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우현 자유경제원 연구원

“대학 졸업하면 뭐 하고 싶어요?”

“공중파 아나운서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지나치게 넘치던 시절이었다. 돌아보면 부끄러울 따름인 이 장래희망은 한때 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나운서의 ‘아’자만 들어도 가슴 벅차는 소중한 꿈이었다. 욕심이 지나쳐 ‘글도 쓸 줄 아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력서에 넣을 ‘스펙’이 필요했는데 운이 좋게도 대학교 3학년 가을, 한국대학생포럼에서 운영하는 투데이타임즈와 인연이 닿아 ‘대학생 기자’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막상 시작하니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 마감 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성실하게 임했다고 회상하고 싶다.

성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다른 대학생 기자들이 쓴 글을 보며 나도 잘 하고 싶다는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고, 둘째, 사회 이슈에 대한 한국대학생포럼의 시각이 흥미로워 중앙지의 정치면 기사가 재밌어진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명확한 개념은 없었지만, 모든 게 MB탓이라며 MB OUT을 외치는 캠퍼스 내 대자보와 한국대학생포럼의 시각차는 나만의 이슈가 되었다.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세련되게 선동하는 세력 보단 투박하지만 진솔한 후자가 더 마음에 들었다.

▲ ‘청춘 자유주의의 날개를 달다’ 북콘서트

보수 대학생 선언, 한국대학생포럼

집, 학교, 학원밖에 몰랐던 내가 한대포를 만나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마음속에 뚜렷이 남는 분은 이춘근 박사다. 한대포에서 주최하는 ‘국제정치 아카데미’에 투데이타임즈 기자 자격으로 참석하게 됐는데, 그 강의는 컴퓨터 전공인 나에겐 ‘센세이션’이었다. 글자만 봐도 난해함이 느껴지는 ‘국제정치’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셨다. C언어로 이야기하는 강의만 듣다가 미국, 중국, 일본, 한국의 관계에 대해 논하니 눈이 번뜩 뜨였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아카데미 2주차에 발생했던 천안함 사건이다. 장병 46명이 전사해 안쓰럽고 마음이 아플 뿐 그 이면의 것을 들여다보지 못했는데, 박사님은 “이번 사건은 북한의 소행임이 분명하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당시엔 ‘띠로리. 아무리 그래도 북한이 왜?’, ‘어머, 그럼 우리 주적은 북한이 맞는 거? 헉.’ 했다. 남동생이 ROTC 면접에서 “우리의 주적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고, “북한”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엥? 사실이야?” 했던 내 무지함이 떠올랐다. 평범한 대학생이 오른쪽으로 한 발짝 이동한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내 대학생활은 한대포를 논하지 않고 이야기 할 수 없게 되었다.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사건, 무상급식, 반값 등록금 등의 이슈에 대해 때론 분노하고 때론 동감했다. 북한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북한 인권의 현실을 알게 된 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에 감사했다. ‘먼저 가신 분들이 남겨주신 소중한 이 땅에서 마음껏 꿈꾸고 마음껏 행복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한대포 활동에 대한 혼자만의 위기도 있었다. 심각하게 그만 둘 결심을 했다. 장차 공중파 아나운서가 되어야 할 몸인데 이렇게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돌아보면 터무니가 없어 기가 막힐 뿐이지만 이런 결심을 했던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북한인권법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한대포 대표로 나가 발표한 적이 있는데, 언론에 보도도 많이 됐고, 전화가 너무 많이 왔다. 이런 관심은 처음인지라 덜컥 겁이 났다. 최종 면접 때 면접관이 “조우현씨 이력을 살펴보니 보수 성향이네요? 중립을 유지해야 하는 아나운서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순간 난 떨어지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목소리를 낸 건데, 굳이 쫄 필요가 있나 싶어 금세 걱정을 거두었다.

그리고 지나친 기우이었음이 분명한 이유는 오래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저런 질문을 받을 순간, 그러니까 아나운서 최종 면접의 기회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회

“방송인을 꿈꾸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다 방면에 관심을 두고 공부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흥미로운 분야가 정치였습니다. 정치 1번지 국회에서 생생한 경험을 하고 싶습니다.” 포장한 티가 물씬 나는 지원동기지만 진심이었다. 그리고 진심을 존중해준 의원실에서 햇수로 3년을 일했다. 국회의원의 전반적인 의정활동을 지원하는 보좌진의 업무엔 범위가 없었다.

