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상일 기자] 전국을 경악하게 마든 '트렁크 시신' 살인사건의 발단이 단순 오토바이 접촉사고로 인한 '복수극'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났다.

20일 경찰이 발표한 수사 결과에 따르면 애초 피해자 주모(35·여)씨를 살해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주씨를 다른 살인의 '미끼'로 쓰려다 일이 틀어져 애먼 사람을 죽인 꼴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발생 당시에만 해도 면식범이 저지른 치정 살인사건으로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시신이 참혹하게 훼손되고 심지어 불에 타기까지 하는 등 범행수법이 잔인했다는 점에서 범인이 피해자에게 원한을 품고 범행했을 개연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차량에서 나온 지문은 2013년 출소한 절도 등 전과 22범 김일곤(48)을 지목했다.

김씨는 앞서 경기도 일산의 한 대형마트 주차장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 여성을 납치하려다 실패한 사실이 드러났다. 주씨도 마트 주차장에서 차량째 납치됐다.

이때부터 사건의 무게 추는 '강도살인' 쪽으로 옮겨졌다.

   
▲ 트렁크 시신' 살인사건의 발단이 단순 오토바이 접촉사고로 인한 '복수극'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났다. / 사진=YTN캡쳐

그러나 김씨가 경찰에서 털어놓은 범행 동기는 치정 문제도, 금품을 목적으로 한 강도도 아니었다.

이번 사건의 시작은 사소한 접촉사고에서 비롯한 주먹다짐이었다.

김씨는 올 5월 노래방에서 일하는 A씨와 오토바이 접촉사고를 낸 뒤 시비가 붙은 끝에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이 폭행 피해자인데 오히려 가해자로 처벌받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사건을 심리한 재판장에게도 여러 차례 탄원서를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는 경찰에서 "20대 중반으로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사람한테서 모욕적인 언행을 당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김씨는 8월까지 A씨가 일하는 노래방 주변으로 7차례 찾아가 "벌금을 대신 내라"고 요구하며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A씨는 김씨가 '정면승부'를 하기엔 버거운 존재였다.

김씨는 A씨에게 흉기를 들고 찾아가 위협까지 했지만 굴욕만 당했다.

당시 차량에 타고 있던 A씨가 "자신 있으면 (차에) 타라"고 하더니 차에서 내리려 하자 김씨는 흉기를 휘두르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달아난 것이다.

A씨도 동생을 통해 김씨의 집을 알아내는 등 둘은 서로 '쫓고 쫓기는' 관계가 됐다. 김씨는 이 때문에 애초 살던 곳에서 짐을 빼 고시원으로 이사까지 했다.

A씨와 싸움을 벌이면서 김씨는 걷잡을 수 없이 비뚤어졌다. 종이에 1992년부터 자신을 괴롭혔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어느덧 명단에 오른 인물은 28명까지 늘어났다. 물론 A씨와 재판장의 이름도 명단에 올랐다.

복수의 끈을 놓지 못하던 김씨는 마침내 '다른 사람을 미끼로 A씨를 유인해 살해한다'는 살인계획을 세웠다.

우선 여성을 납치하고서 A씨에게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겠다"는 전화를 하게 하고는 여성을 만나러 나온 A씨를 기습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일산에서 한 차례 여성 납치에 실패한 김씨는 이달 9일 충남 아산에서 피해자 주씨를 납치했다.

그러나 주씨가 달아나려 하자 홧김에 주씨를 살해하면서 A씨를 해치겠다는 그의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주씨가 숨져 A씨에 대한 복수도 좌절되자 그는 주씨의 시신에 화풀이했다.

그러나 김씨는 검거되는 순간까지 A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공개수배된 이후 하남에 숨어 있던 김씨는 결국 복수를 하고 자살할 마음을 먹고 버스를 타고 서울 청담동까지 와 성수대교를 걸어서 넘었다.

A씨에 대한 복수를 하고 나서 자신도 죽으려고 개 안락사 약을 얻을 요량으로 성수동의 한 동물병원에 간 김씨는 결국 범행 8일 만에 경찰에게 붙잡혔다.

김씨는 경찰에서 주씨에 대해 "협조만 해줬으면 그런 일(살인)이 없었을 것"이라며 미안한 감정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