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셨지요? 권력의 이행과정에서 밉보인 장군이 아내와 자식을 잃고 검투사가 되어 복수하는 과정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여기에 권력의 야만성 묘사는 영화 이상의 그 무엇을 가슴에 남깁니다. 러셀 크로우의 인생역작이자 아카데미상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상을 거머쥔 2009년 작품인 '글래디에이터'의 첫 장면은 안개로 시작합니다. 

서기 180년 경 미지의 땅인 갈리아로 출정한 로마군이 안개 자욱한 숲속에서 게르만족을 맞아 피가 흥건한 싸움 끝에 승리합니다. 그리고 인생 황혼기의 황제는 온갖 피로가 몰려든 얼굴로 총명하고 용맹한 막시무스 장군(러셀 크로우)을 불러 양위의 뜻을 전하면서 비극을 예고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황제의 모델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입니다. 로마 16번 째 황제로 내치와 외치에 모두 성공한 드문 황제여서 소위 율리시스 카이사르 등과 함께 5현제(賢帝)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여기에 스토아철학을 완성한 인물로 추앙되는 그의 저서 명상록은 지금도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정치사적 업적도 크게 상찬됩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최초로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나누는 시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161년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가 사망하자 40세의 나이로 황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전임 황제의 법적 장남으로 정통성을 확보했고 후계자 시절 자질을 인정받은 터라 승계에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법적 동생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공동 황제가 되기를 희망했고 관철시켰습니다. 

로마 역사상 처음인 공동 황제의 탄생이자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권력 나누기였습니다. 문건에 따르면 이 무렵 로마는 대내외적 난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속주인 브리타니아(영국)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라인 강을 넘은 게르만족을 막을 전력이 부족했습니다. 

수도인 로마의 젖줄인 테베 강은 홍수로 범람했고 지중해 주변 지진과 가뭄은 막심한 경제적 피해와 민심을 이반시켰습니다. 여기에 서아시아와 인도의 제국들이 뭉치더니 로마 지배령인 시리아를 침입해 사면초가를 이뤘습니다.

   
▲ 권력의 야만성과 동시에 진정한 권력 나누기를 보여준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한 장면. /사진=글래디에이터 스틸컷.

이런 시기에 황제가 두 명인 것이 난국을 풀어가는 도깨비 방망이로 보였습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서부 전선으로 달려갔고, 동생인 루키우스 황제는 동부 전선으로 나아가 전란을 진압했으니 말입니다. 

승리 후에는 황제의 불가침 권리인 개선행진을 함께 할 정도로 진정한 권력 나누기를 실천했습니다. 이러한 진정성에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보다 친밀한 교육과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장 존귀한 권력인 로마 황제 자리를 나누기 위해서는 태생적 신뢰가 필요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는 어려서부터 공동으로 황제교육을 받았습니다. 선제(先帝)인 안토니우스 피우스는 자신의 아들이 사망해 후계자가 부재한 상황에 몰리자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를 황자(皇子)로 입적해 친아들처럼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러니까 두 명의 후계자가 함께 살면서 공동으로 황제교육을 받은 셈입니다. 이후 9살 차이인 두 사람은 황제의 배려아래 착실한 공직 경험을 쌓았고 누가 황위에 올라도 될 만한 역량을 키웠던 겁니다.

성공적으로 보였던 '권력 나누기'는 169년 루키우스의 죽음으로 짧은 성공의 막을 내립니다. 루키우스 황제가 외지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하자 대신할 인물이 없었습니다. 이제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부실한 몸을 이끌고 동분서주하는 고난의 행군에 돌입했습니다. 

제국 로마의 엄청난 행정과 라인강과 브리타니안에 이르는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의 방어에 아우렐리우스 홀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의 이러한 초인적 헌신은 부실한 몸을 사지로 몰았고 180년 아직 변방의 싸움터였던 빈도보나, 지금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하는 결말에 이릅니다.

권력을 나누려했던 아우렐리우스와 달리 아들이자 후계자는 권력 지키기에 전념합니다. 아버지만한 존경과 능력이 부재했던 차기 황제 코모두스(Commodus, 재위 기간 177~192년)는 아버지에 비견되는 자신의 능력을 알았기에 황위를 지키기 위해 철저한 포퓰리즘으로 치세에 나서게 됩니다.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황제였던 코모두스는 명색뿐 이지만 16세에 아버지에 의해 공동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후계자 지위를 보장하려던 아버지의 배려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그늘막이 사라지자 코모두스의 민낯이 들어납니다. 특히 친누나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난 후 권력의 화신으로 돌변해 각종 기행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특히 영화처럼 검투사로 변신하는 모습은 코모두스의 진면목입니다.

검투사로 735번의 싸움을 벌인 코모두스는 모두 승리하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물론 기적 뒤편에는 사전에 상대 검투사를 약물이나 상처로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인간적 준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행을 통해 코모두스는 아버지와 비교하는 원로원 꼰대들의 비웃음을 이겨내고 로마 시민들의 인기를 얻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보편적 진리인 포퓰리즘은 오래갈 수 없음도 입증했습니다. 헤라클레스처럼 사자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카리스마를 가장하고 한순간 로마 시민들의 박수를 받아냈지만 종말에 이르렀습니다. 코모두스는 서기 192년 12월 31일 암살당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검술 지도사에게 당했으니 아니러니 합니다.

이후 역사는 변방의 장군 5 명이 번갈아 황제를 칭하다가 로마가 망했음을 기록합니다. 무엇보다 영화같이 드라마틱한 역사는 권력 나누기의 성공을 위한 전제조건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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