그중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곤란한 일은 ‘전화 받는 일’이었다. 상상 초월의 민원 전화가 빗발친다. “감자 값이 저렴하니 법으로 그 값을 올려 달라”는 규제 요청부터 “우리 지역엔 왜 대학이 없는지? 대학 설립 추진해라”까지, 무리한 민원들이었다. “된다.”, “안 된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검토하겠습니다.”라고 답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이건 내 진짜 마음이 아닌지라 “검토해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는 이도 저도 아닌 마무리로 전화를 끊곤 했다. 이런 요청에 대한 응답이 ‘표’로 직결되기 때문에 포퓰리즘이 발생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국회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상임위나 국정감사를 통해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일이다. 따라서 보좌진의 주요 업무도 상임위에 필요한 질의서를 작성하는 일인데, 정부의 업무를 분석해 주제를 정한 뒤 현안, 문제점, 개선방안으로 나누어 작성한다. 그리고 간혹 이 개선방안이 규제를 유발하는 경우가 생긴다.

공기업 방만 경영을 예로 들면, 공기업 부채가 많은 것은 현황이고, 왜 많은지에 대해 분석한 것이 문제점이다. 이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것으로 끝나는 질의서도 있고, “방만 경영을 좌시할 수 없다. 임원들이 돈을 못 쓰게 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 라고 대안을 제시해주는 질의서가 있다. 보통 잘 쓰였다고 일컬어지는 질의서는 개선방안이 법안발의로 이어지는 것인데, ‘돈을 이만큼만 쓸 수 있도록 제안하겠다’는 식의 규제 강화 법안이 많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국민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지만, 욕심이 과해 불필요한 규제를 만드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규제완화를 부르짖던 내가 핀란드가 규제를 통해 국민들의 소금 섭취량을 줄인 기사를 보고, 우리나라 국민들도 소금 섭취량이 많은데 이를 줄일 수 있는 법안을 만드는 건 어떨까, 하는 위험한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법안으로 만들어도 발의될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상상만으로 끝내는 자제력을 발휘해 천만 다행이다. 평소 자유주의, 규제 완화가 옳다고 주장하는 나도 목적에 눈이 멀어 이런 생각을 했는데, 상당수의 법안이 발의를 위한 발의를 위해 만들어 지는 건 아닌지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걱정을 하게 됐다.

존중, 자유주의의 또 다른 말

존중

난 이렇게 살다 죽을게
넌 그렇게 살다 죽으렴

주철환씨가 지은, 내가 너무나 아끼는 시 중 하나다. 저자는 깊이 생각하고 굳게 결심했다면 밀고 나가라, 남의 삶에 끼어들지 말자, 라는 취지로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허나 난 이 시에서 ‘자유’를 보았다. 자유주의의 또 다른 말은 존중이 아닐까?

가끔 친구들이 “네가 말하는 그 자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물을 때가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난 지체 없이 “하이에크, 프리드먼도 결국 ‘됐으니까 알아서 잘 살자. 오키?’라고 얘기하는 거야. 그게 자유지 뭐”라고 대답하곤 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도덕적 범위 내에서 알아서 잘 사는 게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자유가 소중하듯 타인의 자유도 소중하니 서로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정치적 자유, 언론의 자유, 경제적 자유, 소비자 선택의 자유, 이 모든 이면엔 존중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경제적 자유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 대형마트 영업시간 제한이 대표적인 예다. 이것은 대형마트, 골목상권, 소비자, 그 누구도 존중 받지 못한 정책이었다.

말도 안 되는 정책이 판을 치는 이 시점에 자유주의 영역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배울 것이 더 많기에 거창한 욕심을 부리기는 이르지만, 많이 보고 듣고 내 것으로 만들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자유주의자가 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에 공감해주길 바란다.

[원문 저작권은 저작권법에 의하여 (재)자유경제원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복제 및 무단 전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