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48)-부친 살해 복수를 위한 모친 살해의 비극
에우리피데스(BC 484?~BC 406?) 『엘렉트라』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그리스 비극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소재는 미케네 왕 아트레우스 가(家)의 비극이다. 다시 말해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았던 아가멤논 왕가의 이야기이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출정 과정에서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신탁에 의해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다. 하지만 이를 불쌍히 여긴 아르테미스 여신에 의해 여신의 신관(神官)이 되어 목숨이 구명된다(또는 실제 제물로 죽임을 당한다고도 한다).  

이후 딸이 죽은 걸로 오해한(혹은 딸을 죽인 것에 대해 증오한)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전쟁 영웅 아가멤논이 그리스로 귀환하자 자신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와 모의하여 아가멤논을 죽인다. 이후 추방되었던 아가멤논의 아들과 딸인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성장하여 돌아와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고자 어머니인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살해하게 된다.  

이런 천륜을 거스르는 비극적 복수극은 숱한 작가들에게 매력적인 작품의 소재가 되어 다양한 창작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특히 그리스 3대 비극작가인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동일한 제목이나 유사 제목으로 이 이야기를 각각 다른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오레스테이아>, <엘렉트라>,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 등의 작품이 바로 그것들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는 기원전 5세기 초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세 작가 모두 동명의 작품을 썼다.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장면은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의 3부작 가운데 제2부인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도 상세히 전개된다.   

위대한 3명의 비극작가들은 각각의 작품에서 비극적 사건의 결말은 같지만, 사건의 세부 진행 상황과 주인공들의 언행을 달리 묘사한다. 신화를 해석하는 방식이나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여준다. 비극의 모티브는 같지만, 사건의 전개 방식과 그 속에 투영하는 작가의 관점의 색깔이 조금씩 다른 셈이다. 

예를 들어, 아이스퀼로스는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계교를 써서 왕궁으로 들어간 후 오레스테스가 그의 절친 필라테스의 도움을 받아 아이기스토스를 먼저 죽이고, 이후에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반면 에우리피데스는 오레스테스가 교외에서 제물을 바치는 아이기스토스를 먼저 죽이고, 엘렉트라가 출산을 핑계로 자신이 머물고 있는 농부의 집으로 어머니를 유인한 후 어머니와 설전을 벌인 후 오레스테스로 하여금 모친 살해를 감행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이스퀼로스는 아들과 어머니의 갈등에, 에우리피데스는 딸과 어머니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어 조명하고 있는 셈이다.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의 행동방식이나 심리묘사 역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자 작품에서는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자신을 죽이려는 아들 오레스테스에게 그를 키워낸 자신의 젖가슴을 내보이며, 아들의 증오심을 달래려는 감성적 대응을 한다. 반면 후자 작품에서는 딸 엘렉트라에 대한 연민을 보이면서, 자신이 남편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시키려 애쓰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아버지의 원한을 갚겠다고 어머니를 살해하는 비극은 필연적으로 당대의 사회적 윤리의식의 갈등과 충돌을 야기한다. 아내에게 죽음을 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자식이 모친을 살해하는 것은 부부간의 살인과는 또 다른 천륜을 어기는 죄악이다.  

오히려 더 무거운 죄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를 죽이려고 원한과 증오심에 불타는 자식들의 심리와 이 참담한 상황에 직면한 어머니의 대응 태도와 절규에서 서로 엇갈린 운명에 짓눌려 고통 받는 인간들의 비극적 상황은 관객들을 극도의 고통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에우리피데스는 <엘렉트라>에서 어머니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강하게 주장하는 엘렉트라 에 대해 남편을 죽이게 된 변명과 자식들을 냉대했던 점을 후회하는 클리타임네스트라 사이의 팽팽한 대결을 잘 묘사해준다. 아이스퀼로스가 오레스테스가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직접 죽이는 상황으로 설정하고 어머니와 아들 간의 증오와 갈등, 읍소를 그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더구나 오레스테스는 모친 살해를 앞두고 갈등하고 번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오히려 엘렉트라가 흔들리는 오레스테스에게 부친의 복수심을 북돋우는 상황으로 그리고 있다. 오레스테스는 모친 살해를 부친의 복수라는 신탁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여 스스로 죄의식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반면 엘렉트라는 그러한 신탁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로 복수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정신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가 신화의 이런 모티브에서 착안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대비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지만, 딸의 아버지 지향적 성향에서 영감을 얻을 것일 뿐 실제 신화적 내용과 일치되는 개념은 아니다.  

그리스 비극 작가들은 왜 이런 천륜에 어긋한 죄악의 상황을 묘사하는 데 매진했을까? 아트레우스 가의 비극적 이야기를 통해 원한과 증오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또 다른 원한과 증오를 낳고 마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나약함, 운명의 속박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상을 보여줌으로써, 위기에 처한 가족과 사회의 윤리에 경종을 주려한 것은 아닐까.

2400여 년 동안 수많은 작가, 화가, 조각가에 영감을 주어 다양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키고, 수많은 사람에게 동명의 희곡과 소설, 영화, 뮤지컬로 대중에게 사랑받아 온 것도 엘렉트라의 치명적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인간들의 삶을 무한하게 충전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 비극 '트라고이디아(tragoidia)'는 더 이상 비극(悲劇)이 아니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엘렉트라』,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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