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문상진 기자]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전 대표는 결국 ‘오월동주’였다. 혁신안을 놓고 지루한 싸움을 벌이던 문재인·안철수가 결국 안철수의 탈당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지 못한 채 ‘각자도생’의 길을 가게 됐다. 13일 안철수 전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해 “저는 이제 당 안에서 변화와 혁신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탈당을 공식선언했다.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던 두 사람은 결국 지난 6일 혁신 전당대회 개최를 놓고 최후통첩을 주고 받으며 탈당과 분당이라는 최악의 수를 향해 치달았다. 문재인 대표의 혁신 전당대회 거부 의사에 안철수 전 대표는 잠행에 들어갔다. 향후 정치에 대해 장고를 거친 후 13일 기자회견을 예고했다.
안철수 전 대표의 탈당설에 설마 하던 문재인 대표와 주류측도 점차 탈당설에 무게가 실리자 13일 새벽 부랴부랴 안철수 전 대표의 자택을 찾았다. 결과는 문전박대. 문재인 대표는 이날 오전 1시경 박광온 비서실장, 윤건영 특보와 함께 서울 안철수 전 대표 집을 찾아 40여분을 기다렸지만 안 전 대표의 면담 거부로 결국 빈손으로 돌아섰다.
안철수 전 대표의 심증이 탈당으로 굳어진다는 얘기들이 시시각각으로 전해지자 12일 저녁 새정치민주연합은 긴급의원간담회를 열고 안철수 전 대표의 탈당 철회를 호소하는 성명서를 냈다. 안철수 전 대표를 눌러 앉히기 위한 새정치민주연합의 모든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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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철수 마이웨이…"탈당은 공멸" 문재인 문전박대·천정배 미소?. 13일 안철수 전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해 “저는 이제 당 안에서 변화와 혁신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탈당을 공식선언했다./사진=연합뉴스 |
안철수 전 대표는 탈당을 선언하며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고 비상한 각오와 담대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거듭거듭 간절하게 호소했지만 답은 없었다”고 문재인 대표와 주류측을 겨냥했다. 안철수 전 대표는 “안에서 도저히 안된다면 밖에서라도 강한 충격으로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며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는 정치세력을 만들겠다. 그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철수 전 대표의 탈당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의 분당은 현실화 됐다. 총선을 4개월 앞 둔 시점에서 제 1야당의 붕괴는 충격파는 예상외로 클 것으로 전망된다. 안 전 대표의 탈당으로 그동안 문재인 대표와 각을 세우거니 사퇴를 촉구햇던 비주류 의원들의 동반 탈당이 줄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 전 대표가 천정배 의원 신당과 손을 잡을지 아니면 범야권을 아우르는 새로운 지대를 만들어 낼지 정치권의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탈당으로 인한 성공과 실패의 역사는 어땠을까?
2000년 민주국민당은 16대 총선을 한 달 앞둔 2000년 3월 창당의 길을 걸었다. 당시 한나라당 탈당파인 김윤환·조순·신상우 의원, 이수성 전 국무총리, 이기택·김광일 전 의원 등과 새천년민주당 탈당파인 김상현 의원 등 1·2당의 거물급 중진들이 대거 참여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이회창 총재체제였다. 2002년 대선 ‘재수’를 앞두고 확실한 자기 세력이 필요했고, 개혁을 통해 명분을 만들어야 했던 그는 16대 총선에서 대대적인 물갈이 공천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이 총재의 ‘정치적 은인’으로 불렸던 허주 김윤환 전 의원까지 지역구를 내줘야 했다. 민국당은 김 전 의원처럼 이 총재의 공천장을 받지 못한 세력이 ‘반창 연대’의 깃발을 내세워 급조한 당이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지역구 1석(한승수·춘천)과 비례대표 1석이 전부였다.
18대 총선을 한 달 앞둔 2008년 3월 23일 당시 한나라당 비주류 박근혜 의원이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말했다. 당시는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 첫해였다. 박근혜 의원은 “무원칙 공천에 대해 대표와 지도부가 책임져야 한다”며 “지원 유세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박근혜 의원의 이 같은 결단은 친박 공천학살이 불러 온 결과였다. 전국 245개 지역구 공천에서 현역 의원 109명 중 42명을 탈락시켰는데 낙천자 42명 중에는 박근혜 캠프 좌장을 지낸 김무성, 서청원·이규택·김재원 의원 등 친박계가 16명이나 포함됐다. 공천자 중 친이계 성향 후보자는 157명, 친박 성향은 44명에 불과해 ‘친박 학살’이란 평이었다.
줄줄이 탈당의 길을 택했고 서청원 당시 의원은 ‘친박연대’라는 정당을 만들었고 김무성 의원은 ‘친박 무소속 연대’를 결성했다. 총선에서 친박연대는 지역구 6석, 비례대표 8석 등 14석을 얻었다. 친박 무소속 후보도 12명이나 당선됐다. 살아서 돌아온 이들의 상당수가 현재 새누리당 지도부를 이루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첫해이던 2003년.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김근태·정동영·천정배 의원 등 40명과 유시민 의원 등 개혁국민정당 세력, 한나라당을 탈당한 이부영·이우재·김부겸·김영춘·안영근 의원 등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47명짜리 ‘초미니 여당’었던 열린우리당이 2004년 4월 총선에서 대박을 쳤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문이었다. 탄핵에 반대하는 촛불시위 속에서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으로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했다. 국회 의석이 단숨에 105석이나 늘어났다. 하지만 이렇게 탄생한 열린우리당은 3년 만에 공중분해 됐다.
탈당·총선을 정국에서 소위 ‘대박’은 공천학살·탄핵반발에 대한 확실한 명분이 있을 때 성공했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양상과는 조금 다르다. 문재인 대표는 잇단 선거 실패와 리더십의 부재로 비주류의 전방위 사퇴 요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친노 세력에 치우쳐 당권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이 비주류의 반발을 산 것이다. 문재인 대표의 당권 버티기는 ‘당권=대권’이라는 정치공학적 셈법에 침몰돼 당을 위기로 몰았다는 비주류의 주장이다.
안철수 전 대표의 경우 탈당에 이어 자신의 정치적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확실한 명분과 세불리기에 성공해야 한다. 명분 측면에서 어느 정도 안 의원의 생각을 충족시켰을지는 모르지만 리더십과 정치적 자산 면에서는 부족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세불리기 측면에서는 안철수 의원이 탈당해 천정배·박주선 의원 등과 손잡는 시나리오도 나온다. 안철수 의원의 탈당이 열린우리당의 길이 될지 친박연대의 길이 될지 아니면 예단하기 어려운 점이다.
하지만 정치권뿐만 아니라 친문도 반문도 지금껏 공통된 생각은 하나였다. 탈당으로 인한 분당은 공멸이란 길을 갈 것이란 두려움이다. 대선 후보였지만 초선 출신인 문재인 대표 하나만으로 당을 이끌어 가기란 무리수란 지적이다. 안철수 전 대표의 경우도 ‘아름다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이 컸던 만큼 새로운 바람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갈라선 문재인·안철수의 선택이 결국 제 1야당이 가장 우려했던 ‘공멸’의 길에 대한 불안감을 씻어낼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