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67)-고통에 직면할 때 내면의 철학과 마주하라
보에티우스(480?~524?) 『철학의 위안』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인간은 불운에 처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자신을 불행에서 구해 줄, 또는 최소한 자신을 위로해 줄 초월적인 무언가를 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는 그에 대한 응답을 얻을 것이고, 어떤 이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로마의 철학자 보에티우스(480?~524?)는 죽음을 앞두고 내면의 철학과 대화를 통해 자신을 위안하고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성찰의 기록물이 <철학의 위안>이다.

보에티우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학문에 천착했고, 그리스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하거나 주석서를 쓰고자 시도했을 정도다. 실제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술인 <범주론>, <명제론>의 주석서를 펴내기도 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그리스의 논리학과 수사학뿐만 아니라 산술, 음악, 기하학, 천문학에까지 폭넓게 미쳤다. 이렇듯 그는 그리스 문명의 후광을 입은 로마의 지적 전통을 존중했던 철학자이자 정치가이다. 그가 당대에 신플라톤주의자라고 불리고 사후에 '최후의 로마인'이라 불린 까닭에 거기에 있다. 

보에티우스는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433~493)에게 멸망당한 476년 직후에 출생했다. 그런데 왜 그는 로마가 멸망한 후에 태어났으면서 ‘최후의 로마인’으로 평가받을까?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자신의 근위병이었던 오도아케르 장군에게 폐위되었다. 하지만 오도아케르는 게르만 병사들의 왕이었을 뿐 로마인들은 실질적으로는 로마의 법제도의 통치 하에 있었다. 더구나 오도아케르는 4년여 간 지배했을 뿐 이탈리아로 진출한 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쿠스(454?~526)에게 공격을 받고 패망했다.

그런데 테오도리쿠스 역시 동고트족의 왕이라 칭했을 뿐이다. 정통성을 가진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그가 황제 칭호를 쓰는 것을 윤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오도리쿠스는 동고트족의 새로운 수도인 라벤나에서 궁중 권력을 행사했지만, 여전히 로마의 행정관 관직은 서로마 제국의 방식 그대로 유지되었다.

보에티우스는 동고트족과 동로마 제국 황제가 미묘한 관계에 처한 상황에서 서로마 교회와 동로마 교회의 교권까지 이에 가세해 동서 갈등을 빚고 있던 시대를 살았다. 보에티우스는 로마의 귀족으로서 집정관을 지내고 그의 두 아들까지 집정관을 역임할 정도로 명문가문의 여유 있는 삶을 보냈다. 

승승장구하던 보에티우스는 라벤나의 재상격인 행정관장을 맡아 테오도리쿠스 왕가의 궁정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불운에 엮이게 된다. 그는 로마인의 자유를 열망하는 편지를 쓰고, 사악한 마술에 홀려 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했다. 특히 원로원 의원이던 알비누스의 반란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받아 유배와 사형 판결을 받고 40대 중반에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에게 씌워진 죄가 날조된 것임을, 또 그의 죽음이 동서 교회 권력의 알력과 궁정 권력의 암투의 희생양이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후세에 이름을 더욱 뚜렷이 남길 수 있게 된 것은 유배되어 죽음을 기다리던 시기에 저술한 명저 <철학의 위안> 덕분이다. 그에게 불행이었던 일들이 후대에 중요한 철학적 담론을 전하는 계기를 만든 행운이라니. 그가 남긴 다른 논리학 주석서나 철학 번역서 보다 그가 억울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성찰해 본 이 마지막 저작이 그의 완숙한 철학정신과 종교에 대한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보에티우스는 이 책에서 자신의 억울한 처지에 대한 슬픔과 분노, 좌절의 감성들을 하나하나 짚어본다. 그가 성찰해 나가는 방식은 철학과의 대화다. 그는 철학을 의인화한 그녀와 플라톤 대화편 식의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삶과 정념들을 되돌아본다. 전체적으로 시와 산문을 번갈아 등장시킨 이원(二元) 구성, 이른바 '메니포스 풍자 문학'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체 5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1권과 2권에서 보에티우스는 자신의 억울함을 시와 산문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가의 한 구절에 그가 처한 부당한 상황이 은유적으로 드러나 있다.

"죄인이 받아야 할 처벌은 결백한 자들에게 내려지는데,
그릇된 습속은 높은 옥좌에 앉아 있고
사악한 자들은 부당한 운명으로 고귀한 자들의 목을
짓밟고 있습니다."

보에티우스는 실각하여 권력과 명예를 잃었다. 또 명성과 즐거움, 그리고 일상의 쾌락을 추구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가 자신의 이런 불운한 운명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고 슬퍼할 때 철학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라 여기는 그런 요소들이 덧없음을 일깨운다.

