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연지 기자]금속노조가 연말 조직력 정비와 교섭 전략 재편에 돌입하면서 국내 완성차 업계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여기에 내년 3월 노란봉투법 시행으로 원청-하청 교섭 의무가 현실화되면서 수천 개 협력사를 대상으로 한 교섭 부담과 비용 증가 리스크까지 중첩되며 업계의 내년 경영환경에 빨간불이 켜졌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금속노조에 이어 한국GM 지부와 현대차 지부가 지도부 선거를 마무리하면서 내년 교섭 구도가 사실상 완성됐다. 주요 완성차 사업장에서 강경 성향의 후보들이 새 지도부로 선출되면서 기업들은 내년 임단협 과정에서 부담 증가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금속노조 14기 위원장에는 박상만 현 부위원장이 당선됐다. 박상만·황영선·허원 후보조는 최종 임원 투표에서 79.17%를 득표하며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했다. 박 위원장은 현대차 지부 정비직 출신으로 원청교섭 확대와 사용자성 인정 범위 강화 등을 내세웠고, 황 수석부위원장은 기아차 지부 출신, 허 사무처장은 한국GM 비정규직 출신으로 제조업 전반의 교섭력을 끌어올리는 데 방점을 둔 조직 전략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올해 관세 폭탄 등 급격한 환경 변화 속에서도 국내 경제와 수출의 한 축을 지켜온 자동차 산업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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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달 2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시행령 개정안 브리핑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제공 |
◆ 현대차 노조 지부장에 '강성' 이종철…교섭 강경 드라이브 예고
현대차 노조(금속노조 현대차지부)에 따르면 11대 임원 선거에서 이종철 후보는 1만7879표(54.58%)를 얻어 임부규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이 후보는 '금속연대' 소속으로 '현장권력 복원'을 강조해 온 대표적 강경파로 꼽힌다. 1996년 현대차 입사 후 노조 대의원, 울산4공장 사업부 대표, 단체교섭위원 등을 지냈으며 2008년 노동법 개정 반대 투쟁 과정에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경력도 있다.
그의 선출로 내년 교섭의 강도가 한층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 후보는 퇴직금 누진제 도입, 상여금 800% 쟁취, 조합 가입 확대, 신규 채용 시 지역 가산점 부여 등 비용 증가와 직결되는 공약을 전면에 내세웠다.
퇴직금 누진제는 근속 기간에 따른 추가 지급 방식을 의미하는데 이 후보는 근속연수가 5년 이상 10년 미만일 때는 2개월 치, 10년 이상 15년 미만 3개월 치, 15년 이상 20년 미만 5개월 치, 20년 이상이면 7개월 치 누진제를 적용하는 방안을 약속했다. 예를 들어 평균임금이 1000만 원일 때 28년을 근속했다면 일반적인 퇴직금은 2억8000만 원이지만, 이 누진제를 적용하면 7000만 원을 더 지급받아 총 퇴직금은 3억5000만 원이 된다. 장기근속자가 다수인 점을 감안하면 회사 부담은 수조 원대로 추산된다.
주 35시간제 도입 공약 역시 사측에 상당한 부담 요인이다. 현재 주 40시간인 근무시간을 연구·일반직과 전주공장부터 내년에 주 35시간으로 줄이고 단계적으로 다른 공장까지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사실상 연구·일반직은 주 4.5일제를 도입하는 것이고, 기술직(생산직)은 매일 근무 시간을 1시간씩 줄이는 것이다. 이 후보는 당선 즉시 이를 위한 전담팀(TFT)을 꾸리겠다고 공언해 내년 임단협의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현대차 노조는 올해 임단협 과정에서 기본급 인상 합의가 지연되며 2019년 이후 7년 만에 부분 파업을 벌인 바 있다. 강성 지부장의 당선으로 내년 교섭 과정에서 더욱 강도 높은 투쟁이 예상된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편 한국GM 지부는 안규백 지부장을 중심으로 철수설 차단과 고용 안정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안 지부장은 지역 시민단체와 연대해 GM 철수 반대 집회를 개최하고, 정부에 한국GM 독자 생존 방안 마련을 촉구하는 등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다. 한국GM이 여전히 경영 정상화 과정에 있는 만큼 노조의 요구 강도가 높아질 경우 노사 긴장이 재점화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 내년 3월 노란봉투법 시행…수천 개 협력사 교섭 부담 현실화
노사환경의 변동성은 강성 집행부 출범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내년 3월에 시행되는 노란봉투법이 완성차 업계에 구조적 압박을 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노란봉투법은 근로계약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근로조건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를 사용자로 규정한다. 이에 따라 하청 노조가 원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현대차의 경우 300개가 넘는 국내 1차 협력사와 5000곳 이상의 2·3차 협력사를 두고 있어, 법 시행 후 동시다발적인 교섭 요구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쟁점은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가 원·하청 통합 교섭 구조에 어떻게 적용될지 아직 뚜렷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청이 수십 개 노조의 개별 교섭 요구에 직면할 수 있고, 교섭단위 분리 방식과 창구 단일화 여부에 따라 막대한 시간과 비용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중앙노동위원회가 최근 원·하청 교섭 및 조정 사건 관련 매뉴얼 연구 용역을 발주하고, 고용노동부도 시행령 개정을 통해 교섭창구 단일화·교섭단위 분리 기준을 구체화하고 있지만 법 시행을 불과 3개월 앞둔 시점이라 현장 혼란을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지적이다.
이승길 한국ILO협회 부회장은 이번 노란봉투법 개정을 두고 "노사관계의 전면 사법화가 이뤄질 수 있는 변화"라고 진단했다. 그는 "근로조건에 실질적·구체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면 사용자 범위에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입법이 이뤄졌고, 그 결과 원·하청 관계 전반이 개정안의 적용 대상이 됐다"며 법 시행 후 하청 노조의 원청 교섭 요구가 급증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 부회장은 경영계가 '노조법 2·3조 개정 대응 TF'를 꾸려 산업별·기업별 현장 요구를 상시적으로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노란봉투법의 핵심 쟁점인 사용자 범위 확대, 노동쟁의 개념 변화, 원·하청 구조에서의 교섭창구 단일화 적용 문제 등에 대한 법리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시행령과 행정지침, 현장 매뉴얼 준비 과정에서 기업 측 의견을 적극 개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업계 관계자는 "강성노조 부상과 노란봉투법 시행이라는 이중 압박 속에서 완성차 업계의 내년 경영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울 것"이라며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노사관계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김연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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