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 주유소 판가 선반영 눈총에 정부 압박 가중
정제마진 불안정 속 가격 통제 리스크…수익 구조 한계
비정유 밸류체인 전환…나프타값↓ 화학 소재 턴어라운드
[미디어펜=김동하 기자]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 최고조로 국제 유가가 배럴당 85달러를 돌파한 가운데 국내 정유 4사(SK이노베이션·에쓰오일·GS칼텍스·HD현대오일뱅크)가 비정유 부문으로의 체질 개선에 힘을 쏟고 있다. 정부의 가격 통제 리스크와 실질 마진 감소라는 이중고를 돌파하기 위해 내수 연료유 판매에 의존하는 전통적 수익 구조를 탈피하는 속도전을 펼치고 있다.

   
▲ 국제유가가 배럴당 85달러를 돌파한 가운데 서울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1900원대를 넘어섰다. 사진은 이날 서울 시내 주유소 모습./사진=연합뉴스


8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최근 브렌트유와 서부텍사스산원유(WTI) 등 주요 국제 유가는 배럴당 85달러 선을 뚫고 연중 최고치 수준으로 치솟았다. 문제는 국제 유가 상승분이 국내 주유소 판매 가격에 반영되는 속도다. 일반적으로 국제 석유 제품 가격이 국내에 적용되기까지는 원유 도입과 정제 과정을 거쳐 물리적 시차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번 유가 급등기에는 기존 저가 재고가 소진되기 전부터 선제적으로 판매가를 올리는 징후가 포착되며 논란이 일었다.

물가 안정이 최우선 과제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정유 4사 및 주유소 업계와 긴급 간담회를 열고 무리한 가격 인상을 자제해 줄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국제 유가가 오를 때는 빠르게 올리고 내릴 때는 천천히 내린다는 고질적인 비대칭 가격 전가 논란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며 업계를 향한 전방위적 압박 수위가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정유사들은 유가상승기에 발생하는 단기적인 재고평가이익 착시 효과일 뿐 실질적인 현금 창출력을 보여주는 복합정제마진은 글로벌 수요 둔화 여파로 여전히 불안정하다고 호소했다. 비판의 화살과 정부의 물가 통제 압력이 집중되는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하며 단순 연료유 생산만으로는 이익을 담보할 수 없는 시장 생태계가 굳어졌다.

이에 국내 정유사들은 정유 꼬리표를 과감히 떼어내고 나프타 등 화학 기초 유분을 활용한 고부가 밸류체인 고도화와 지속가능항공유(SAF) 중심의 친환경 포트폴리오로 생존 궤도를 전면 수정했다.

SK이노베이션은 정유 사업의 비중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순환경제와 고부가가치 화학 소재 중심의 포트폴리오로 재편하는 데 속도를 냈다. 차세대 먹거리로 꼽히는 SAF 분야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며 국내 정유사 최초로 SAF를 유럽에 수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오는 2027년까지 친환경 설비 전환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단순 정제 기업을 넘어선 그린 에너지 기업으로 턴어라운드를 정조준했다.

에쓰오일은 울산에 수조 원을 투입해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초대형 석유화학 복합시설인 샤힌 프로젝트를 구축하며 비정유 밸류체인의 판을 키웠다. 원유를 기존처럼 연료유로 정제하지 않고 최첨단 공법을 통해 플라스틱의 기초 원료인 에틸렌 등 화학 소재로 직접 전환하는 수직계열화의 정점을 찍었다 배당 성향까지 낮춰가며 화학 부문 수익성 강화에 전사적 역량을 집중했다.

GS칼텍스는 정유와 석유화학 공정을 완벽히 연계한 올레핀 복합분해시설(MFC)을 앞세워 비정유 사업 비중을 극대화하고 있다.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부생가스나 액화석유가스 등 대체 원료를 MFC에 교차 투입해 나프타 의존도와 원가를 한계치까지 낮추고 에틸렌 생산 수율을 최적화했다. 여기에 포스코인터내셔널 등과 손잡고 원료 정제부터 차세대 바이오 연료 생산까지 아우르는 밸류체인을 구축했다.

HD현대오일뱅크는 비싼 나프타 대신 값싼 정제 찌꺼기 기름을 원료로 투입하는 중질유 기반 석유화학설비(HPC)를 가동해 압도적인 원가 경쟁력을 확립했다. 대산공장에 차세대 바이오디젤 및 수소화 식물성 오일 생산 설비를 선제적으로 구축해 국내 정유사 최초로 일본에 SAF를 수출하는 등 글로벌 친환경 연료 시장 선점에 가장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정유업계 핵심 관계자는 "국제 유가 85달러 돌파로 인한 단기 이익보다 정부의 도매가 억제 압박이 실적에는 훨씬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주유소 기름값 논란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나프타 통합 설비와 친환경 항공유 등 비정유 부문의 수익성을 얼마나 빨리 끌어올리느냐가 올해 기업들의 근원적 생존력을 증명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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