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
국민의힘이 '보수 기득권' 세력의 집합이라는 지적에 이의가 없습니다. 또 민주당이 '진보 기득권'의 중심이라는 지적에도 동의합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진보와 기득권이라는 단어를 연결하는 자체가 형용모순이었는데 격세지감입니다. 

진보를 표방한 정치세력의 집권 15년이 가져 온 변화입니다. 이들 진보 정치세력의 중심에는 386이라는 불리는 민주화운동 그룹이 포진해 있습니다. 대부분 운동권이라는 훈장을 달고 정치권에 입문한 386 세대 리더들이 사회변혁을 이끌어 온지도 벌써 30년이 됐습니다. 그들은 대통령만 빼고는 힘있는 모든 공직을 차지했고 지금은 정치, 시민사회, 경제, 문화, 노동 부문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한다'는 기득권의 본령에 충분히 적응했고 충직해진 듯 보입니다. 하기는 60세 전후의 자연연령을 감안하면 기득권을 향유한다고 누가 손가락질하겠습니까? 또 대각선에 위치한 사람들이 같은 처지라 지적할 사람도 찾기 힘든 형편입니다.

사실 진보세력의 기득권화에 대한 의미있는 경고음은 핵심세력에서 비져나왔습니다. 국회뿐 아니라 행정부에서도 가장 유능한 진보 정치인으로 손꼽았던 김기식 전 민주당 국회의원은 문재인정부 조각(組閣)이 한창인 2018년 초 '가장 큰 적폐는 기득권이다'라는 기고문으로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컬럼에서 "무엇보다 필자를 포함한 기성세대의 기득권은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강력하다."고 꿰뚫어 봅니다. 이어 "기득권의 혁파 없이 변화와 혁신이 성공한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기득권 혁파는 매우 위험하고,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성공적 정치를 위해서는 기득권의 혁파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김기식의 주장은 "자해하지 말자"는 진영논리에 함몰되지만 진보정치가 풀지 못한 테제로 지금껏 숨쉬고 있습니다.

당시 김기식의 주장에 화들짝 놀란 중심그룹은 '30대 나이, 19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인 386 리더들이었습니다. 이들 386 리더들은 자기희생과 이타적 헌신이라는 고결한 결기가 있었습니다.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시민운동을 주도하며 때론 목숨을 잃는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진행된 '경제 대전환 국가인재 발표식'에 참석 축사를 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

386 리더들에게 김기식의 주장은 뜬금없었습니다. 들판에서 외치는 소리가 아니라 광장과 의사당을 차지하고 그동안 듣는 이가 없어 외로웠던 주의(主義)를 실천할 힘을 갖게 됐기에 "다된 밥에 재뿌리는 행동"이자 소영웅주의에 불과했습니다. 

386세대 리더들은 정치, 사회 엘리트로 올라서면서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보수 기득권 세력과는 다를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약육강식 불공정 불공평을 훼파하고 위험은 분담하며 열매는 나누어 사람다운 삶을 유지하는 세상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들이 감옥에서, 또 끌려갔던 전방의 초소에서 신념으로 내면화했던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박수치며 표로 돈으로 후원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최소한, 그들이 집권하며 다를 것이라는 기대는 내가 국회의원이 아니더라도, 내가 장관이 아니더라도, 내가 시장이 아니더라도 현실의 고통을 버티는 진통제와 같았습니다. 동일한 꿈을 배태했기에 내일의 해가 떠오르기만 기대했던 지난 세월이었습니다. 

세 번의 집권을 통해 386 리더들은 대한민국 중심 엘리트가 됐습니다. 대한민국의 심장이라는 청와대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했고, 국무총리와 장관을 꿰차고 행정부를 쥐락펴락했습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거친 인사들은 수백 명을 헤아리고 선출직에서 밀려나면 공공기관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강산은 여러 번 바뀌었는데 우리네 삶의 팍팍함은 더해갔습니다. 부동산은 인생의 목표로 변질됐고 자본주의의 병폐는 보수정권과의 차별성을 상실케 했습니다. 특히 그들의 토대였던 우리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지금의 삶은 지옥처럼 변했습니다.

386세대 리더십에 경종을 울려온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의 저서 '불평등의 세대―누가 한국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들었는가' 이렇게 묻습니다. "왜 우리는 386 세대와 함께, 그들의 리더들을 따라 30여 년에 이르는 민주화 여정을 거쳤음에도, 우리의 아이들과 청년들은 더 끔찍한 입시 지옥과 취업 전쟁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고 있는가? 왜 민주주의는 공고화되었는데, 우리 사회의 위계 구조는 더 '잔인한 계층화의 착취의 기제'들을 발달시켜 왔는가? 386 세대 자신들의 자식들은 이 경쟁 체제를 뚫고 상층에 진입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인가? 혹은, 그러한 경쟁 자체도 필요 없을 정도로 충분한 자산을 이미 축적해놓은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자답합니다. "그것은 386 세대 리더들의 약속위반 때문이다. 이 땅에 민주화를 가져온 386 세대가 한국 사회의 리더가 되면 조금 달라지겠지 하고 기대했던, 나를 비롯한 아랫세대들이 아둔했던 셈이다."

이제 386은 늙어 586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의 곳곳에 독과점 이익공동체가 되어 존재합니다. 청와대, 국회, 장관실, 이사장실, 감사실, 시장실을 네트워크로 엮는 거대한 리바이던으로 자본주의 세상의 희생자들을 독식합니다. 게토화된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정체와도 손잡을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철승 교수는 386세대의 두 번째 '희생'이 필요하다고 진단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문재인정부 핵심인 민주당 김종민 의원의 '586 용퇴론'은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재선 의원으로 586세대인 김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이 정치 바꾸지 못할 거 같으면 그만두고 후배들에게 물려주든지, 정치 계속 하려면 이 정치를 확 바꿔야 하는것 아닌가"라고 적었습니다. 

김 의원은 "386 정치가 민주화 운동의 열망을 안고 정치에 뛰어든지 30년이다. 그동안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하고, 청와대 일도 했다. 그러나 그 30년 동안 대기업 중소기업 임금격차가 80%에서 50%대로 더 악화됐다. 출산율은 세계최저다. 총체적 민생 위기다. 민주주의 제대로 하면 민생이 좋아지는게 근대시민혁명 이후 200년 역사의 예외없는 법칙이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못한 것"이라고 반성했습니다.

김 의원의 자기반성에 한 마디를 거들면, 역사에서 기득권 세력 스스로 개혁하거나 물러난 성공사례를 찾기 힘들다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선거보다 정치사적 의미를 갖는 386 리더들의 행보에 눈길이 쏠립니다.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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