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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석 주필 |
박근혜 정부, 외교 포퓰리즘 벗어나 정상적 외교 꽃 피울까?
농구나 축구로 치면, 경기 종료 2~3초를 남겨둔 상황에서 터져 나온 역전골이다. 며칠 남지 않은 2015년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상황에서 한일 양국이‘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드라마틱하고, 가히 역사적인 회담 타결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난제 중의 난제인 위안부 문제를 풀어낸 것이 경이로운데, 박근혜 정부로서도 큰 짐을 덜었다. 출범 이후 3년 가까이 반일 민족주의란 이름의 대중정서에 끌려 다녔던 건 ‘외교 포퓰리즘’이란 혹독한 지적 받아왔는데, 여기에서 자유롭게 된 것만 해도 어디인가?
이제부터 미래로 나갈 시점이고, 한국사회 전체가 반미-반일-친중의 도그마를 내건 좌파세력과 결별을 고해야 할 국면이란 점도 분명하다. 그 점에서 위안부 회담이 타결된 직후 박근혜 대통령이 발표한 대국민 메시지는 역사인식과 현실외교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박 대통령이 “대승적 이해”촉구한 이유는?
“일본의 잘못된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는 한일관계 개선과 대승적 견지에서 이번 (위안부 문제 해결) 합의에 대해 피해자 분들과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이해를 해 주시기 바란다.”“앞으로 중요한 것은 합의의 충실하고 신속한 이행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경감되도록 필요한 조치들을 취해 나가는 것이다.”
한일 양국 간 화해와 협력을 열어가자는 담대한 제안인데, 누가 이 말에 반대할까? 고백하지만, 내 경우 속으로 “그런데 이런 말을 어디에서 들어봤더라?”싶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기시감(旣視感)은 근거가 있었다. 꼭 50년 전 1956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의 한일 국교정상화 특별담화다.
반세기 전의 특별담화가 톤이 높고 강렬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 논리와 역사 인식은 완전 닮은꼴이다. 참고로 담화 하루 전날 대학생 1만여 명이 벌인 이른바 굴욕외교 반대 시위로 서울 시내는 난리 몸살을 앓았는데, 그래서 박정희 목소리에는 격앙된 감정이 짙게 묻어난다.
“나는 국민 일부 중에 한·일 교섭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 또는 군사적·경제적 침략을 자초한다는 등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매국적이라고 극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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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28일 오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장관 회담을 마치고 청와대를 방문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과 인사하고 있다./사진=청와대 홈페이지 |
핵심은 대일 콤플렉스를 접고 미래로 나가자는 제안인데, 반세기 역사는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당시 박정희의 속내를 새삼 증언해줬던 게 몇 개월 전 김종필(JP)의 중앙일보 연재물 ‘소이부답(笑而不答)’의 이 대목이다.
“필요하면 원수와도 손을 잡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다. 반일(反日)보다 어려운 게 용일(用日)이란 얘기는 나와 박 대통령이 종종 나눴던 대화 주제다.”(중앙일보 5월11일자 6면)
한국이 미얀마·인도네시아·필리핀과 달랐던 점
그때 JP는 말했다. 박정희는 대일 청구권자금을 받아 종합제철소를 만들고 경제개발에 집중하자며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게 일본한테 배상금을 받았던 미얀마·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 등과 현대 한국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라는 지적인데, 그게 맞는 소리다.
내가 알기에 인도네시아는 1958년 배상금 8억 달러를 받아 내 그 돈으로 자카르타에 사리나 백화점을 먼저 세웠고, 4개의 호텔(인도네시아, 암발쿠모, 샘도라비치, 발리비치)을 거푸 세웠다. 말로는 관광 인프라 차원이라고 둘러댔지만, 그걸로 그 나라가 과연 빈곤을 탈출했던가?
꼭 반세기 전 박정희 특별담화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그가 한일국교 정상화로 굴욕외교를 했다고 주장하거나 친일파라고 하는 정치적 바보, 역사인식의 얼간이들이 새겨들어봄직한 가슴 철렁한 언어다.
“지난 수십 년간 아니 수백 년간 우리는 일본과 깊은 원한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말살하였고 우리 부모·형제를 살상했습니다. 과거만을 따진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얘길 정리하자. 어제의 원수라도 손을 잡는 게 진정한 용기이자, 국제사회의 생존법이다. 달리 말하면 1960년대의 놀라운 성취란 한일국교정상화(1965년 6월)와 월남 파병(1965년 10월)이란 박정희 식의 큰 포석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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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병세 외교장관(오른쪽)과 일본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이 28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협상 최종 타결을 발표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아버지 대통령과 딸 대통령이 구사한 ‘개방형 대전략’
그게 ‘개방형 대전략’이다. 과거사에서 벗어나 미래로, 농업국에서 수출경제국가로 그리고 한반도에서 벗어나 태평양으로 성큼 발을 내딛었기 때문에 어제의 성공이 있었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이후 반세기, 박근혜 대통령의 위안부 합의는 그 가치를 새삼 재확인해줬다. 그래서 소중하다.
조선왕조 이래 한국역사에는 개방형 대전략 대신 안으로 움츠러들려는 수구적 자폐(自閉)의 힘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괴이쩍은 구조다. 그걸 추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즐겨 동원하는 게 민족주의의 힘이고, 요즘은 좌파세력이 노골적으로 애용한다.
박정희가 굴욕외교 타령을 질타했던 게 언제인데, 지금도 그런 말을 일삼는 무리가 있다. 누구이겠는가? 어제 칼럼에서 한일 외무장관 합의에 이의제기를 할 것으로 지목했던 정대협이란 좌파단체다. 그들이 이번 합의를 ‘굴욕적 외교’라고 다시 표현했다. 그들은 어제 합의가 외교적 담합이라고 힐난하기도 했다.
반일 민족주의의 방패막이 속에서 반(反)대한민국, 반미운동을 해온 저들이 한일관계가 정상화되는 징후에 화들짝 놀라고 있다는 증거인데, 그런 방해공작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개방형 대전략은 성공했다. 역사 교과서 문제와 함께 이번 위안부 회담 극적 타결이 비정상의 정상화의 큰 걸음으로 기록될 것도 당연하다.
놀라운 일이다. 집권 3년 차에 개혁 드라이브를 더 강하게 걸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괴력의 뒷심 때문인데, 이참에 그가 강조했던 4대 개혁(노동, 공공부문, 교육, 금융)도 힘을 받기를 우리는 원한다. /조우석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