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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
사회에 대한 관심
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온 분이다. 자수성가를 해서 경기도 수원에서 LPG 가스 대리점과 한일전기 총판을 하셨다. 아버지 회사에서 여러 신문을 구독해서인지 집에서는 신문을 구독 안했다. 그러다 고3 때인 1979년부터 집에서 당시 정부에 비판적인 동아일보를 구독하게 되었다. 나는 신문을 열심히 읽었고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정치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그해에는 봄에 유신정우회(유정회,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되는 간선 국회의원으로 재적 1/3을 차지함) 출신의 백두진 씨가 국회의장에 지명되었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1978년 말에 있었던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에 득표율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신민당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강력한 투쟁을 표명하였고,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되지 않은 백두진 의장 지명은 국회 내 파동으로 연결되었던 기억이 난다.
이때부터 시작된 박정희 정권과 신민당의 대결은 일 년 내내 긴장 속에 진행되었다. 또 무더위가 한창이던 8월 초 YH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이 있었고, 이를 경찰이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김경숙이라는 여공이 당사 아래로 추락사 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어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뉴욕타임즈에 박 정권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했고, 박 정권은 그를 사대주의자로 몰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였다. YS 제명이 계기가 된 부산 마산에서의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는 결국 10 ‧ 26으로 연결되면서 박정희 시대는 막을 내린다.
나는 그해 있었던 입시에 떨어져 재수를 하게 되었다. 그때 가장 친했던 친구 중의 한명의 자형이 서울대의 유명한 운동권 인사였다. 그 형의 집에 놀러 가면 여러 가지 사회과학 서적이 많았고 또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이라는 노래극 테이프를 빌릴 수 있었다. 이것을 듣고 또 들었다. 지금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하도 많이 들었었기 때문에 가사는 다 떠오르지 않지만 음정은 대략 떠오른다.
1980년 봄에는 전두환 신 군부 세력이 비밀리에 집권을 시도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각 대학가와 거리에서 진행되었다. 당시 나는 서울역 인근에 있는 입시학원에 다녔는데, 5월 중순에는 근처 서울역과 남대문 일대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의 시위를 군대가 진압한 광주민주화운동도 발생했다.
나는 재수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시위에 참여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재수생이라는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게 학원 공부와는 별도로 당시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이나 해직교수 등이 쓴 사회 비판적인 서적을 많이 읽었다. 광주사태 당시에는 새벽에 학원에 일찍 나와 아무도 없을 때 김지하 시인이 지은 민주주의를 기원하는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칠판에 적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다음해 1981년 봄 나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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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파의 영수 레닌은 늘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것은 영원한 것은 푸른 소나무”라는 구절을 인용했고, 마오쩌둥은 “조사 없이 발언 없다”는 명제를 늘 주장했는데, 오히려 그들을 따랐던 좌파는 역설적으로 스승들의 교리를 부정한 셈이다./사진=연합뉴스 |
의식화
대학에 입학해서는 처음부터 마음을 먹고 운동권 써클이었던 탈춤 써클에 가입했다. 그곳에서는 농악과 탈춤도 배웠지만, 더 중요했던 것은 그동안 가지고 있던 기성 사회에 대한 인식을 깨뜨리는 의식교육이 주요한 것이었다. 2학년 들어서서는 지하 써클 활동을 하면서 학교 수업은 팽개치고 전업적인 학생운동가가 되었다.
