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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미 소설가 |
‘K뷰티’의 기틀을 세운 아모레퍼시픽 서성환 회장
아모레퍼시픽의 현주소
2009년 1월 29일 전국 25개 롯데백화점 가운데 매출순위가 높은 대도시 7개점에서 세계적인 브랜드인 샤넬화장품(이하 샤넬)이 철수했다. MD(매장진열) 개편을 앞두고 위치 변경과 축소를 요청하는 공문을 9차례 보내자 자존심이 상한 샤넬이 짐을 싸버린 것이다(몇 년이 지난 후 다시 복귀했지만). 이후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들의 각축장인 백화점 1층 매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 브랜드는 무엇일까. 바로 국내 브랜드인 (주)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였다.
당시 (주)아모레퍼시픽의 브랜드 가운데 설화수, 헤라, 아모레퍼시픽, 라네즈가 백화점에 입점한 상태였는데 4개 브랜드 매출을 합산 한 게 아니라 설화수 한 브랜드만으로 매출 1위를 기록했다는 사실 앞에서 세계 유수의 화장품 회사들이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했다.
2003년에 설화수가 롯데백화점 매출 1위로 올라선 뒤 지금까지 수성하고 있다. 당시 매출은 2위를 거의 더블스코어 차이로 앞선 수준이었다. 2003년은 태평양화학공업을 창업한 서성환 회장이 세상을 떠난 해이자 아모레퍼시픽이 미국에 진출한 해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중화권을 넘어 세계 최대 화장품 시장인 북미에서 선전하는 중이다. 세계 최대 화장품 편집매장인 세포라에서 유명 화장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아모레퍼시픽은 헐리우드 유명 배우들이 많이 쓰는 명품으로 떠올랐다.
서성환 회장은 1960년대부터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창조하여 세계와 소통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해외 진출을 시작했다. 그의 생전에 이미 많은 결실을 맺었고 튼튼한 바탕아래 지속적으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아모레퍼시픽은 1945년 9월, 태평양화학공업사로 출발해 태평양화학(1987), 태평양(1993)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6년에 지주회사인 태평양과 사업부문 회사인 아모레퍼시픽으로 나누었다. 2011년에 태평양을 아모레퍼시픽그룹(아모레G)으로 변경했고 현재 유가증권시장에는 지주사인 아모레G와 아모레G우, 아모레퍼시픽과 아모레퍼시픽우 등 4개가 상장돼 있다.
자본금 3억7,000만원으로 설립한 아모레퍼시픽은 1973년에 연간 매출 82억 원을 기록했다. 2014년 아모레퍼시픽의 매출은 4조7,119억 원으로, 이 가운데 해외 매출이 20%에 육박하는 8,325억 원이다. 선대 회장이 타계한 후 사세가 기울어진 기업이 많으나 아모레퍼시픽은 여전히 순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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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아모레퍼시픽 창업주 서성환 회장의 젊은 시절. 서성환 회장은 1947년 서울 남대문시장 부근 남창동에서 태평양화학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화장품 제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사진=아모레퍼시픽 제공 |
서성환 회장의 차남인 서경배 현 회장이 보유한 주식의 가치는 2014년 기준으로 6조원을 넘었다. 서경배 회장은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과 현대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내 재벌총수 3위에 올랐다.
아모레퍼시픽은 3대를 채 이어가지 못하고 몰락하는 회사들이 많은 대한민국에서 주목해야 할 기업이다. 확장 일로를 걷다가 몸집을 이기지 못하고 몰락하는 기업들, 승계할 시점이 빠르거나 늦어 부실해진 기업들이 벤치마킹할만하다. 또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창의적으로 시행될 때 더 큰 시너지가 난다는 것도 알려준다.
