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중재로 ‘천조(千兆)개벽’ 사업의 유치전쟁이 휴지기에 들어갔다. 삼성과 SK가 물경 천조 원을 투자한다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이야기다. 천문학적 금액이 짧은 시간 동안 집중 투자되기에 여타 지방자치단체의 부러움을 사는 ‘건국 이래 최대사업’이다. 그것도 수출액 7,049억 달러(이하 2025년도 추정)의 24.5%인 1,750억 달러를 수출한 현재와 미래의 먹거리인 반도체산업이어서 매력은 가중된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좌우하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여주듯 세계의 시선도 용인을 주시하고 있다.

당연히 전북, 경북, 강원도 등 전국 지방자치단체가 지역의 장점을 내세우며 유치에 욕심을 냈다. 이들 지자체는 전력공급을 지렛대로 이전 혹은 분산을 강력히 주장해 용인시를 비롯한 지역 정치권과 심각한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다. 김성환 기후환경부 장관이 나서 정부가 이전 혹은 분산유치 가능성을 열어두자 정치권은 기화점을 향해 끓어올랐다. 지역 이익을 대변한 정치권의 갈등이 심각한 지역 갈등으로 돌변하기 직전 이재명 대통령이 나서 ‘이전 불가’방침을 밝히면서 가라앉았다. 그러나 여진은 계속되고 정치권은 6.3 지방선거 이후 최종 결전을 벼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정치권, 지방자치단체 등이 얽혀 오랜 시간 난장을 만들 동안 정작 천조 원을 투자할 SK하이닉스나 삼성전자는 잠잠했다. 가장 민감한 이해관계를 가진 삼성과 SK는 왜 조용할까?
기업들 입장에서 입지는 필요조건이고 전력문제는 충분조건이다. 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필요충분조건이다.

우선 삼성과 SK는 ‘보조금, 인허가’를 놓고 종속관계에 있는 정부의 눈치를 보는 중이다. 삼성과 SK는 정부로부터 수조 원에 이르는 보조금을 기대하고 있다. 또 빠른 인허가와 도로 등 인프라 지원은 또다시 수조 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아직 착공 조차 못한 삼성은 다양한 상황에 따른 기대이익을 따질 뿐 목소리를 아끼고 있다. 양사 모두 수도권인 용인시가 아닌 지방 입지의 경우 심각한 인재유출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아래 내부 단속에만 집중하고 있다. 특히 이천과 청주에서 공장을 가동 중인 SK의 경우 지방 입지로 인한 심각한 인력유출을 경험했기에 용인 입지가 불가역적이라는 판단한 바 있다.

말을 아끼는 삼성과 SK가 정부, 지자체와 가장 괴리를 보이는 인식차는 글로벌 산업환경이다. 즉 삼성과 SK의 관심은 용인시가 됐든 호남이 됐든“글로벌 경쟁이 가능한 환경인가”이다. 여기에 필연 등장하는 것이 행정기관들이 간과하는 ‘RE 100(Renewable Electricity 100%)’이다. ‘RE 100’은 오는 2050년까지 태양광·풍력 등 친환경 재생에너지원을 통해 전력을 사용하겠다는 글로벌 협약으로 느슨했던 실행계획이 최근 한층 강화되고 있다. 
특히 반도체산업에 있어 글로벌 최대 고객사인 애플, 구글, 아마존 등은 2030년까지 완전한 ‘RE 100’ 실현을 선언했다. 따라서‘RE 100’의 핵심인 완전한 청정 에너지원 확보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생존기준이자 새로운 ‘비즈니스 티켓’이 됐다. 

인텔에 대한 삼성과 SK의 경계심은 공포에 가깝다. 한때 인텔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3위권 밑으로 추락하면서 규모의 경제가 무너졌고 곧 합병당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기사회생했다. 트럼프 정부는 단순한 보조금 지원을 넘어서 정부가 인텔의 지분 9.9%를 직접 보유하는 최대주주로 진화했다. 보조금도 111억 달러를 지원해 미국내 공장을 짓는 삼성과 SK의 보조금을 훌쩍 뛰어넘었다. 미국 내 첨단 반도체 제조 역량을 재건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향후 어떠한 형태로 조여올지 삼성과 SK는 잔뜩 긴장한 상태다.

삼성과 SK를 짓누른 공포는 ‘RE 100’의거한 청정 에너지원 경쟁에 이르면 배가된다. 인텔이 1.8나노 수율 60%를 돌파하며 쫓아오는 기술경쟁은 방어되지만 ‘미국산 청정 전기’경쟁은 거대한 장벽으로 다가선다. 기술이 앞서도 “한국산 전기는 (LNG 등 화석연료를 사용해) 기준 미달”이라고 낙인 찍히면 수주 단절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애플은 2030년까지 자사 제품 생산에 들어가는 모든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위반시 공급사 목록에서 제외되거나 수주 물량의 대폭 삭감은 막을 수 없다. 삼성이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공장 신축에 집중하는 이유가 관세뿐 아니라 청정 전기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반도체 클러스터의 입지를 놓고 용인시를 중심으로 난타전을 벌이는 동안 기업들은 생존이 걸린 청정 에너지 구입이 어려우면 해외로 떠날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제 정부의 시간이다. 반도체 클러스터의 용인 입지를 확정했다면 정부 차원의 진정성이 필요하다. 
우선 국무총리를 정점으로 용인시가 포함되는 TF팀이 구성돼야 한다. 그래야 국토부, 산업부, 환경부 등 정부 부처의 갈등을 총괄 조정해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또 ‘반도체 특별법’을 입법해 예비타당성 조사 등 인허가 절차를 획기적으로 단축해야 한다. 이는 호남과 영남으로 분파된 정치권의 진정성으로 확인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다.
용인시 역시 “송전망 건설 등 우리에겐 희생만 강조하고 용인시만 배불리는 게 아니냐”는 전북, 경북 지역의 불만으로 해소하는 데 성의를 보여야 한다. 신설을 계획 중인 ‘반도체고등학교’의 경우 일정 비율로 지방 학생들에게 문호를 개발하는 것도 아이디어다. 중앙 정부에게 모든 짐을 지우는데서 벗어나 용인시가 할 수 있는 일을 솔선하는 상생의 모습이 절실한 때이다.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겸 주필

[미디어펜=김진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