다양한 사회비판 서적을 선배 동기들과 읽으면서 치열한 토론을 전개했다. 신입생 때는 정부 비판적 지식인의 책이나 노동자 농민의 수기, 소설 등을 읽으며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1차 의식화 과정이 있었다. 나는 재수할 때 이미 기초적인 의식화 책 외에도 ‘해방전후사의 인식 1’, ‘전환시대의 논리’, ‘8억 인과의 대화’같은 책들을 거의 다 읽었다. 따라서 동기들에 비해 이르게 1학년 2학기부터는 일본어 읽는 법을 배워 ‘경제사 입문’, ‘소유와 생산양식의 역사이론’, ‘자본주의의 구조와 발전’ 같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경제서적도 읽었다. 2, 3 학년 때는 마르크스주의에 입학한 다양한 서적과 좌파적 혹은 민족주의적 인식에서 쓰인 한국 근현대사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실천 활동으로 교내외에서 비밀리에 유인물을 살포하거나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면 앞장서서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1학년 여름방학 때는 충북 진천에 가서 열흘 가까이 농촌활동도 했다. 그해 말에 있었던 군사훈련 교육에서는 시위를 주동했다가 난생 처음으로 경찰서에 잡혀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2학년 여름 방학 때는 뚝섬에 있는 공장에 일주일간 취업해 공장 현실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다 1983년 가을에는 교내 시위를 주동해 구속되어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사회 각 부분에서 정부에 대항하는 분위기가 거세지자 전두환 정권은 유화적인 조치를 취해서 다음 해 봄 감옥에 있던 학생들을 전원 석방하였다. 6개월 만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감옥에 있는 동안은 헤겔 등의 철학서와 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 그리고 ‘여명의 눈동자’ 같은 장편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84년 초 감옥에서 나와서는 한국말로 번역된 마르크스의 ‘자본론 1. 2’, ‘공산당선언’,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당의 두 가지 전술’, ‘공산주의에 있어서의 좌익소아병’,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 모택동의 ‘모순론’, ‘실천론’, ‘신민주주의론’, 유소기의 ‘공산주의자의 수양에 관하여(?)’ 같은 글들을 읽었다.
운동가
이미 나는 학생운동과 감옥생활을 통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려면 단순히 민주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존 제도를 전복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회주의 이론에서 혁명의 주력 부대로 중요시하는 노동자계급을 조직하고 의식화하기 위해서 용접기술을 배워 공장에 취직하였다. 이후에는 인쇄공으로 또 철도청 기능직 노동자로도 취직해 노동운동을 지속했다.
인천 부평 지역에서 2년 여간 노동운동을 했다. 공장에 취업을 준비하고 밤에는 유인물을 살포하는 일이 주된 일이었다. 막 조직화되던 ‘인천노동자연합’의 하부 성원으로도 잠깐 있었다. 개인 사정으로 서울로 활동 지역을 옮기게 되면서 ‘서울노동운동연합’의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보안사의 추적을 받기도 했다(나중에 이 조직을 김문수, 심상정 등이 주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을지로 충무로 일대의 인쇄공들을 조직하고 같이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서 1988년 여름에는 ‘서울지역인쇄노동조합’을 만드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고 서울지역의 노동조합 협의체인 ‘서울지역 노조협의회’ 설립에도 간여하였다. 이후 ‘전태일기념사업회’라는 노동단체에서도 3년간 근무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철도청에 기능직 노동자로 취업했다. 그러나 이미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현실적 대안이 불확실한 상황이어서 노동운동을 열심히 한다기보다는 점차 생활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사상적 회의
내가 학생운동 하던 시절에는 NL이니 PD니 하는 것이 있기 전이었다. 나는 재수 때부터 리영희 교수가 썼던 중국 혁명에 대한 책을 즐겨봤고 중국 혁명에 매력을 느꼈다. 훗날 문화대혁명이 내걸었던 명분과는 달리 권력투쟁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그때까지는 중국 혁명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런 나에게 1989년에 있었던 천안문 시위는 큰 충격이었다. 시위를 중국 인민해방군이 진압하는 것을 보면서 사회주의에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떻게 인민해방군이 인민을 진압할 수 있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해 있었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1990년대 초반에 걸쳐 구 소련을 비롯해 현존하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사상적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부터는 혁명적 사회주의는 벗어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점진적 방식을 통해서라도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진보적이라는 생각은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역시 한번 약해진 혁명에 대한 열정은 사상적으로도 점차 회의적이 되게 만들었다.