기업가 정신이 제대로 발현될 때 기업이 튼튼해지고, 새로운 영역이 확장될 수 있다. 올바른 기업가 정신은 국력을 상승시키고, 문화를 확장시키며, 일자리를 창출한다. 아모레퍼시픽은 현재 수출산업의 중요한 축인 화장품 산업을 선도해왔고, 세계의 눈길을 끈 K뷰티를 꽃피워 파생산업을 견인하고 있다. 또한 차 문화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당당히 녹차 문화를 뿌리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소년시절부터 시장을 경험
아모레퍼시픽을 창업하여 성장시킨 서성환 회장이 화장품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 윤독정 여사는 1932년 개성에서 창성상점을 열어 동백기름을 비롯한 미안수와 크림 등 화장품을 제조․판매한 여장부였다. 좋은 원료로 만든 화장품을 팔며 사람들에게 인정까지 베푸는 어머니를 통해 서성환은 어릴 때부터 깐깐한 개성상인의 정신을 익혔다.
또한 소년시절부터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서울 남대문 시장을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시장을 체험했다. 어머니의 권유로 개성 최초의 백화점인 김재현백화점에서 창성당제품을 팔면서 유통과 판매과정을 배우고 세련된 일본화장품을 눈여겨보며 '문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어머니를 도우며 꿈을 키우던 성환은 1945년 1월 일제 강제 징용으로 전쟁터로 끌려간다. 그해 8월15일, 일본이 항복을 했을 때 중국 베이징에서 광복을 맞았다. 바로 귀국할 길이 없어 중국에서 염색약을 비롯한 작은 물건을 팔며 귀국날짜를 기다렸다. 500년의 역사를 가진 베이징 다지란 시장에서 온갖 진귀한 물건들과 시장의 질서를 보며 다시한번 시장경제에 대한 산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1946년 2월 23일 고향으로 돌아온 성환은 창성상점의 상호를 태평양으로 바꾸고 그간 보고 배운 시장의 법칙을 실현해보고자 사업 전면에 나선다. 해방 직후 화장품 산업은 호경기였다. 시장을 지배하던 일본 사람들이 사라지자 한국 사람들끼리 경쟁을 하게 된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 전까지 보건사회부가 집계한 전국의 화장품 회사는 100개가 넘었다. 신고하지 않은 가내수공업자들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화장품 천하라고 할 만 했다.
그 시절 가장 큰 어려움은 좋은 원료를 구하는 일이었다. 싸구려 원료로 화장품을 만드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성환은 '좋은 원료가 좋은 제품을 낳는다’는 신념 아래 원료 구하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한 가지 원료를 많이 구하면 남는 원료를 다른 원료와 바꾸는 물물교환을 했다. 싸구려가 넘쳐나는 가운데서도 비싼 고급 화장품이 잘 팔렸다. 가격이 아무리 싸도 사람들은 품질을 따진다는 것을 깨달은 성환은 좋은 원료의 중요성을 마음에 새겼다.
사선을 넘나들며 큰 세상을 경험하고 온 성환은 가족들에게 서울로 이사 가자고 제안했다. 1947년 서울 남대문시장 부근 남창동에서 태평양화학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화장품 제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역시 품질이었다. 원료 구하기에 총력을 다한 결과 영등포구 당산동의 한 공장 창고에서 다량의 원료를 확보했다. 이 행운이 성환의 성공 시작점이었다. 성환은 디자인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서 '메로디크림’을 개발했고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사업이 서서히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도 화장품 제조를 쉬지 않았다. 전쟁 중에도 사장은 활기가 넘쳤다. 성환은 연구를 거듭해 한국 최초로 순 식물성 'ABC 포마드’를 개발했다. ABC 포마드에 이어 개발한 ABC수백분, ABC유액까지, 태평양 제품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태평양은 화장품 고급화를 선도하는 회사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1954년에 서울로 돌아온 성환은 나리스화장품을 인수하여 후암동에서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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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은 지난 2015년 8월 21일 동물실험 대체 시험법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생명윤리 구현을 위한 학술 기여 우수단체'로 선정됐다./사진=아모레퍼시픽 제공 |
기술제휴와 연구가 성공의 열쇠
국내화장품 회사에 연구라는 개념이 없던 1954년, 서성환은 장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개설했다. 좋은 원료와 연구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했기 때문이다. 규모가 적은 초라한 연구실에서 외국제품과 똑같이 만들기를 거듭하다가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 냈다. 1957년에는 연구원을 독일로 유학 보내 선진 유럽의 생산시설과 원료에 관한 정보, 화장품의 유행조류와 시장동향을 꾸준히 입수했고 유럽의 최신 설비를 수입했다.