보에티우스는 청렴하고 강직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로 인해 그는 많은 이들의 질시와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가 권력 암투의 희생양이 된 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보에티우스는 급전직하의 운명에 처했고, 유배 생활 속에서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다.

보에티우스는 처음에 자신을 불운을 인정하기 싫었다. 억울했다. 1권과 2권에서는 자신을 무고한 밀고자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 한탄이 여러 차례 제기된다. 그러나 내면과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 불운을 극복해 낼 힘을 얻고 있다. 그는 불운에 처해 헛된 갈망에 자신을 소진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바꾸면서 운명의 항상성을 지키라고 말한다. "운명의 위협을 두려워할 필요도, 운명이 아첨도 기대할 필요가 없도록" 말이다.

"운명 안에는 어떤 바랄만한 것도, 어떤 내재적인 선함도 없음이 명백하며 그 운명이라는 것은 항상 선한 이들의 편이 되지도 못하고 한편이 된 이들을 선하게 만들어 주지도 못한다."

보에티우스의 대화는 철저히 철학적이다. 고립된 유배지 생활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벗이자, 멘토는 그 자신을 키워주었던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으로 스스로의 불운을 재조명하고 치유해내고 있다. 불운한 운명에 대한 보에티우스의 항변에 대해 '철학'인 그녀는 때로 질책하고 때로 달래듯 그를 각성시킨다. 실은 보에티우스가 자신에게 주는 말이기도 하다. 이성적 치유법이다.

"운명은 행운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불행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행운은 거짓 선의 위장된 모습으로 행운을 즐기는 자들의 정신을 옭아매고, 불행은 깨지기 쉬운 행운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준다. 그러니 행운은 바람처럼 흘러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항시 그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지만, 불행은 경고를 하며 명쾌하여 그 불행의 단련을 통해 사람들을 현명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보에티우스는 3권에서 최고선의 화두를 꺼내며 불행에 처했다고 한숨짓는 자신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자문한다. 참된 행복이란 무엇일까. "모든 좋은 것들이 모여 완성된 상태가 바로 행복임이 명백하다." 그런데 그 행복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통속적으로 행복의 원천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돈, 권력, 명예 등이다. 그런데 권위와 권력은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때로는 광채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잃어버리기도 한다. 어떤 이에게 권위로 느껴지는 사람이나 일이 전혀 다른 사회와 상황 속에서는 그렇게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보에티우스는 "참된 행복은 최고의 신 안에 있어야만 할 것"이고, 최고선을 추구할 때만이 이러한 행복이 성취된다고 본다.

"최고선이란, 악한 자들에게나 선한 자들에게 똑같이 목적이 되어서 선한 이들은 덕이라는 본성적인 기능을 통해 선을 추구하지만 악한 이들은 본성적인 기능이 아닌 여러 욕망을 통해서 선을 얻으려 시도하는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선한 자들이나 악한 자들 일단 모두 최고선을 지향한다고 본다. 다만 선한 행위를 하느냐 악한 행위를 하느냐는 인간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가 완수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의지와 능력, 이 두 가지인데 둘 중 하나가 없다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악인들의 능력은 힘에서가 아니라 힘이 없음에서 오는 것"이고, "악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명백" 하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지가 없는 경우에 누구든 원함이 없기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고, 능력이 없는 경우는 의지가 헛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자들이 아무리 잔혹한 짓을 한다 해도 지혜로운 자의 월계관은 떨어지지도 시들지도 않는다. 다른 이들의 악함은 선한 영혼들의 고유한 영광을 거둬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악한 사람들이 악한 행위를 한 것에 벌이 내려지지 않고, 선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잔혹한 일을 당하는 일에 대해 억울해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악에 저항할 수 없는 자들은 그렇게 자제력이 없기에 약한 법"이니 "선함 자체가 선한 사람들에게 보상인 것처럼, 악함 자체가 악한 자들에게는 처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보에티우스의 관점에서는 자신에게 억울한 형벌을 내린 이들을 스스로 선을 행하지 못하는 자신보다 유약하고 자제력이 부족한 자들로 여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처벌하고 죽음에 처할 ‘유약한 자들’을 사면해줌으로써 영혼의 치유를 얻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보에티우스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완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철학이 주는 마지막 치유책은 신의 섭리를 깨닫게 하는 일이다. 4권과 5권에서 철학의 여신은 보에티우스가 받는 고통 또한 신의 또 다른 목적이 담긴 섭리의 이해를 통해 녹여낼 것을 권고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괴롭혀서 오랜 행운으로 방종하지 못하도록 하고, 어떤 이들은 시련으로 고통 받게 놔두니, 이는 정신의 덕을 인내하는 습관과 훈련으로 단단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고통과 불운을 가한 악한 이들을 증오할 것이 아니라, 외려 자신을 괴롭혀 강인하게 만들려는 신의 섭리를 받아들여 덕을 쌓으라는 의미다.