그러한 사상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90년대 중반에는 논어, 맹자, 한비자 등 중국의 고전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스터디 그룹에서 혹은 현대판 서당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1996년 무렵에는 공부를 좀 더 심도 깊게 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가려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 그러면서 대선이 있던 1997년 말에는 철도청을 그만두면서 노동운동도 정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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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정권은 김정일이 죽었지만 김정은으로 이어지고 있다.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에 관한 인식은 지난 몇 년을 경과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전환
1997년 초 북한의 최고위직 중 한 사람인 황장엽 노동당 국제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하였다. 그가 터뜨린 일성은 “사회주의가 어떻게 인민을 굶겨 죽이는가?”였다. 나는 한때 한국의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에서 북한을 추종하던 소위 ‘주사파’는 아니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서 약간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북한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김일성 등 지도부가 일제에 대항해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이라 생각해 적극적으로 북한체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진 않았다.
그러나 북한의 ‘주체사상’을 실제로 만들었다는 황장엽 씨가 망명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그가 북한체제에 관해서 쓴 글들을 읽어보게 되었다. 그것의 핵심적 내용은 ‘북한의 사회주의란 것은 오히려 봉건체제에 가까운 것이고 진보적인 체제가 아니라 낙후한 체제라는 것’이었다. 또 북한에서는 ‘수령 한 사람만이 절대 지위를 갖는 반면, 인민의 인권은 심각하게 유린되고 있는 체제’라는 것이었다.
1996년 초부터 나는 과거 학생운동을 했던 동년배들이 만든 ‘푸른사람들’이라는 청년단체에 가입해 가끔 모임에 나가고 있었다. ‘푸른사람들’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시대 변화에 조응하는 새로운 사상, 사고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학습을 진행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마르크스주의 극복, 민족주의 비판, 자유주의에 대한 긍정적 시각, 북한민주화를 위한 적극적 준비 등이었다. 거기서 토론하는 과정에서 북한체제에 대해서 더욱 비판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탈북자들의 수기도 여러 권 읽어보았는데 참으로 믿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내용들이었다.
1998년에는 요덕수용소 출신의 탈북자 강철환(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현재는 북한인권단체인 북한전략센타 대표를 맡고 있다)을 만났는데 그가 전해준 수용소의 경험은 너무나 참혹했다. 또 한국에 와서 한양대를 다녔는데, 같은 학교 학생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잘 안 믿었단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귓속말로 "조국 배반자야"라고 말하기도 했단다. 남한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이 북한의 실상을 듣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경우는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생각이 바뀌어가면서 읽는 책의 주제나 내용도 바뀌어갔다. 북한에 대한 관심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북한 체제와 현실에 관련된 내용이 주된 것이긴 했지만, 복거일, 공병호 등 한국 자유주의 주창자들의 책들을 읽었다. 또 내가 이론적인 면을 중심으로 인생을 설정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원전을 두루 섭렵하지는 못했지만 밀이나 프리드만 등 자유주의자들이 쓴 책들도 일부 읽었다. 이런 몇 년의 과정을 통해서 생각도 서서히 변화하게 되었다.
이후와 현재
나는 동료들과 북한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북한 체제의 민주화를 주장하고 북한 주민의 인권개선의 필요성과 시급성을 전파하기 위하여 잡지를 창간하기로 하였다. 1998년 11월 창간한 격월간 ‘시대정신’이 그것이다. 나는 이 잡지의 발행인과 편집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북한의 민주화와 인권개선을 위한 액션을 주요활동으로 하는 단체를 창립하였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가 그것이다. 창립 대표를 맡았던 동료가 1년 만에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면서 나는 후임으로 대표를 맡게 되었다.
초창기의 활동은 북한의 실상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뭘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래서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Keys'라는 월간 잡지를 발행하였다. 북한의 닫힌 체제를 여는 열쇠라는 의미다. 내용은 중국에 체류하는 탈북자를 직접 인터뷰하여 북한 실상을 알리는 것과 탈북자 수기 등을 소개하며 국내외에서 진행되는 북한인권 활동 등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북한 인권 탄압 실상을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후 영어판과 일본어판도 3개월에 한번 꼴로 출간하여 다른 나라 사람들도 북한의 실상을 알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한편으로는 일본, 폴란드, 영국, 미국 등에서 열린 북한인권 국제회의 등에 참가하여 다른 나라의 활동가들과 북한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적극적인 연대활동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2005년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서 국제적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주관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나는 난생 처음으로 미국을 가게 되었다. 사전에 비자를 받기 위해 주한 미국 대사관을 방문하였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예전에 운동권 시절 나는 반미주의자였다. 우리 집은 경복궁역 근처였는데, 당시 시내에서 있었던 시위에 참석하고 뒷풀이에서 술을 한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오다 보면 미국 대사관 앞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그럴 때면 밤늦게까지 불이 밝혀진 대사관 건물을 보면서 “미국 놈들은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려고 밤새도록 일하는 데 내가 술 취해 다니는 게 말이 안 되지”하면서 돌아와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려 이념서적을 밤늦게까지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 미국 본국과 서울의 시차 때문이었지만 당시를 생각하면서 실소했다.
