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투기자본이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을 공격하면서 경영권 분쟁으로 확산된 '삼성물산' 분쟁이 막을 내렸다. 외국의 행동주의 펀드가 국내 최대 재벌 그룹의 핵심 의사결정에 개입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시도였다. 이번 분쟁의 결과에 따라 벌처펀드(Vulture fund)가 한국 주식시장에 활개를 칠 수 있는 계기가 될 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번 계기를 통해 한국 재벌들은 어떤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는지, 한국 정부와 기관투자자들은 어떤 방침을 세울지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하는 반면교사가 됐다. 엘리엇과 삼성분쟁이 주는 교훈을 곱씹어 보고 글로벌 스탠다드의 허상에서 벗어나 한국판 스탠다드의 오늘과 내일을 고민해본다. <편집자주> |
[미디어펜=김재현기자] 엘리엇-삼성간 분쟁은 일단락됐다. 통합삼성물산이 탄생했다. 주주 표심은 삼성측에 손을 들었다.
외국계 투기자본인 엘리엇의 무차별한 공격에 뜨끔했던 삼성은 막판 주주들의 환심 얻기에 주력하면서 합병 찬성을 얻어냈다는 분석이다. 다만, 국민연금 등 국내 기관투자자들의 찬성표를 제외해보면 외국계 (실질)대주주와 소액주주의 반대표가 만만치 않아 막상막하의 표심대결이었다는 일부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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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7일 17일 오전 서초구 양재동 aT센터 5층 회의장에서 삼성물산 주주총회가 개회된 가운데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의 건이 통과됐다. 사진은 주총 시작 전 주주들의 위임장 확인을 하고 있는 모습/미디어펜=홍정수 기자 |
엘리엇은 앞으로 합병 무효 소송 등 법적 다툼을 예고하고 있어 삼성물산 통합 분쟁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나온다. 이와 함께 외국계 투기자본이 한국기업의 주식을 매입하면서 제2의, 제3의 분쟁이 예상된다.
그간 삼성측의 속앓이는 말이 아니었다. 엘리엇 방어에 전사적인 대응 때문에 경영은 손을 놔야 할 지경이었다. 엘리엇의 추후 행각을 지켜볼 심산이지만 대응 셈법에 골머리를 치룰 예정이다.
일단 엘리엇 방어에 성공했지만 산 넘어 산이다. 당장 주가방어가 시급하다. 합병안 통과 이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주가가 10% 가량 폭락했다. 여기에 하락세가 지속된다면 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권 행사가 나설 수 있다.
작년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이 주식매수청구권 때문에 무산된 사례가 있는 만큼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삼성물산은 2004년 이미 영국 연기금인 헤르메스와 일전을 치렀다. 헤르메스는 소버린, 칼 아이칸, 타이거 펀드 등과 마찬가지로 경영간섭을 통해 차익을 실현하고 떠났다.
삼성물산 경영권 분쟁을 일으키며 먹튀로 챙긴 시세차익은 380억원이다. 헤르메스는 삼성물산 최대주주로 삼성저자 지분 매각과 더불어 우선주 소각, 삼성카드 증자 불참 등을 요구하다 갑작스레 보유 지분 전량을 매도했다.
지난 2003년 소버린은 SK 경영권 공격 빌미로 계열사 청산, 경영진 교체, 기업지배구조개선 등 끊임없이 요구해 9000억원 챙겼다. 2006년 아이칸은 KT&G로부 회계장부열람 요구, 부동산 매각, 자사주 소삭, 자회사인 한국인삼공사의 기업공개를 요구하며 15000억원을 챙긴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비록 삼성물산 합병에 고배의 쓴잔을 마셨지만 엘리엇은 외국계 투기자본의 족적을 그대로 따라할 공산이 크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나쁜 것도 아니다. 통합삼성물산은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게 된다. 엘리엇은 삼성물산과 삼성전자를 넘어 그룹 전체에 대해 무시할 수 없는 발언을 할 수 있다.
주식 5%이상 보고서의 '주식보유목적' 난에 명확히 "경영참여 목적"이라고 적어낸 이상 악의적 파트너는 삼성그룹을 집요하게 흔들 수 있다. 삼성 역시 엘리엇을 파트너로 모셔야 하는 운명이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엘리엇은 한국의 법 집행이 엄밀하게 이뤄지는지 지켜볼 것이며 빈틈이 보이면 법적 소송으로 공격적으로 돌아설 것"이라며 "최근 론스타와 만수르가 제기한 것과 같은 투자자 분쟁소송(ISD)로 확산시킬 구실을 찾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엘리엇 같은 행태를 국제 알박기 펀드라고 불리기도 한다. 알박기는 개발사업이 진행될 때 일부 토지를 매입해서 다른 토지 소유자들이 개발업체와 합의한 것에 문제를 제기하며 사업 진행을 막은 뒤 일반 보상가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얻어내는 수법이다.
자신들의 재산권이나 다른 권리가 개발사업 때문에 침해됐다며 거액의 보상을 요구한다. 개발사업을 인질로 자신들의 주머니를 두둑히 하는 것.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간 합병을 반대한 것도 '알박기' 형태다. 지난해까지 엘리엇은 삼성물산 주주명부에 등재되지 않았다. 삼성그룹의 3세 승계 방향이 드러나면서 합병 작업이 물꼬를 트던 올해 3월 경부터 삼성물산 주식을 매집했다.
합병계획 발표 직전까지 공시의무 지분율 5%에 살짝 미치지 못하는 4.95%를 갖다가 합병 발표와 동시에 지분율을 7.12%까지 끌어올리며 제3대 주주로 급부상했다.
분명히 해둘 것은 엘리엇은 처음부터 3세 승계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철학을 가진 주주가 아니다. 그런 철학을 가진 펀드라면 삼성그룹 주식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엇은 오히려 삼성그룹의 승계작업을 볼모로 삼는 '알박기'를 하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주판을 튕긴 투자자로 볼 수 있다.
엘리엇은 삼성과 분쟁 1차전에서 패배했지만 그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소기의 목표달성을 위해서 법적 다툼과 삼성 지배구조의 빈틈을 노리며 재반격을 노릴 것이다. 벌처 펀드(Vulture fund)라는 악명이 달리 붙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소액주주들을 선동해 반 재벌 동맹을 규합한 극단적인 행동을 보인 것은 알박기의 단면을 보여준 사례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글로벌 스탠다드 허상에 뒤쫒다보니 한국은 단기 투지자본이 자유롭게 활약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시장이 됐으며 한국기업들은 경영권 방어 수단을 대부분 사일해 투자동력도 약화됐다"며 "세계경제의 현실을 냉철히 살피면서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을 고려해야 하며 재벌정책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