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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우 기자 |
2015년 12월 21일은 미국의 명장 조지 S. 패튼(1885~1945)의 사망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세계 제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모두 경험한 명장 패튼은 살아생전 무수히 많은 기행과 돌출행동을 했다. 소위로 임관한 직후 터진 멕시코 내전에 참전해 반란군 장군을 권총으로 사살한 뒤 시신을 자동차에 매달고 거리를 질주한 일이 대표적이다.
세계 대전이라는 대사건이 없었다면 그는 어쩌면 그저 안하무인에 오만방자한 '사회 부적응 군인' 쯤으로 치부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전쟁은 발발했고, 그는 자신의 시대를 만났다.
"독일군의 내장을 뽑고 베를린으로 진군하자. 베를린에 가면 저 벽에 걸려 있는 재수 없고 뱀같이 교활한 녀석(히틀러)을 내가 총으로 쏴 죽이겠다."
2차 대전 발발 후 아프리카 전선에 2기갑사단장으로 참전하게 되면서부터 군인으로서의 패튼은 잠재력을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특히 유럽 전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한 패튼은 이른바 '코브라 작전'으로 독일군의 후방을 집중 공격해 그들을 패퇴시키는 맹활약을 펼쳤다.
"정면 돌격은 바보나 겁쟁이가 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한 그는 전장에서도 계속 이어진 돌출 행동의 와중에서도 적의 허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상대하기 정말 까다롭지만 우리를 이기게 해주는 사람'이라는 평판은 군인으로서의 그에게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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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조지 S. 패튼(1885~1945) 장군 |
유럽에서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이한 패튼의 다음 행선지는 원래 중국이었지만, 1945년 일본의 항복과 함께 그에게는 아마도 '기회'였을 전쟁은 종언을 고했다. 독일 바이에른 지역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된 사실은 다른 군인에게라면 또 다른 기회의 시작이었겠지만 그에게는 달랐다. 평생을 싸움꾼으로 살아온 그에게 평시의 정치, 평시의 행정은 맞지 않는 옷처럼 그의 입지를 좁혀왔던 것이다.
전직 나치당원을 요직에 임명한 사실에 대해 엄청난 비난을 받자 패튼은 "독일 공무원의 태반이 나치 당원이었는데 그럼 어쩌란 말이냐"는 식으로 반응했다. 전투에서는 적의 허점을 찾는 데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던 그였지만 전시가 아닐 때의 그에게는 약점이 너무 많아 보였고, 무엇보다 그의 수많은 실수를 보상해줄 '승리의 계기'가 평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 복귀를 하루 앞둔 1945년 12월 9일 패튼은 트럭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해 목이 부러졌고 21일 색전증으로 결국 사망했다. 전장에서 수많은 탄환을 피해온 그가 정작 트럭을 피하지 못했다는 아이러니는 역사에서 드문 일도 아니지만, 그 사고를 피했다면 아마도 반드시 참전했을 1950년 한국전쟁의 역사가 패튼에 의해 어떻게 바뀌었을지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전쟁의 재능이 꼭 필요했던 시대에 태어나 그를 필요로 하는 전쟁터엔 반드시 있었던 어느 괴짜 군인의 삶을 돌이켜 보며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되는, 2015년 12월 21일은 그런 날이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