앞에서 언급했던 ‘Keys’는 인터넷의 보급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속보성과 대량의 출판이 어려운 단점이 드러났다. 그래서 이를 대체해 북한의 제반 소식을 신속히 알리기 위해 ‘The Daily NK’라는 인터넷신문을 창간하였다. ‘The Daily NK’는 북한의 실상을 신속히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매우 많은 사람들이 접속하면서 북한 전문신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북한에서 자행된 공개처형 동영상을 최초로 입수하여 보도하였고, 2009년 말에 북한에서 실시된 화폐개혁을 세계 최초로 보도하는 쾌거를 이룩하는 등 북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2003년에는 대북 라디오방송을 설립하였다. ‘자유조선방송’이 그것이다. 나는 창립 대표를 겸직하게 되었다. 우리가 북한을 상대로 방송을 하기로 한 것은 결국 북한 주민이 인권개선의 주체라면 그들이 외부 정보를 듣고 자신들이 살아가는 체제와 비교하여 자신들 얼마나 억압당하고 있는지, 왜 자신들이 큰 죄 없이 굶어죽고 맞아죽는 그런 나라가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으로 송신하는 전파는 재정적 취약함 때문에 단파방송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출력이 약하기 때문에 북한 당국의 방해전파로 인해 청취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전파를 송출했고 지금은 ‘국민통일방송’으로 확대되어 처음과 비교해 더 많은 시간과 더 유익한 내용을 송출하고 있다.
활동과정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의 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나는 과거 운동권 출신이었기 때문에 선후배, 친구들이 대부분 이른바 진보진영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과거 군부독재에 저항해 싸웠던 많은 사람들이 유독 북한인권 문제에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저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대개는 그 심각성을 모르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 안다고 해도 ‘이것은 자신들과 이념 ‧ 정치 성향이 반대인 보수진영에서 주장하는 이슈이고 자칫 잘못하면 상대편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 같은 인식에 입각한 편견은 큰 장벽이다. 그러나 북한인권 문제는 진보 ․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다. 최근 들어서는 약간의 변화가 감지되기는 하고, 나를 응원하는 친구들도 하나 둘 생기고 있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다른 어려움은 재정과 관련된 것이다. 아마 이것이 가장 큰 어려움일 것이다. 지금도 늘 이 문제로 인한 압박감을 느낀다. 우리 활동에 필요한 기금은 회원과 후원회원들이 내는 소액 후원금과 정부보조금, 각 종 프로젝트 수행에 따른 수입 등이다. 한때 몇 년간 ‘북한민주화네트워크’와 ‘The Daily NK’, ‘자유조선방송’의 대표를 겸직하던 몇 년간은 사업비와 40여 명에 달하는 활동가들의 활동비를 내가 최종적으로 책임지던 시절도 있었다. 미국의 ‘NED(국립민주주의진흥재단)’등의 기금지원을 일부 받기도 했었고, 우리가 제공하는 활동비는 당시 기준으로 한 사람 당 100만원 전후의 돈이어서 남들이 보면 큰돈이라고 볼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 입장에서는 매달 엄청난 돈이 소요되었다. 모자란 돈을 여기저기서 빌리는 것도 큰일이었다. 다행이 그달의 재정을 맞출 수 있으면 한숨 돌리고 넘어가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면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1996년에 담배를 끊었는데 월급날을 며칠 앞두고 돈을 모두 마련하지 못하면 초조해 총무를 맡은 후배에게 담배를 두세 개비를 빌려서 피웠다. 그러면 총무가 나머지 직원들에게 “이번 달에는 월급이 제 날에 안 나올 것 같다”고 말을 전한다. 그러면 직원들은 내 눈치를 살금살금 살핀다.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각 단체를 분리 독립해 후배들에게 대표를 물려줘 내가 최종적으로 책임 져야할 재정은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힘들다.