1959년에는 프랑스 거대 화장품 회사인 코티사와 기술 제휴를 맺었다. 국내 장업계에는 유례가 없는 사건으로 태평양의 새 역사가 시작되는 출발점이었다. 1960년 7월 서성환은 코티사의 초청으로 40일간 유럽을 방문했다. 엄청난 규모의 코티사를 비롯하여 유럽 여러 나라 공장을 돌며 앞선 기술과 선진문화를 접했다.
외유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기업인들은 간담회를 열어 서성환 회장이 보고 온 선진문명에 관한 얘기를 경청할 정도로 해외에 나가기 힘든 시절이었다.
서성환은 현대적 시설의 대규모 공장과 연구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했다. 1962년에 외국 화장품과의 본격 경쟁을 펼치겠다는 꿈을 품고 영등포에 건평 2,400평의 공장을 지었고, 1964년에 국내 최초로 '오스카 화장품’을 수출하게 된다. 1966년에는 세계 최초 인삼 화장품을 출시했다.
1973년 4월 15일자 <선데이서울>과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30년 가까이 80% 가까운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며 화장품 최대 메이커로 군림해온 비결’을 묻자 서성환 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판매보다 기술 개발에 더 힘을 쏟아 소비자가 제품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돈이란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벌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덕 있는 사람으로 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한다면 성공 안할 수가 있겠어요?”
1978년에 설립한 태평양 기술연구소는 외국 유명화장품 회사와 비교하여 결코 뒤지지 않는 규모와 설비를 갖췄다. 서성환 회장이 좋은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의 신뢰를 얻겠다는 기업가정신을 발휘했기에 아모레퍼시픽이 국내 1위를 수성하고 해외 기라성같은 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아모레퍼시픽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화장품 원료평가-개발완료 화장품의 안정성 평가-제품 출시 후 불만관리’라는 3단계 시스템을 가동하며 새로운 물질 개발과 소비자들의 요구를 파악하는데 주력해왔다.
이 기술연구소에서 국내 최초로 생체 보습 물질인 히알루론산을 만들었고 세계 최초 인삼 화장품인 진생삼미가 설화수로 이어지고 있다. 세계 최초로 콩에서 미백·보습 성분인 오-디하이드로시이소플라본을 발견해 화장품 성분으로 만드는 등 화장품 시장의 기술 혁신에 앞장서고 있다.
'아모레’ 브랜드와 방문판매
현재 아모레퍼시픽은 비싼 한방화장품 설화수부터 저가인 에뛰드까지 34개의 브랜드로 구성되어 있다. 화장품, 바디용품, 향수, 네일 제품으로 나뉘는데 브랜드를 세분화한 것은 성별, 나이별, 가격대별, 백화점용, 일반 매장용, 홈쇼핑용, 방문판매용, 면세점용 등 소비자들이 원하는 제품을 어디서든 구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34개의 브랜드를 세분화했지만 결국 '아모레’라는 이름으로 통일된다. '아모레’라는 브랜드의 후광이 커서 회사명까지도 '태평양’에서 '아모레퍼시픽’으로 바꾸었을 정도이다.
1964년 3월 태평양은 일본화장품 시세이도와 기술제휴를 한 뒤 방문판매 전용 제품의 브랜드명을 공모했다. 100여 편의 응모작 가운데 두 사람이 '아모레’를 제안했고 이 이름을 새로운 브랜드로 정했다.
