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정광성 기자]“항상 모든 일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아이들이 주인공이고 나는 조연이 되고 싶다.”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의 말이다. 1997년 신혼여행 차갔던 중국에서 처음 탈북자들을 만나 20여년간 탈북청소년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여명학교는 2004년 23개 교회와 탈북자 지원 사업을 하던 사람들이 세운 도시형 대안학교다. 전국 8개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중 유일하게 중고교 학력이 인정된다. 지금까지 모두 7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현재 16∼25세 100여명이 재학 중이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탈북 청소년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70∼80%가 정규교육 과정을 못 끝낸 아이들이다. 10대 후반인데도 한글을 못 깨친 경우도 있다”면서 “북한에 있을 때 식량과 석탄을 구하러 다니느라 공부를 접는 경우는 부지기수이고 학교에 다닌다 해도 댐 도로공사, 농촌 지원 전투에 동원돼 공부를 못 했다”고 조 교감은 말한다.

북에서 온 ‘치와와?’

우리는 두만강가나 백두산 자락에서 만난 탈북자들을 돕기로 했다. 당시 백두산 자락에서는 조선족들이 약초를 재배하고 있었는데 그중 인정 많은 조선족 한 분이 식량을 얻으러 온 탈북자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곤 했다. 하지만 금방 소문이 나 찾아오는 탈북자가 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우리는 산 아랫자락에 자리 잡은 움막에 함께 머물면서 탈북자들의 끼니를 챙기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2시쯤 한 탈북형제가 문을 두드리며 움막으로 들어왔다. 전날 옌볜을 다녀오며 장시간 이동을 했던 나는 조선족과 얘기를 나누는 그의 실루엣과 그가 데려온 작은 짐승을 누운 채로 바라봤다.

잠에 취해 몽롱한 상태여서 뚜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작은 몸뚱이에 앙상한 척추가 살갗 밖으로 드러나 있어서 ‘웬 치와와를 데려왔나’ 싶었다. 피로가 누적돼 있던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 어젯밤 희미한 기억 속에 있던 짐승을 자세히 본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치와와라고 생각했던 동물은 다름 아닌 돼지였다. 어안이 벙벙한 내 표정을 보고 탈북형제는 쑥스러운 듯 두 손을 부비며 말했다.

조 교감은 “그때 나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내 선택으로 인해 북한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인해 어려움을 격는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고소공포증과 밤이 제일 무서운 내가 아이들을 업고 백두산 자락을 오르내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조명숙 교감은 결혼 당시 친정어머니가 선물로 주신 금반지를 되팔아 탈북자들을 돕는 일에 썼다.

조 교감은 “당시 친정어머니가 결혼 선물로 금반지를 사주셨다. 하지만 그 반지를 어머니 몰래 팔아 탈북자들을 돕는 일에 썼다”면서 “지금도 가끔 어머니가 반지에 대해 물어보시는데 그때마다 너무 귀해서 안 끼고 있다고 둘러대곤 한다”고 말했다. 

   
▲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여명학교 조명숙 교감./사진=미디어펜


탈북자를 위해 베트남 경찰에 체포되다.

당시 나는 남편과 함께 수차례 국경을 탐사한 끝에 우리는 다른 국가에 비해 한국인에게 호의적인 베트남을 향해 탈북형제 13명과 함께 떠났다. 육로는 지뢰가 많아 강이 흐르는 국경을 택했는데 거센 물살에 떠내려갈 것 같아 동아줄을 베트남과 중국 쪽 나무에 묶은 뒤 그것을 잡고 건너기로 했다.

중국 쪽에선 남편과 동료 두 사람이, 베트남 쪽에선 다른 동료 한 명이 탈북형제들을 돕기로 했다. 그들이 국경을 넘는 동안 관광객으로 위장해 베트남 국경수비대를 따돌리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잠시 눈을 질끈 감고 나는 국경수비대를 향해 손을 흔든 뒤 숲으로 냅다 뛰었다. 예상은 했지만 5분도 안 돼 뒷덜미를 잡혔다. 국경의 작은 초소에서 신문을 받으면서 시간을 버는 동안 탈북형제들이 무사히 국경을 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탈북형제들은 얼마 가지 못해 국경수비대에 붙잡혔다. 베트남 군인들은 본격적인 신문을 위해 우리를 큰 부대로 이송하려 했다. 진술이 엇갈릴 것에 대비해 오직 나만 영어를 할 줄 안다고 했고 그들은 고민 끝에 나만 큰 부대로 데려갔다.

그렇게 힘든 일도 겪으면서 탈북민들의 아픔을 더 알게 됐고, 그들을 더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 교감은 자신의 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향후 서울에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예쁘고 멋진 학교를 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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