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킬링 로맨스'(Killing romance)는 참 흥미로운 타이틀이다. 먼저 죽여주는 로맨스로 읽힌 다음, 로맨스를 죽이는 작업으로 번역을 시도케 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둘 다 가능한 해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작품은 요상한 로맨스를 보여주고 나서, 로맨스 파괴를 통해 재기발랄한 장르적 변주를 완성한다.

로맨스의 주인공은 섬나라 재벌 조나단 나(이선균)와 톱스타 황여래다. 기분 좋은 에너지와 산뜻한 미소로 십수 년간 미디어와 대중을 사로잡았지만, 희대의 발연기로 전 국민의 웃음거리가 된 여래. 인생 처음 그가 한 선택은 남태평양의 콸라 섬으로 훌쩍 떠나는 것이었다. 

그는 섬에서 운명처럼 만난 조나단과 결혼한 뒤 은퇴를 선언하지만, 조나단의 사업 확장을 위한 인형 역할이 되어버린 삶에 염증을 느끼고 복귀 계획을 세운다. 조나단은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동원해 이를 철저하게 막는다. 결국 여래는 남편을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여래의 오랜 팬이자 옆집 이웃인 범우(공명)와 공조해 치밀한(?) 살인 계획을 세운다.


   
▲ 사진=영화 '킬링 로맨스' 스틸컷


영화는 텍스트로만 마주하면 너무나도 잔혹한 '남편 죽이기'의 과정을 신선하게 비틀어 웃음의 동력원으로 활용한다. 코미디의 장르적 공식을 따르되 로맨스, 서스펜스, 드라마 등 다양한 변주를 통해 관객들을 지루할 새 없게 한다.

'킬링 로맨스'는 남편을 죽이는 이야기로 은유된 '알 깨고 나오기'의 우화이기도 하다. 수동적으로 자신을 전시시켰던 톱스타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택한 여행이 여래를 결혼으로 이끌고, 여래는 다시금 신화적 인물에게 좌지우지되며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된다. 이 시점 자신을 여전한 뮤즈로 찬양하는 범우로부터 용기를 얻은 여래는, 비로소 변화에 대한 의지를 품게 된다.


   
▲ 사진=영화 '킬링 로맨스' 스틸컷


영화에 트로피 와이프, 가스라이팅, 데이트폭력 등의 소재가 등장하긴 하나 성 이데올로기를 전면에서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죽여주는 로맨스'라는 풍자적 타이틀에서 비치듯 조나단과 여래의 관계가 아주 보편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거창한 주제의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아의 현실적 고민에 만화적 상상력을 가미해 기필코 관객들을 웃기겠다는 치열함만이 역력하다.

이 과정에서 이원석 감독이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은 매우 세련되고 간결하다. 영화는 말맛과 운율을 살린 대사, 황홀한 미장센, 뮤지컬영화를 보는 듯 다채로운 배경음악 등 다양한 요소로 관객들을 주목시키면서도 신과 신 사이 여백을 구구절절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가령 범우가 대포폰을 개통하는 절차, 사우나에서 위장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된 과정, 땅콩을 구해오는 모습 등 이야기에 불필요한 요소는 과감히 생략해 속도감 있는 전개와 잘 짜인 코미디에 집중한다. 새삼 치밀한 이야기꾼의 재능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킬링 로맨스'의 가장 큰 매력은 시각적 스타일에 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감독 웨스 앤더슨)을 연상케 하는 세트장은 독창적인 인공미와 조형미로 찬란하고, 이러한 무대들은 모두 조나단의 사회적 위치를 실감케 하는 설정이기에 이질감을 축소시킨다. 여기에 강렬한 색채감과 변화무쌍한 앵글 전환이 더해져 107분간 관객들을 상쾌한 롤러코스터에 태운다. 잘 만든 예술광고를 한 편으로 이어놓은 듯 시각적 쾌미가 상당하다.

오락성과 예술성 모두 취한 작품이 오랜만에 나왔다. 한국의 웨스 앤더슨이 펴낸,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한국영화 침체기 속 관객들에게 감히 추천하고 싶다.


   
▲ 사진=영화 '킬링 로맨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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