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km 달려와 수십만원 들여야 권리 행사…'사전 등록'에 발목 잡혀 허탕도
   
▲ 이석원 언론인
지난 4월 2일 워킹 홀리데이로 스웨덴에 입국한 강하영 씨(가명)는 난생 처음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왔다. 스톡홀름에서 북쪽으로 640km 떨어진 우메오에 살고 있는 강 씨는 무려 6시간 30분 기차를 타고 투표 전날 스톡홀름에 도착해 싸구려 호텔에서 하룻밤을 잔 후 다그 함마르셸드 거리에 있는 '주스웨덴왕국대한민국대사관'에 와서 가슴 벅찬 제19대 대통령선거에 참여한 것이다.

한국대사관은, 전 세계 한국대사관이 소유하고 있는 공간 중 가장 유서 깊은 곳 중 하나다. 20세기 초 스웨덴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이바르 유스투스 텡붐이 설계한 이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고풍스러운 건물로, 원래 스톡홀름 귀족의 개인 저택으로 지어졌지만 나중에 발레 박물관이 됐고, 이것을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우리 외교부가 매입해 대사관 건물로 사용한 것이다. 길 건너편 미국 대사관의 엄청난 규모에 비해 언뜻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거의' 문화재급 수준의 건물인 것이다.

그런데 강 씨는 대사관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재외국민 투표를 위한 사전 등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외국민 투표 사전 등록은 3월 30일까지였고, 난생 처음 투표에 참가하는 강 씨는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에서 그걸 해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탓이다. 결국 강 씨는 여기까지 온 만큼의 시간을 다시 들여 우메오로 돌아가면서 자신의 멍청함을 한탄했다.

재외국민 투표는 2012년 4월 총선 때 부활했다. 1972년 해외부재자투표 제도가 폐지된 이후 40년 간 재외국민의 투표행위 자체가 배제됐다가 숱한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살아난 것이다. 분명 다행한 일이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해줌으로써 자긍심과 애국심을 더 고취시켜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위해 그들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것이다.

   
▲ 전 세계 우리 해외공관 중 문화재급 건물로 명성이 자자한 주스웨덴왕국대한민국대사관 전경. /사진=이석원

하지만 문제가 있다. 상당수 재외 국민들은 '차별'이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차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견 그런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투표를 위해 먼 거리를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왜 내국에 있는 국민은 '사전 등록'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투표를 재외국민은 해야 하는 건가 하는 문제다.

지난 2016년 총선 때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중인 이상영 씨는 하필 재외국민 투표 사전 등록 기간에 노트북이 고장 나 인터넷 접속이 안됐다. 등록이 하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니 노트북을 고쳐서 등록을 해야지 하면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보니 마감이 지나버린 것이다. 대사관에 문의를 했더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내년 대통령 선거 때 꼭 등록하고 투표하라'는 답만 돌아왔다.

주위를 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사전 등록을 하지 못해 이번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말한다. "한국에서라면 투표통지문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자신의 투표소만 안다면 투표일 당일 신분 확인만하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데 재외국민의 경우에는 왜 사전에 등록을 하지 않으면 투표권을 주지 않느냐?"며 "이는 엄밀히 말해서 국민 기본권 침해다."라고.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 거의 한 달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정신차려보니 12월 19일 오후. 부랴부랴 지방에서 차를 몰아 내 선거구에 도착했고, 오후 5시 45분 겨우 줄을 서 투표를 할 수 있었다.

주민등록증 하나로 나의 신분을 확인하고. 심지어 얼마 전부터 도입된 사전 투표제는 국내에서는 아무런 신고 절차없이 제 투표소가 아닌 곳에서도 사전 투표를 하고 투표 당일 여행을 가거나 집에서 쉴 수도 있다. 그러니 재외국민이 사전 틍록을 기본권 침해라고 항변하는 것도 말이 되는 것이다.

스웨덴을 비롯해 유럽에 사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국 뉴스를 접하는 게 쉽지 않다. 본인이 열심히 인터넷을 통해 챙겨본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재외국민의 사전 등록이 이뤄지고 있고, 그게 언제까지라는 것을 인지하기 쉽지 않다. 나름의 이유는 있을 것이고, 불가피성을 들이대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유나 불가피성이 이해되고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투표할 권리를 주긴 했지만 그 권리에 '제한'을 둔 것이다.

   
▲ 재외국민 투표의 사전 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은 이 재외국민투표소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사진=이석원

지난 2011년 남미 페루로 선교를 가신 신부님이 있다. 신부님은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560km 북쪽에 있는 트루히요라는 도시에서 사목을 하고 계셨다. 그런데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 그 신부님은 투표를 위해 리마의 한국 대사관까지 가야 했다. 560km. 서울에서 부산보다 더 먼 거리다.

신부님은 버스를 타고 무려 10시간 넘게 달려 리마에 도착해 투표를 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 전에 재외국민 투표 사전 등록을 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재외국민들은 그런다. 엄청난 시간과 장소의 불편을 감수하고도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귀한 권리를 행사하려고 한다.

하지만 불편한 애국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하면 애국심마저도 외면한다. 그렇다고 '넌 왜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애국심을 가지지 않나?'고 비난할 수는 없다. 너무 편한데도 애국심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국 땅 안에 최소 1000만 명 이상이니까. 국가가 국민을 편하게 해주지 않는데 애국심을 강요하는 것은 국가의 이기주의다.

강하영 씨가 투표를 위해 투자한 시간은 만 24시간이다. 그리고 왕복 기차비 2453크로나(우리 돈 약 33만원)과 하룻밤 호텔비 14만원 등 모두 47만원의 비용이 들었다. 스톡홀름 중앙역에서 호텔, 호텔에서 대사관, 그리고 대사관에서 스톡홀름 중앙역까지는 교통비를 아끼려고 걸었다.

하지만 난생 처음의 투표권 행사는 해보지도 못했다. 이제 22살의 그에게 다음 선거는 어떻게 다가올까? 워킹 홀리데이가 끝나고도 정식 취업 비자로 스웨덴에 남고 싶은 그는 다음에는 반드시 '사전 등록'을 하고 그 긴 시간과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투표에 참여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부디 그러길 바란다. 하지만 제한된 권리를 가지고 애국심을 강요하는 대한민국은 그에게 그를 강요할 자격은 없는 듯하다. /이석원 언론인
[이석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