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민중·자주적 민족국가·반일에 얽매인 시대의 화석
   
▲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

민족문제연구소가 문제다

1. 백년전쟁? 사실 왜곡한 영상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돌아오는 12월부터 서울 시내 모든 중고교 도서관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을 비치할 계획이라고 밝힌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10월에 이어 다시금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화제의 중심이었던 사연은 이렇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2년 우남 이승만 및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동영상 ‘백년전쟁’을 만들어 배포했고 이를 방영한 시민방송 RTV에게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의 공정성 객관성 및 명예훼손 문제를 지적하며 벌점 5점의 중징계를 2013년 7월에 내린 바 있다.

방심위는 ‘백년전쟁’의 근거 자료가 편향되었고 ‘사실 왜곡’이라고 판단해 관계자들을 징계했지만, RTV는 불복해 행정소송을 냈다. 하지만 2014년 8월 1심에 이어 지난 7월 항소심에서도 RTV는 패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의혹 제기에 그치지 않고 특정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사실을 편집하거나 재구성했다”고 판시하면서 방심위의 제재가 적법했다고 판결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특정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문제를 일으킨 셈이다. 대법원 상고심 심리는 10월 25일 개시되었다.

   
▲ 민족문제연구소의 창립선언문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민족’이다. 유사어로 겨레와 선열을 더하면 16번 언급된다. 사진은 민족문제연구소 1991년 창립선언문.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취지연혁 게시판

2. 민족문제연구소의 정체성

1991년 설립되어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을 기치로 내걸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정기 후원회원만 1만 1500명에 달하는 민족주의 민중사관의 보루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그간 벌인 굵직한 사업은 양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다.

‘친일파 청산하여 민족정기 바로잡자’ 선전전(1995), 한국군과 식민유산 학술행사(1999),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발족(2000), 이승만 흉상건립 반대운동(2000), 미당서정주 기념사업 반대운동(2001), 일제침략 역사왜곡전-평양 인민문화궁전 1개월간 전시 후 기증 ‘북한 전역 순회전시’(2001),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 설치(2003),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통과(2004),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국가귀속에관한특별법 통과(2005), 친일인명사전 발간(2009), 친일독재 미화와 교과서개악을 저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 발족(2011), 역사다큐 백년전쟁 제작(2012) 등이 민족문제연구소의 대표사업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해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하며,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 일제 파시즘 잔재의 청산에 앞장서고 있다”며 스스로를 소개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1991년 2월 27일 반민족문제연구소로 출범했을 당시, 만방에 선포했던 창립선언문을 다음과 같다.

창립선언문

우리 겨레는 반만년 동안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에 맞서 자주를 지키는 자랑스런 역사를 창조해왔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이땅에 미친 제국주의의 총칼은 수천 년 지켜온 주권을 빼앗고 민족혼마저 말살하려 하였다. 온 강토는 제국주의자의 말발굽 아래 무참히 짓밟혔으나 우리 민족은 저들의 노예되기를 거부하고 죽음으로써 민족정신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과 세계 진보적 민중들의 도움으로 가혹한 압제의 사슬을 끊고 마침내 해방의 날을 맞았으나, 반민족범죄자들은 다시 외세와 결탁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누림으로써 자주적 민족국가의 수립은 분단이라는 상처를 안고서 또다른 시련을 겪고 있다.

굴절된 근현대사의 전개가 어찌 외세의 탓뿐이겠는가.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되어야 할 매국, 배족의 무리들이 참회하고 자숙하기는커녕 오히려 반민족적 반민중적 지배구조를 온존시킴에 따라 민족의 정신사는 황폐해지고 기회주의와 타락한 가치만이 현실을 지배하게 되었다. 따라서 친일이라는 문제는 단지 과거의 죽은 사실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살아있는 망령으로, 반드시 청산해야 할 역사적 과제로 제기되는 것이다. 임종국 선생께서 일관되게 이 가증스러운 반민족적 범죄와 싸워 그 내용과 자취를 밝히는 데 평생을 바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 우리 연구소는 선생의 업적을 토대로 하여 민족사의 오점인 친일행위의 구조와 실체를 명백히 드러냄으로써 민족정통성의 회복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는 온갖 반민족적 범죄를 발굴하여 왜곡된 가치구조를 바로세우고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연구소의 출범을 맞아 이 엄숙한 과업을 한가닥 흔들리 없이 힘차게 수행할 것을 다짐하면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뜻 있는 분들의 뜨거운 관심과 애정어린 질책을 바랄 뿐이다.

1991. 2. 27

반민족문제연구소


3. 민족문제연구소가 문제인 이유

민족문제연구소의 창립선언문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민족’이다. 유사어로 겨레와 선열을 더하면 16번 언급된다. 창립선언문을 되뇌어보면, 장엄한 서사체를 구사하는 북한TV 여성 아나운서가 연상된다.

“우리 겨레는 반만년 동안 자주를 지키는”, “수천 년 지켜온 주권”, “민족혼마저 말살”, “민족정신을 수호”, “자주적 민족국가의 수립”,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 “민족의 정신사는 황폐”, “민족정통성의 회복”, “민족의 앞날을 걱정” 등의 단어가 격정적으로 읽힌다.

여기서 전제하고 있는 것은 ‘우리 겨레의 오천년 자주 주권’이 실제하며, 이와 더불어 민족혼 민족정신 민족정통성을 회복하고 그 앞날을 우려한다는 점이다. 이는 뼛속 깊이 민족주의에 기댄 민족문제연구소의 ‘민족’ 나르시즘이다. 하지만 자뻑도 이런 자뻑이 없다. 하나씩 따져보자.