1959년 이탈리아 영화 <형사>에 삽입된 노래 <시모메 모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유행되었다.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미오~’로 시작되는 이 노래가 하루에도 몇 번씩 국내 라디오에서 흘러나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아모레라는 친숙한 브랜드를 만들어 1964년에 방문판매라는 획기적인 유통을 시작했다. 1960년대의 유통은 도·소매를 통한 판매와 이·미용업소 및 지정판매소를 이용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지정판매소는 본업이 따로 있는 데다 타사의 화장품도 취급했기 때문에 판매에 소극적이었다.
방문판매의 시초를 따지자면 조선시대에 등장하여 일제강점기에도 명맥을 유지했던 방물장수라고 할 수 있다. 1964년에 이미 '성미 쥬리아’라는 국내 회사가 방문판매를 실시해 장업계 10위권 밖에서 3위로 급격히 부상한 상황이었다. 미국의 에이본과 일본의 폴라도 일찍이 방문판매를 실시하여 크게 성공한 바 있다.
서성환은 사례 연구와 내부 검토를 거쳐 방문판매를 도입했다. '제품-조직-인력’이라는 삼박자를 갖추어 방문판매를 실시하자 초기부터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다. 방문판매 대리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아모레퍼시픽은 화장품 업계 선두주자 자리를 확고하게 다졌다. 성공비결은 초창기부터 '우수한 품질, 3대 원칙(방문판매․정찰판매․구역준수), 애프터서비스 보장, 후불제’를 철저히 지키면서 고객들의 신뢰를 얻은 데 있다.
진정한 기업가는 새로운 가치나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가 정신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도전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활력이야 말로 기업가정신의 핵심이다. 방문판매는 여성들, 그 중에서도 많은 전쟁미망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방판제도’는 시판시장이 활성화되던 1980년대부터 점차 비중이 줄어들기 시작해 1990년 중반에 다소 주춤했으나 '아모레 카운슬러’라는 이름으로 재정비하여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카운슬러들이 연간 5,0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으니 여전히 파괴력이 있는 판매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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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레퍼시픽은 올해로 창업 71주년이다. 사진은 지난 2015년 9월 5일 경기도 오산 뷰티사업장에서 창립 70주년 기념식에서 발언하고 있는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의 모습이다./사진=아모레퍼시픽 제공 |
한방화장품으로 세계를 홀리다
아모레퍼시픽의 성공은 '연구’에 있고 가장 큰 연구실적은 '한방화장품’이다. 아모레퍼시픽의 브랜드는 34개 브랜드 가운데 최고의 효자 브랜드는 다름 아닌 설화수이다.
기업의 새로운 상품 개발은 소득을 올리기 위함이지만, 소비자의 편익을 높이고자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업가 정신이다. 기업가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미래가 바뀐다. 기업의 핵심적인 자산은 바로 기업가이고, 올바른 기업가 정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엄청난 연구비를 쏟아 부어 만든 한방화장품 설화수는 소비자의 편익에 부합하는 화장품으로 부상했다. 설화수는 2008년에 이미 연간 매출액 5,000억 원을 넘어섰는데 소비재 업종을 통틀어 한 브랜드의 매출이 연 5,000억 원대를 올린 예는 흔치 않다. 기업의 소득까지 높아졌으니 기업가 정신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아모레퍼시픽은 1967년부터 한방연구를 시작했다. 인삼유효성분을 추출해 특허를 획득한 뒤 1973년에 최초 한방화장품 '진생삼미’를 선보였다. 진생삼미는 34개국에 수출돼 2,00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린 바 있다. 이후 연구를 거듭해 1987년에 '설화’를 출시한 데 이어 1997년에 경희대 한의대와 공동연구를 통해 '설화수’를 선보였다.
