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정치 이어 국회서 '법안 연계작전'…국민 심판 두렵잖나

한·중FTA 비준동의안에 대한 야당의 발목잡기가 목불인견이다. 당초 27일 여야는 본회의를 열 예정이었으나 야당의 터무니없는 ‘법안연계작전’으로 30일로 연기됐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비틀린 심사로 어거지를 쓰고 있어 이마저도 처리가 불투명해 보인다.

새누리당은 30일을 마지노선으로 잡고 야당과의 합의가 불발되면 단독처리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30일 본회의가 마지노선"이라며 "입이 바짝 마를 정도로 애타는 심정"이라고 전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한·중FTA이 비준 동의안 처리 조건으로 내건 함께 법안은 자그마치 26개다. 새정치 이종걸 원내대표는 30일 본희의 합의문 발표 두 시간 뒤 “일정만 합의했을 뿐 그때 비준안이 처리된다는 건 추측”이라고 했다.

새정치는 한·중FTA 비준동의안 처리 조건으로 국회법, 세월호특별법, 전·월세상한제, 주택임대차보호법, 누리사업, 보육교사 보육료 인상, 청년일자리 예산 증액 등 아무런 상관없는 26개의 법안을 끼워 넣기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새정치는 박수현 원내 대변인을 통해 “제시한 법안과 예산안들의 논의가 마무리되지 않고 (한·중)FTA만 떼서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한·중)FTA피해대책에도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모든 사안을 세트로 합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춘석 원내수석부대표는 “30일까지 전향적 답변이 없으면 모든 상임위와 예결위 일정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엄포까지 놓았다.

   
▲ 황교안 국무총리(오른쪽)와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25일 광주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개관식에 앞서 가진 환담에서 황 총리가 한중 FTA 비준안 조속 처리 요청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한·중FTA가 올해 안에 발효되면 고주파의료기기의 관세율 4%와 항공등유의 관세율 9%는 즉시 철폐된다. 중국은 세계 최고의 지게차 시장이다. 한국은 독일·일본·미국과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중국이 한국의 지게차에 매기고 있는 관세는 9%다.

한국과 중국이 맺은 FTA는 이 관세를 해마다 1.8%포인트씩 인하하기로 되어 있어 5년 후에는 완전 철폐된다. 연내 한·중FTA가 발효되면 당장 관세가 7.2%로 인하되고 내년 1월1일에 다시 1.8%가 떨어져 5.4%가 된다. 한 달도 채 안되는 사이에 두 차례 관세인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한·중FTA 발효는 하루가 지연될 때마다 40억원의 수출기회가 사라진다. 올해 안에 비준되지 않으면 1년간 피해액은 1조5000억원에 달한다. 수출쇼크에 직면한 경제계가 한·중FTA를 올해 안에 발효시켜야 한다고 촉구해 온 건 이 때문이다.

정부는 한·중FTA로 모든 관세가 철폐되면 연간 54억4000만 달러(약 62조3000억 원)의 관세 부담이 줄어든다고 추정했다. 특히 미국·일본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가 타결되면서 더욱 시급해졌다. 이 때문에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도 26일 긴급 기자 간담회를 열고 “한·중 FTA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큰 통상 이슈들이 많은데 이미 타결된 협상마저 비준되지 않으면 앞으로 협상 테이블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지 우려된다”며 조속한 한·중 FTA 비준 통과를 촉구하기도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5단체도 지난 25일 공동 성명서을 통해 “경제 영토의 확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하루속히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과 경제 활성화 법안들을 조속히 통과시켜 청년 일자리 창출의 물꼬를 트고 경제 활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간제법과 파견법 등 노동 관계법을 시급히 정비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고, 통상임금 개념을 명확히 해 급격한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산업 현상의 충격도 최소화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 윤상직(오른쪽 세번째)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이 25일 오후 국회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실에서 열린 한중 FTA 긴급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한국경제에 들어온 빨간등을 끄기 위해 모두가 위기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칼자루를 쥔 정치권에서만 우이독경이고 마이동풍이다. 급기야 27일에는 경제학자뿐 아니라 전 관료와 법조계·시민사회단체 등을 망라한 지도층 1000명이 나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 시국 선언’을 내놓았다.

이들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미증유의 경제위기 적극 대처를 촉구하는 지식인 선언’에서 정치권과 정부에 대해 잇단 경고를 보냈다.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박재완 한선재단 이사장과 조동근 명지대 교수, 최병일 이화여대 교수, 좌승희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등 이날 모인 지식인들은 현재 한국경제의 상황이 외환위기를 불러온 1997년 말과 비슷하다고 우려했다.

지식인 1000명은 성명을 통해 “한국 경제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그러나 ‘골든타임’만 허비하고 있다”며 현재의 한국 경제를 ‘미증유’, ‘백척간두’라는 용어를 동원해 위중한 한국경제의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번 지식인 선언을 이끈 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지금의 한국 경제를 “해는 지는데 갈 길은 멀고, 머리에는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있는데 애는 업어 달라고 보채는 상황”이라고 비유했다.

실제 한국 경제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들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10년 16.3%(전년 대비)에 달했던 국내 기업 매출액 증가율이 지난해에는 -1.2%로 추락했다. 매출 감소는 통계청 조사 이후 처음이다. 한때 10.6%(1990∼2000년)에 달했던 제조업 노동생산성(취업자당)도 올 상반기 -2.7%로 주저앉았다. 세계적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내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2.5%로 전망했다. ‘3%대 성장 시대’도 기대하기 힘든 처지다.

그동안 한국 경제를 주도했던 조선·석유화학·중공업 등 기간산업의 수출이 급락하고 고령화와 청년실업 문제가 세대 간 갈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지식인들은 위기타개 방안으로 “신성장 동력 확보와 고용증대를 위해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의 조속한 비준과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의료법·관광진흥법 개정안 등의 처리가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또 이들은 “정부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하고 ‘좀비기업’ 구조조정을 과감히 추진하라”고 주문했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경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정치권만 ‘찻잔속의 태풍’으로 치부하고 있다. 특히 야당은 총선을 앞두고 온갖 포퓰리즘 법안을 한·중FTA와 연계하면서 나라 경제를 늪 속으로 빠뜨리고 있다. 새누리당 김영우 수석대변인은 27일 “경제상황이 극도로 심각한 만큼 한·중FTA와 무관한 법안 등과 연계해 ‘몽니’를 부릴 사안이 아니다”라고 협조를 요구했다. 정의화 국회의장도 오는 30일 본회의에서 한·중FTA 비준 동의안을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동안 민생법안은 외면한 채 집회현장으로 나가 길거리 정치를 외친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번에는 한국경제를 담보로 거래를 하려고 하고 있다. 최악이라는 오명을 쓴 19대 국회 임기는 오늘로 딱 6개월이 남았다. 시한부 임기 마지막까지 정치적 거래로 더 이상의 오명을 쓰지 않기를 바란다. 위기의 한국경제를 담보로 표 계산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국민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