① 민족문제연구소의 기승전 ‘민족’

수천 년 지켜온 주권?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까지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에게 주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권은 통일신라 이후 왕족에게만 있어왔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해왔던 땅이다. 조선시대 백성 중 40%는 아무런 권리가 없고 가축이나 다름없던 노비였다.

주권은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비로소 생겨났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2항에서 밝힌바 그대로다.

더욱이 백성이 아니라 나라의 주권이라 쳐도 삼국시대 신라 백제 고구려와 통일신라, 고려와 조선은 엄연히 다른 나라였다. 지배계층, 인종구성에 있어서 한반도와 만주 각지 이합집산의 산물이었다. 오천년 자주 주권이 실제했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을 신라의 태두 박혁거세, 고려 창업자 왕건이나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물어보라. 오천년간 한반도에는 단일민족만이 존재했나. 참으로 대단한 민족주의다.

   
▲ 민족문제연구소는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해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하며,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 일제 파시즘 잔재의 청산에 앞장서고 있다”며 스스로를 소개한다. 사진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진 홍보배너. /사진=민족문제연구소 홍보자료 게시판

② 1945년 해방의 인과관계 착각

민족문제연구소는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과 세계 진보적 민중들의 도움으로 가혹한 압제의 사슬을 끊고 마침내 해방의 날을 맞았다”고 서술한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말마따나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은 있었다. 하지만 그 희생으로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다. 말은 똑바로 하자. 1945년 해방에 대한 인과관계를 착각해선 안 된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군 수십만 명이 피를 흘렸고, 일본 본토 점령의 난해함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이 일본 요충 군사도시 두 군데에 핵폭탄을 투하해서 일본이 항복했다. 한반도가 해방된 것은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항복해서가 아니다. 미국에게 항복해서다.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은 있었지만 미군은 그보다 수백 배의 피를 흘렸고, 미국은 결국 소련과 함께 승전국으로서 한반도를 전후 처리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는 막바지에 연해주를 공략하는 등 숟가락을 올린 소련으로 인해, 미국 단독이 아닌 미소 군정이 남북 분할로 개시되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③ ‘세계 진보적 민중들’ 운운하는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는 “세계 진보적 민중들의 도움으로 일제로부터 해방의 날을 맞았다”라고 기술한다. 세계 진보적(?) 민중이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도리 없지만, 혹여 1930~40년대 일본을 상대로 펼쳐졌던 만주 무장투쟁을 말하는 것이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1921년 연해주 자유시에서 볼셰비키 붉은 군대(공산당)가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사살했던 ‘자유시 참변’ 이후, 조선독립을 위한 무장독립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의 무장투쟁은 공산당을 지지해서 소련 붉은군대 밑으로 들어가 공산주의 적화투쟁을 일삼던 집단들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다. 여기서 부역하던 인물 중의 하나가 ‘김일성’이다.

게다가 북한과 국사학계 일각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는 전투라고 할 것 없는 강도단 사건이다. 김일성이 날을 잡아 지서를 습격하여 경관부인과 딸을 살해하고 마을 지주와 부잣집을 털었지만, 일본 군대가 나선 뒤에는 거의 전멸하고 살아남은 이들(김일성 포함)만 소련으로 도망쳤다.

④ 자주적 민족국가의 수립?

“반민족범죄자들은 다시 외세와 결탁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누림으로써 자주적 민족국가의 수립은 분단이라는 상처를 안고서 또다른 시련을 겪고 있다.” - 창립선언문 첫 번째 문단의 마지막 문장

민족문제연구소의 가장 큰 문제는 ‘자주적 민족국가의 수립’을 한반도 현대사의 절체절명 과제로 여긴다는 것이다. 위 문장에서 드러나는 기본 인식은 “친일파가 미국과 결탁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고 이로 인해 남북 통일국가, 자주적 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자주적 민족국가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이다. 1) 대의제라는 의사결정체제(민주)와 2) 헌법가치를 수호하려는 공화국을 겸비한 나라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지향한다. 주된 헌법가치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다. 반일, 반미, 자주, 민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돌아오는 12월부터 서울 시내 모든 중고교 도서관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을 비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사진=연합뉴스


4. 맺으며

지금은 100년 전 볼셰비키 혁명을 이 땅에 꿈꾸던 공산주의자들의 시대가 아니다. 민중이라는 계급 용어로 규정 지을만한 사회주의 사회도 아니다.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며 한반도는 오천년 자주 주권을 지켜온 곳이라는 허명은 더더욱 아니다. 70년간에 걸친 공산주의 사회주의 실험은 30년 전 실패로 끝났다. 이후 글로벌 시장으로 모든 나라가 편입되어 국경 없는 경쟁이 무차별적으로 벌어지고, 민족 경계가 희미해지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지금은 집단, 민족이 아니라 기업과 개인의 시대다. 시대정신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꺼리지만 굳이 2015년의 시대정신을 꼽자면, 기업가정신과 개인의 창의력을 말하겠다. 자유와 독립, 개인과 기업이 답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붙잡고 있는 민족 민중 반일 반미라는 화두는 1980년대 386 주사파 사고방식 그대로다. 안타깝다. 점차 시간의 유물, 시대의 화석이 되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헌법가치를 소중히 생각하는 민주공화국이다. 자주적 민족국가? 민족문제연구소의 문제의식은 틀렸다.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