"최고의 섭리는 악한 자들이 악한 자들을 선하게 만드는 놀라운 결과를 내놓는다. 즉 가장 악한 자들에게 부당한 일들을 당하고 있다고 여길 때, 그들은 스스로 증오하는 저들과 달라지려고 노력하면서, 악덕에 대한 증오로 불타 덕의 성취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일은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일들이 모두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필연의 결합이라는 깨달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즉 자신이 생각하는 어떠한 운명의 혼란도 실은 신의 질서 아래 있다는 믿음이다. 이는 종국에는 "모든 악을 필연이라는 운명의 연결을 통해 쫒아" 낼 수 있다는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당장 나에게 악행을 행한 자가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하며 원망할 일도 아니다. 신의 섭리는 언젠가 "모든 것을 제자리와 제 때에 맞게 배치"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보에티우스가 "악한 것들도 선하게 되는 것은 오직 신의 힘 안에서만 가능" 하다고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수동적 태도를 통해 어떤 슬픔과 불운도 이겨낼 수 있을까? 이는 인간 영혼이 운명의 사슬에 묶이는 것은 아닌가, 인간은 자유로운 의지를 통해 스스로 불운한 운명을 이겨낼 수는 없는 것일까? 보에티우스가 철학의 여신에게 제기하는 운명과 인간의 자유 의지의 문제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논증을 통해 심오한 깨달음을 던지고 있다. 
 
보에티우스는 의문한다. 신의 섭리와 필연에만 의지한다면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 아닌가. 신이 미리 아는 일들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면 인간은 더 이상 어찌 해볼 수 없는 것인가. 인간의 계획과 행동들에는 어떤 자유도 없다는 것인가. 신의 정신이 거짓됨의 오류 없이 그 모든 계획과 행동들을 앞서 내다보면서 하나의 결과로 묶고 제한할 것이니 말이다.

인간의 추론 작용은 신의 예지의 단일성에 미치지 못한다. 철학의 여신은 인간과 신의 능력의 본질적 차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감각은 질료를 넘어서는 것에는 힘을 발휘할 수 없고 심상은 보편적인 종을 통찰하지 못하며 이성은 단일한 형상을 포착하지 못하지만, 이지(理智)는 마치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형상을 파악한 후에 감각이나 심상, 이성은 알 수 없었던 형상 자체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아래에 있는 모든 것 역시 구별한다."

이성은 인간 종에게만 있고, 이지는 오직 신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순수한 필연성의 영역이 아닌 조건적 필연성의 영역에서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판단하고 자신의 행동을 선택한다. 예를 들어 죽을 수밖에 인간의 생명에 대해 인간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걸어간다는 것을 안다면, 그가 걸어간다는 것은 필연적이다'라는 것과 같은 조건적 상황에서 인간의 의지와 능력의 발휘는 제약받지 않는다. 이는 신의 섭리와 필연은 인간의 이성적 선택과 양립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신은 자신의 영원한 현재 안에서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의 예지는 사물들의 본성과 고유성을 변화시키지 않고, 시간 안에서 언젠가 미래의 것들로 일어날, 그러한 현재의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은 의지의 자유로부터 나오는 저 미래의 것들을 현재의 것들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신의 시선과 신의 인식의 힘은 인간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인간이 신 앞에 한 없이 겸손해야 하며 악덕들을 거부하고 덕을 쌓을 것을 권하고 있다. 신은 인간에게 '올바름'의 필연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에티우스가 말하는 신이 기독교적 유일신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심취했던 그리스 철학과 종교적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제우스 신'적인 측면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시가와 산문에 등장하는 신들이 모두 올림포스 12신들인 것을 보면.    

보에티우스는 철학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불운과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 그는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담대히 맞이했을까. 아무튼 자신이 수행했던 그 성찰의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선과 악의 판단에 따른 포상과 징벌은 신의 섭리를 통해 필연적으로 올바르게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보에티우스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철학의 힘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보에티우스처럼 명증한 철학적 논증을 수행할 수는 없다. 그저 그가 죽음 앞에서 자문자답하던 화두들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과 희망을 얻게 될 것 같다.

특히 이 책은 타인의 악행과 자신의 실수로 어그러진 운명으로 고통 받는 이들, 타인과 운명의 여신에게 증오와 원망을 퍼부으며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삶을 차분히 돌아보고 자신을 치유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줄 것 같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철학의 위안》, 보에티우스 지음, 이세운 옮김, 필로소픽(2014).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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