설화수에 들어가는 한방성분은 100% 국내산 한약재이다. 2만 가지의 한방성분 중 3,000 가지를 추려낸 뒤 최종적으로 30가지를 엄선, 피부에 미치는 효과를 연구해 적용한 것이다. 설화수의 기본 원료가 되는 자음단滋陰丹은 다섯 가지 한약재를 혼합해 특허를 받은 물질이다.
다른 브랜드들이 스킨케어부터 색조 제품까지 수백 가지 품목을 내놓는 것과 달리 설화수는 스킨케어 45개 제품에 공을 들이고 있다. 설화수 재구매율은 50%를 넘는데 설화수 매출의 75%는 방문판매 사원들이 올리고 있다. 업계에서는 제품력과 탄탄한 판매망을 갖춘 설화수를 넘볼 브랜드가 없다고 분석한다. 35세 이상 여성들이 주고객층이지만 20대 여성은 물론 2008년에 출시한 남성용 '정양라인’으로 남성 고객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화려한 화장품 광고 홍수 속에서 설화수가 단 한 번의 TV 광고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검증된 제품의 효능이 입 소문을 타고 퍼져나가면서 고객이 늘어났다. 1997년 처음 출시된 이후 2014년 1월 기준으로 2,000만개가 판매돼 누적 판매액 1조원을 돌파한 설화수의 윤조에센스(90ml, 12만원)는 국내 브랜드 중에서는 단일 품목 중 최초로 매출 1조원을 넘는 기록을 갖고 있다. 기초화장품은 해외유명브랜드가 아닌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가 명품 대열에 올랐고, 주요 고객층에 중국의 부자 소비자들도 끼어 있다.
대만의 경우 화장품 판매액의 90%를 수입 화장품이 차지하지만 우리나라는 수입 화장품이 전체 매출액의 30∼40% 정도를 차지하는데 국산화장품 판매율이 높은 건 한방화장품이 큰 영향을 미쳤다. 국내 2위 브랜드인 LG생활건강이 약진한 것도 한방화장품 '후’의 영향이 크다.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와 헤라는 중국 부유층이 면세점에서 싹쓸이하는 제품으로 자리잡았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인 마몽드·라네즈·에뛰드·이니스프리는 관광객들이 손쉽게 구매하는 K뷰티(화장품 한류)의 대표주자이다. 아모레퍼시픽의 저가 라인이 세일을 시작할 때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를 할 정도 반응이 뜨겁다.
기업가의 선택이 적중하여 경제적인 이득은 물론 문화까지 선도한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만한 일이다.
한국을 유행 중심지로!
유행에 민감한 여성들은 최고의 제품을 추구한다. 특히 쏠림현상이 심한 우리나라 여성들의 선택은 세계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유행의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핸드백과 향수, 구두는 외국산 제품을 선호하지만 화장품만은 우리나라 제품을 사용한다. 이는 우리나라 화장품이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958년 태평양이 국내 최초로 발간한 월간 미용정보지 <화장계>는 후일 <향장>으로 제호를 바꾸어 발행했는데 1980년대에는 매달 200만부 이상 발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모레퍼시픽은 1971년에 국내 최초 메이크업 캠페인 실시했다. 이 잡지와 TV광고를 통해 아모레퍼시픽은 '트로픽 오렌지, 미스티 퍼플, 하니 베베, 햅번 브론즈, 섹시 넘버원’ 등의 메이크업 캠페인을 실시하여 유행을 주도했다. 예를 들어 1996년 1월부터 3월까지 단 두 달간 벌인 춘계 캠페인에서 '섹시넘버원’ 립스틱이 153만개가 팔려 1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20년 넘게 이영애를 수식하는 광고문구 '산소같은 여자’
메이크업 캠페인이 가능했던 것은 '컴퓨터 미인’ 황신혜와 '산소같은 여자’ 이영애같은 최고의 미인을 발굴하여 자사 모델로 기용했기 때문이다. 최고의 미녀가 바르는 화장품에 대한 선망은 대단했다. 당대 최고의 미녀들을 화장품 모델로 기용한 광고 전략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김태희, 전지현, 이나영, 송혜교, 한가인, 고소영, 박신혜 등이 아모레퍼시픽의 모델이었거나 현재 모델이다. 장동건, 조인성, 현빈, 송중기 등 남자도 당대 최고 미남들만 기용하고 있다.
