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금융체제 기틀 실명제…한국경제 투명성 일궈낸 일대 혁신
   
▲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

김영삼, 시대의 거목이 유명을 달리했다. 완벽한 정치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흠이 많았으나 역사의 고비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웠다. 박정희 사후, 한때 ‘3金 시대’라 불리우던 대한민국 정치사는 그렇게 한 장을 완전히 닫으려 하고 있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업적 보다는 오점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공로는 분명 있다. 바로 민주화와 금융실명제다.

문민정부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김영삼 정권은 말 그대로 박정희정부 이래로 계속된 군사정권에 종언을 고한다. 김영삼은 군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를 척결하고 문민통제의 기반을 마련했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공직자 재산공개제도를 도입하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하기도 했다.

물론 민주주의가 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김영삼이 구축했던 민주화에는 동전의 양면이 존재한다. 5.18 광주사태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운동으로 정립한 것, 관치의 폐해로 인한 IMF 난국, 조세라는 알맹이를 뺀 빈껍데기 지방자치제 실시 및 그로 인한 지방자치단체들의 부실화 초래, 공정거래위의 장관급 격상으로 인한 경제의 정치화 등 명암이 공존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다만 금융실명제는 나라의 체제와 국민 모두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일대의 혁신이었다. 후진국이 아니라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금융 밑거름이었다. 김영삼이 세운 가장 큰 업적, 유일무이한 업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80년 5월 해공 신익희선생 24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왼쪽)와 김대중 씨./사진=연합뉴스

1988년부터 노태우정부는 금융실명제 준비단을 설치하여 제도 실시를 연구했지만, 여러 정치적 이유와 이를 우려하는 반대세력에 부딪혀서 보류되었다. 이를 김영삼정부는 전격적으로 처리했다. 집권한 지 5개월 뒤인 1993년 8월 12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긴급명령 ‘긴급재정경제명령 제 16호’를 발동하여 당일 오후 8시를 기해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을 위한 법률’을 전격적으로 실시하였다. 이는 일주일 뒤인 8월 19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 이후 21년만의 일이었다.

금융실명제의 골자는 두 가지였다. 비실명계좌의 실명확인 없는 인출을 금지한다는 것과 순인출 3천만 원 이상의 경우 국세청에 통보하여 자금 출처를 조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김영삼정부의 전격적인 금융실명제 실시 후 한동안은 경제적 혼란이 있었다. 하지만 시장 유동성은 0.3 ~ 0.6%정도 증가하는 데 그치는 등 우려되던 유동성 과다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명 및 무기명 자산들이 실명화되었다. 금융자산의 투명화, 건전성이 한국경제의 대세로 자리 잡은 것이다.

정경유착 등 각종 부정부패 사건의 자금 추적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금융실명제 시행 전까지 한국 금융은 사실상 위법행위가 횡행하는 진흙탕이었다. 기업, 자영업, 전문직 모든 영역에서 장부 조작 및 세금탈루가 손쉬웠다. 물밑에서 움직이는 정치자금의 규모가 다르던 시대다. 조폭, 범죄자, 종교단체들의 자금세탁이 어렵지 않던 시기다. 김영삼의 금융실명제는 이러한 폐단을 한순간에 끊어버렸다.

공과 많은 굴곡진 삶이었지만 그래도 김영삼은 시대의 지도자였다. 그가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우리는 그가 남긴 유산을 딛고서 살아가고 있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부디 편히 쉬시기를, 남겨진 유가족들에게는 위로가 있기를 소원한다.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

   
▲ 고 김영삼 전 대통령. 완벽한 정치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흠이 많았으나 역사의 고비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웠다. 민주화와 금융실명제는 그가 세운 대표적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