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지적 거인' 복거일 선생의 지식 탐구에는 끝이 없다. 소설과 시, 수필 등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칼럼과 강연 등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지적 여정은 문학과 역사를 뛰어넘는다. 우주와 행성탐구 등 과학탐구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의 고수다. 복거일 선생은 이 시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창달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장경제 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암 투병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 그의 창작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지금 '세계사 인물기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자유경제원에서 연재 중인 복거일 선생의 <세계사 인물기행>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복거일 선생의 정신적 세계를 마음껏 유영하면서 지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이 연재는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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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거일 소설가 |
지방자치제가 시행된 지 이제 꽤 오래됐다. 그러나 그 결과는 상당히 실망스러우니, 낭비와 부패로 어려움을 겪지 않는 자치 단체들이 드물다. 지방자치제가 제대로 자리 잡는 데는 시일이 오래걸리리라는 점과 지방 자치 단체들이 중앙 정부보다 아무래도 덜 효율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실망은 작지 않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지방 자치 단체들의 수익 사업들이 대부분 큰 손실을 보고 중단됐다는 사실이다. 그런 실패에서 나온 사회적 낭비는 상당히 크다. 원래 정부 기업들이 민간 기업들보다 훨씬 비효율적이라는 사정을 생각하며, 그런 실패는 놀랍지 않다. 놀라운 것은 그런 실패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수익 사업이 장애를 만나 한번 실패하면, 그 사업은 내버려지고, 한번 내버려지면, 누구도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은 많은 개인 기업가들이 거듭된 좌절들을 딛고 일어서는 것과 또렷한 대조를 보인다. 사람의 수명은 한정됐지만 정부 기관들은 영속되는 것으로 여겨지므로, 정부가 벌이는 공공 사업들은 오랫동안 꾸준히 추진되는 것으로 흔히 여겨진다.
현실은 전혀 다르다. 자리를 자주 옮기는 터라, 관료들은 개인 기업가들이 자신들의 사업에 쏟는 열정과 끈기를 정부 사업에 쏟을 마음도 없고, 설령 사업의 성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그런 노력에 대한 보상을 거의 받지 못한다. 그래서 정부 사업은, 한번 어려움을 맞으면, 투자가 부진하게 되고 멀지 않아 버려진다.
동양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던 중국 정화(鄭和, 1371~1435?)의 '남해(南海) 대원정'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명(明) 성조(成祖)의 환관이었던 정화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27년 동안 대함대를 이끌고 일곱차례나 동남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페르시아를 항해했다.
그의 함대의 분견대는 아프리카 동해안 케냐의 말린디(Malindi)까지 갔었다.(말린디는 아프리카 동행안의 교역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온 항구인데,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가 인도로 가는 길에 들렀다. 그는 이곳에서 인도양을 건너는 뱃길을 안내할 파일럿을 구했다.)
정화의 함대는 승무원이 약 27,000명 안팎에 대형 선박들만도 60여 척이었으니, 당시로선 보기 힘든 대함대였다. 1492년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 1451~1506)의 항해에선 배 3척에 120명의 승무원들이 탔고,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해에선 배 4척에 170명이 탔고, 1519년 마젤란(Fernando de Magalhaes, 1480~1521)의 세계 일주에선 배 5척에 265명의 승무원들이 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화의 대함대가 얼마나 웅장했었나 잘 드러난다.
그렇게 규모가 큰 해상 원정은 당연히 중국의 위세를 해외에 크게 떨쳤고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중국 사이의 교역을 증진시켰다. 그러나 정화의 대화정은 일회성 사건으로 끝났고 장기적으로는 역사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정화의 함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작았던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가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그 점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어째서 정화의 대원정은 그렇게 불모의 사업이었나?
중세에 사라센 제국이 융성하면서, 회교도 상인들은 동양으로 진출했다. 대식국(大食國)이라 불린 사라센 제국의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고려까지 찾아온 것은 널리 알려졌다. 역사상 가장 큰 제국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몽골 제국이 서자, 동서양 사이의 교역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명이 들어서자, 사정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명은 민간인들의 대외 무역을 금지하고, 무역을 정부의 조공 무역에 국한시켰다.
그리고 해금령(海禁令)을 내려, 바닷가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엄격히 통제했다. 자연히, 동서양 사이의 교역을 활기를 잃었다. 이런 환경에서 나왔으므로, 정화의 대원정은 주로 정치적 목적을 지녔었고 민간인들에 의한 교역이라는 경제적 바탕이 없었다.
명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는 몽골족들을 막는데 힘을 쓰게 되자, 정화의 대원정은 갑작스럽게 끝났고 다른 해외 원정들로 이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민간인들의 해외 교역이 금지된 터라, 그뒤를 민간 무역이 이을 수도 없었다.
반면에, 동양으로 진출한 서양 세력은 주로 개인들에 의해 주도됐고 늘 경제적 이득을 추구했다. 자연히, 그들은 과감했고 끈기가 있었다. 그래서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밀려오기 반세기 전에 나온 정화의 대원정은 동양 세력의 확산에 기여하지 못한 채, 아쉬운 일화로 끝나고 말았다. 대신 서양 세력이 거세게 동양을 침범했다.
정화의 대원정이 주는 교훈을 또렷하다. 개인들의 열정과 끈기에 의해 떠받쳐지지 않은 채, 정부가 주도하는 사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먹고 살기 위해서든, 큰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든, 악착같이 돈을 벌려는 개인들만이 사업에 필요한 열정과 꾀와 끈기를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시장 경제의 원칙에 따라, 정부는 스스로 사업들을 벌이기보다는 개인들이 사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정화는 운남성(雲南省) 곤양(昆陽)에서 이슬람 교도인 색목인(色目人)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일족은 그의 증조할아버지 때 원 제국의 색목인 우대 정책에 입입어 중국으로 이주했었다. 그의 일족의 성은 '무하마드'의 음역인 마(馬)였고, 그의 본 이름도 마화(馬和)였다. 정(鄭)이란 성은 뒷날 성조가 그에게 하사한 것이다.
정화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운남 지방은 명(明)이 점령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명군의 포로가 되어 거세를 당했고, 열네 살 때 뒷날 성조가 된 연왕(燕王)의 환관이 되었다. 그는 연왕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웠고, 토목과 건축을 관장하는 아문인 내관감(內官監)의 장인태감(掌印太監)이 되었다.
정화는 대원정 사업에 일생을 바치고, 아마도 그 사업에서 얻은 여독으로 죽었을 것이다. 그가 죽은 원인, 시기, 장소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마지막 원정 과정에서 인도의 캘리컷에서 죽었다는 설에서 무사히 돌아와서 죽었다는 설까지 여러 설들이 분분하다. 그의 삶에서 마지막 부분이 그렇게 흐릿한 것은 그가 이끈 엄청난 사업이 역사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