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한기호 기자]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와 김정훈 정책위의장 등은 16일 오후 2시47분쯤 정의화 국회의장 집무실을 찾아 여야 쟁점법안과 관련한 ‘직권상정 요구 결의문’을 전달했지만 정 의장은 불쾌감을 표하며 5분여만에 자리를 떠났다.

새누리당은 이날 오전 의원총회에서 야당의 내홍으로 정상적인 원내 협상이 불가능하고 대내외 경제상황이 ‘국가비상사태’에 준한다며 테러방지법·북한인권법 및 노동개혁·경제활성화법안 등의 직권상정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소속 의원 전원(157명) 찬성으로 채택한 뒤 이를 정 의장에게 전달했다.

이는 정 의장이 오전 11시쯤 기자간담회에서 전날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이 찾아와 내년 총선을 위한 선거구 획정안이 담긴 공직선거법과 함께 여야 쟁점법안의 직권상정을 요구한 것에 대해 ‘선거구 획정안만을 연말 전후로 본회의에 직권상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힌지 4시간이 채 안 돼서였다.

정 의장은 선거구 획정 합의 불발로 인한 선거구 무효화 사태는 ‘입법비상사태’라고 간주하면서도 “(국회법 85조에 따르면) 국가비상사태에 (직권상정이) 가능하다고 돼 있는데 과연 지금 경제상황을 그렇게 볼 수 있느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

원 원내대표는 의장 집무실에서 비공개로 이뤄진 면담 중 “세계 경제의 위기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상황에서 경제활성화법으로 방파제를 삼아야 한다”면서 “또 최근 파리 테러도 있었는데 테러방지법으로 예방해야 한다”며 이같은 법안들이 12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결단해달라고 촉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정 의장은 “선진화법 때문에 직권상정을 할 수 없다. 여러분도 그 법이 통과될 때 찬성하지 않았느냐”고 강한 불쾌감을 표시하며 5분만에 집무실을 박차고 나섰다.

국회의장실 관계자는 “(정 의장이) 국회선진화법을 찬성해놓고 선진화법 내에서 의장이 할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 지금 나한테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했다”며 “그럼에도 여당 원내지도부가 이야기하니까 더이상 들을 이유가 없고, 기자들을 몰고 와서 하는게 의장을 압박하는 정치적인 의도로 읽혔을 수 있다”고 전했다.

원 원내대표는 집무실을 나온 뒤 정 의장의 지적에 대해 “새누리당도 찬성한 사람과 반대한 사람, 기권한 사람이 있는데 여러 형태로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라면서 “찬성과 반대를 떠나 지금 상황은 아주 민생 현장이 절박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선 “당의 최고위원이나 의총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고 의장과 계속 대화할 생각”이라면서 야당 원내지도부와도 앞서 합의 후 처리키로 약속한 법안들을 처리하자고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새누리당 내에선 정 의장을 향한 불만이 곳곳에서 강하게 제기됐다.

앞서 이날 이장우 대변인은 KBS라디오에서 선거구 무효화 사태를 ‘헌정비상상태’라고 주장하며 “만약 직권상정을 하지 않는다면 해임 결의안을 낼 수 있다”고 압박했다.

윤상현 의원은 한 매체와의 통화에서 정 의장이 국회법을 근거로 쟁점법안의 직권상정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 “자꾸 법적 요건 운운하는데 국회의장만 살고 국회가 죽으면 의장이 설자리가 어디겠느냐.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는 게 책임있는 정치”라고 주장했다.

정갑윤 국회 부의장도 이날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지금은 국가비상사태에 준하는 입법조치가 필요한 때”라며 “대내외적 경제요건과 우리의 정치상황으로 볼 때 지금이 정상적이지 않은 비상사태임은 분명하다”고 정 의장의 입장에 상반되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인제 최고위원은 “국회의장은 법만 얘기하고 있는데 법 위에 있는 헌법을 왜 바라보지 않느냐”면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못하면 기다리는 것은 대통령의 긴급권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현 상황이 1993년 금융실명제를 실시할 때 발동했던 대통령의 ‘긴급재정·경제명령’을 행사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