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명 연예스포츠팀장
[미디어펜=석명 연예스포츠팀장] 2002 한일월드컵 4강신화를 이끈 '반지의 제왕' 안정환, 각각 '농구대통령'과 '국보센터'로 불렸던 허재와 서장훈, 골프 명예의 전당에 오른 '골프여제' 박세리, 메이저리그 한국인 최다승 투수 박찬호와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2개나 가진 김병현, 옥타곤을 주름잡던 UFC 파이터 '스턴건' 김동현.

한국 스포츠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대단한 스타들이다. 요즘 이들의 모습은 TV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익숙했던 스포츠 현장이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연륜과 세월의 옷을 입은 이들이 보다 친근한 모습으로 팬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각자 캐릭터도 다양하고 개성이 넘친다. 2002 월드컵에서 결승골을 넣고 반지 키스를 날렸던 안정환은 훈남 외모는 그대로인 채 유려한 말솜씨와 안정된 진행 능력을 발휘, 프로 방송인으로 자리잡아 여러 프로그램을 이끈다. 

서장훈은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과 인맥으로 방송국을 섭렵하고 있으며 '여장'을 하고 망가지는 것도 불사하는 등 예능감을 폭발시키고 있다.

   
▲ 사진=KBC 조이 '무엇이든 물어보살' 방송 캡처


'이게 불낙(블록슛)이야?' 유행어의 주인공 허재는 버럭 캐릭터를 잘 녹여내며 방송 출연이 잦아지더니 두 아들(허웅 허훈)까지 예능에 입문시켰다. 

소탈한 성격과 '먹방'으로 거리감이 더 가까워진 박세리, '투 머치 토커' 이미지와 주변 사람 챙기는 데 일가견을 보이는 박찬호, 엉뚱발랄 매력으로 '법규형의 재발견'을 보여준 김병현, 어떻게 그 험한 파이터 세계에서 견뎠을까 싶을 정도로 허당미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김동현.

예능 프로그램이 이런 치트키 스포츠 스타들을 모셔가지 않을 수 없다.

스포츠 스타들의 방송 진출이 러시를 이루다 보니 대세가 된 흐름에 동참하는 후발 주자들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특히 JTBC 예능 '뭉쳐야 찬다'와 '뭉쳐야 쏜다'의 경우 컨셉트 자체를 전현직 스포츠 스타들을 모아 축구, 농구를 함께 하는 것이다 보니 방송계 진출 주요 등용문이 됐다. 양준혁(야구), 이형택(테니스), 여홍철(체조), 김요한(배구), 박태환(수영), 모태범(빙속), 이대훈(태권도) 등 숱한 프로 스포츠 스타나 국가대표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더욱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 사진=JTBC '뭉쳐야 찬다' 방송 캡처


최근에는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을 통해 2002 월드컵 주역들이 대거 등장했고, 남현희(펜싱) 박승희(빙속) 등도 눈도장을 찍었다.  

준비된 예비 방송인 스포츠 스타들도 있다. 도쿄올림픽에서 최고의 감동을 선사했던 '배구여제' 김연경은 '식빵언니' 캐릭터를 진작에 구축해 현역이면서도 방송 출연을 많이 해온 편이다. 이번 올림픽을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한 김연경은 선수 유니폼을 벗으면 방송 일을 해보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도쿄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전 금메달을 딴 이른바 '어펜져스' 멤버인 김준호는 본격적인 방송 활동을 준비하기 위해 매니지먼트사와 계약을 맺기도 했다.

대세가 된 스포츠 스타들의 방송계 진출, 어떻게 봐야 할까.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자신의 종목에서 열정을 불태웠던 스포츠 스타들이 승부 세계에서 갈고닦은 생존 본능을 '정글'에 비유되는 예능에서 마음껏 발산한다. 이런 모습들이 시청자들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또한 '부캐 전성시대'다. 재주(또는 끼)가 없으면 모를까, 운동도 잘 하지만 남들 앞에 나서서 뭔가를 보여주는 데도 능하다면 자신의 능력 발휘를 하면서 새로운 분야에서도 얼마든지 빛을 낼 수 있다.

천하장사에 오르며 씨름판을 평정했던 강호동이 일찌감치 방송계에 뛰어들어 톱 예능인으로 자리잡았던 무렵, 스포츠 스타들의 방송 진출 붐이 일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성공한 예가 별로 없었다. 괜히 분위기에 편승해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섣불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새로움으로 반짝 주목 받은 후엔 밑천이 드러나며 방송계를 떠난 이들도 많았다.

시대가 바뀌었다. 지상파 TV밖에 없던 과거와는 다르다. 종합편성채널과 케이블 TV에서 다양한 포맷의 예능 프로그램이 차고 넘친다. 좀더 접근이 쉬운 유튜브라는 무한확산 가능 플랫폼도 있다. 스포츠를 통해 얼굴이 알려지고, 이미 인기를 등에 업고 있는 스타라면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방송 일을 시작할 여건이 마련돼 있다. 앞으로 스포츠 쪽에서 방송 쪽으로 활동 영역을 옮기거나 넓히려는 움직임은 더욱 대세를 이룰 전망이다.

   
▲ 사진=MBC '나혼자 산다' 방송 캡처


다만, 걱정되는 측면이 있다. 스포츠계에서 보자면 재능 있는 인재의 유출이다. 예전 같으면 선수 생활 열심히 해 그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은퇴를 하면 지도자나 스포츠 행정가가 돼 후진을 양성하고 측면 지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좋은 선수가 꼭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고의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과정과 훈련법, 심리상태 등을 겪어본 '선출'(선수출신)이 지도자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추고 훌륭한 스승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해당 종목에서 이름을 날리고, 국가대표가 되고, 최고 스타가 된 선수들이 지도자 대신 방송 쪽 일을 선택해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고 때론 망가진 모습을 보이며 쉽게 인기와 부를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스포츠와 방송 쪽 일을 병행하면서도 균형감 있게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선배들을 롤 모델로 삼는 후배들도 점점 늘어날 것이고, 실제 그런 추세다.

대세는 거스를 수 없다지만 이런 참견쯤은 해보고 싶다. 개그맨 박영진의 유행어를 빌리자면 '소는 누가 키워~'다. 소가 필요없는 세상이라면 모를까, 누군가는 소를 잘 키워야 한다.

좋은 지도자가 많이 있어야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오고, 좋은 선수들이 스타가 돼 이후 좋은 방송인이 되는 것이 선순환(?) 구조다. '좋은 지도자'도 분명 이런 구조에서 빠질 수 없는 한 축이라는 점을 누군가는 명심했으면 한다.
[미디어펜=석명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