐다. 실은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 서글픈 일이다.
그래도 꼴찌는 아니었다. 한국군 밑으로 월남군이 있었다. 103달러였다. 망해가는 나라에 대한 대접이 그렇다. 돈만 적게 준 게 아니다. 악역은 주로 우리 군이 떠맡았다. 민간인 포함 한국군이 살상한 베트남인은 4만 명에 달한다. 그런데도 현재 베트남에서는 한국을 자기네 나라 여자들이 많이 시집갔다고 해서 사돈의 나라라며 우호적이다. 그들은 정말 잊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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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 파병은 1964년에 임박하여 결정되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61년 첫 방미 당시 박정희 의장은 케네디와 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월남 파병을 제안한다. |
당시 파독 광부들의 체력 상위 10%가 독일인 광부 하위 10%와 같았다. 하여 탄광에 들어간 한국 광부들은 일부였다. 나머지는 캐낸 탄을 분류하는 등 기타 공정에 주로 투입되었다. 물론 몇 사람의 증언이니 일반화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광부 전부가 목숨 걸고 탄광에 들어가 목숨 걸고 탄을 캤다는 이야기를 너무 확대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잘못하면 신화가 깨질 것이기 때문에(팩트 하나로 위대한 이야기가 날아가는 경우는 흔하다).
간호사들도 마찬가지다. ‘국제시장’을 보면 만날 거구의 시체나 닦으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 것으로 되어있으나 그것도 파독 간호사의 일부였다고 한다. 오히려 독일 현지 정착 간호사들은 '국제시장'을 보면서 약간 불쾌했다고 말한다. 자기들은 나름 인텔리로 차출되어 독일에 간 것인데 마치 아무 기술도 없는 시골 처녀들이 무작정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러 간 것처럼 묘사되어 기분이 별로였다는 주장이다. 물론 일반화에는 무리가 있지만 역시 유념할 부분이다.
구로공단은 한국 경제발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1964년 4월 구로동에 한국수출공단 제1단지를 지정하면서 시작된 구로공단은 100억불 수출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추가할 부분은 이 구로공단을 만드는데 재일동포 기업가들의 힘이 컸다는 사실이다. 구로공단을 키워나가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재일동포 기업가들은 이후 한국경제 산업구조가 중공업 중심으로 옮겨가면서 찬밥신세가 된다. 부각시켜 한국경제발전사에 추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렇게 힘들게 여기까지 온 대한민국은 현재 뿌리 채 흔들리거나 최소한 심각한 정체 중이다. 누구나 한 달에 100만원은 벌 수 있는 나라가 우리의 한계인지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지 도무지 앞이 안 보인다. 대한민국은 부흥과 번영의 상징으로 세계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리더를 잘 만나면 아무리 지력이 떨어지는 민족도 잠시는 잘 살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준 해프닝으로 끝날 것인가. 답을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2016년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남정욱 대문예인 공동대표
(이 글은 7일 자유경제원이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서: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연속세미나에서 남정욱 대문예인 공동대표가 발표한 토론문 전문이다.)
[남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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