북한인권 하면 무언가 어둡고 답답해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좀 더 가볍게 접근해보자는 취지로 시작된 ‘북한인권국제영화제’는 2011년 첫발을 내디뎠다. 올해로 6회를 마무리한다. 이것도 매해 행사를 진행할 때마다 순탄하게 된 것은 아니고 그때그때 어려움이 있었지만 여기까지 왔다. 특히 작년 5회는 우리가 소망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을 지원한 ‘간도경찰’이라는 작품이 두만강 일대에서 거의 촬영을 마쳐가던 중 중국 당국의 간섭으로 문제가 생겼다. 감독이 조선족 동포(국적이 중국인)였기 때문에 영화가 우리 영화제에 출품될 경우 중국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없다고 감독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영화제 개막을 불과 3주 앞두고 발생한 일이다. 개막작 없는 영화제를 상상할 수 있는가. 개최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천만다행으로 1주일을 앞두고 대체 작품이 연결되었다. ‘설지’라는 영화인데 탈북 화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달려오다 보니 내가 북한인권운동을 시작한지 벌써 19년이 되었다. 내년이면 20년이다.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간이다. 시작할 때는 이렇게 시간이 길게 걸릴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북한의 저 끔직한 체제가 대략 10년이면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김정일은 죽었지만 김정은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에 관한 인식은 지난 몇 년을 경과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변화는 감지되고 있다. 마침내 북한의 민주화가 실현되고 북한동포들이 자유를 찾는 그날까지 나와 동료들의 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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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자들의 수기도 여러 권 읽어보았는데 참으로 믿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내용들이었다.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가 전해준 수용소의 경험은 너무나 참혹했다./사진=연합뉴스 |
정리하며
성년이 될 무렵부터 지금까지의 인생사를 간단히 정리해봤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욱 복잡하고 굴절 많은 것이었다. 특히 한 사람의 사상(?) 혹은 이념, 생각이 형성되고 발전하고 전환하는 문제를 돌이켜 보게 된다. 나는 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던 것일까? 물론 처음부터 이론이나 이념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회문제에 대해 갖게 된 초기의 관심과 약자에 대한 동정 등이 시발점이었을 것이다. 이런 것이 문제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젊은 시절에 남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개인의 삶만을 추구하는 것이 어쩌면 문제일 수도 있다. 사회란 개인과 집단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한 개인의 생각은 선배를 비롯해 주변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 혹은 발전(?)한다. 일정한 체계를 갖춘 이념교육 혹은 독서 프로그램이 이미 준비되어 있고, 비판적 사고 훈련이 안된 젊은이는 이런 과정을 통해 특정한 방향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정리할 수밖에 없다. 특히 80년대 초반의 정치 상황은 피 끓는 청춘이었던 청년에게 그런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인생을 비겁한 것으로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이때 마르크스주의는 계급투쟁론, 잉여가치설, 역사발전 5단계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규정, 하부와 상부구조의 작용 같은 명료한 프레임을 통해 사회를 비교적 간명하게 설명하는 매력을 준다. 이러한 단순한 인식은 사회변화에서도 다양한 요인과 동인과 사람들의 대응을 복잡하게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급진적이고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강화시켰다고 본다.
그러나 사람이 나이를 들면서 몸도 성장하고 생각도 깊어지듯이 사회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그에 따른 사고나 이론도 변화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좌파의 영수 레닌은 늘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푸른 소나무”라는 구절을 인용했고, 마오쩌둥은 “조사 없이 발언 없다”는 명제를 늘 주장했는데, 오히려 그들을 따랐던 좌파는 역설적으로 스승들의 교리를 부정한 셈이다.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이 글은 27일 마포 리버티홀에서 열렸던 자유경제원 연속세미나 ‘나는 좌파였다 제4차: 이 시대 청년에게 주는 고언 한기홍 편’에서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가 발표한 발제문 전문이다.)
[한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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