화장이 진하고 화려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우리나라 여성들이 이제 세계의 유행을 주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팔리는 제품이 전 세계에서 잘 팔리자 세계 화장품 회사들의 우리나라를 테스트마켓으로 삼게 된 것이다. 해외 유명 화장품 회사 관계자들은 “세련되고 까다롭고 변화무쌍한 한국 여성들의 기호에 맞으면 세계 어디서나 통한다”고 입을 모은다. 아모레퍼시픽은 한국에서 우리나라 여성들의 기호와 까다로움을 통과한 제품들로 해외 공략을 해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기업가는 물줄기를 바꿀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해외 유행을 무작정 따르기보다 국내에서 유행흐름을 만들어 대한민국만의 미의 기준을 만든 것은 기업가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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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과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그룹 회장 등이 작년 6월 26일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아모레퍼시픽이 지원하는 제주 바이탈 프로젝트에 대해 대화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오설록으로 한국 차 문화 선도
서성환 회장은 사업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파트너를 만나기 위해 1960년에 홀로 프랑스에 갔다. 경비행기를 타고 6개국을 거치는 동안 그의 눈을 끈 것은 화장품이 아닌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1960년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시는 것이라곤 숭늉밖에 없었다. 서성환은 커피마시는 이들을 부럽게 바라보며 '우리도 한국 고유의 차를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오설록이다.
1970년대 중반 세계 장업계 최초로 차(茶) 사업을 시작하자 모두가 안 될 거라며 반대했다. 서성환은 “차는 당장 돈이 벌리는 사업은 아니다. 이것은 문화사업이다. 계속 적자가 나겠지만 이 사업이 성공하면 태평양은 모든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 이미지를 얻을 것이다”라며 임원들에게 지켜봐달라고 부탁했다.
서 회장은 제주도에 황무지 49만5000m²(약 15만 평)을 개간했다. 현재 연간 1,000톤 이상의 유기농 차 원료를 생산하고 있으며 다원과 녹차 공장, 설록차 박물관을 건립했다.
전통차 보급을 위해 1980년부터 국내 최초로 녹차심포지움을 개최하고 있으며 설록차 교실운영, 차 전문지 <설록차> 창간, 사진공모전 등을 통해 녹차의 다양한 효과를 홍보하고 있다. 또 전통문화인 시조를 계승하고자 '설록차 문화상’을 제정하여 소중한 녹차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서울 시내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 위치한 다원과 티하우스는 차를 마시면서 차를 감상하고 구입할 수 있는 곳으로 아모레퍼시픽의 청정이미지를 고양시키는 효과를 낸다. 기업의 사회 환원을 '문화보급’을 통해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차 산업은 서성환 회장이 끝까지 관심을 갖던 분야여서 아모레퍼시픽 그룹 차원에서 각별히 신경쓰고 있다. 서 회장의 바람대로 오설록은 아모레퍼시픽의 이미지를 고양시켰다.
기존의 방식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업가정신이 다. 서성환 회장이 창의성을 발휘하여 차 사업이라는 혁신을 일으킨 이래 여러 회사가 다양한 차를 생산하고 있다. 가마솥을 씻은 물을 먹는다고 갸우뚱 거리던 외국인들에게 이제 당당히 우리의 차를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인물
1945년 중국에서 광복을 맞은 서성환 회장은 당시 여러 문물이 교류하던 중국 시장을 둘러보며 '아시아적인 것이 세계의 중심’이 되리라 확신하면서 '화장품을 통해 아시아의 미(美)를 세계에 전파하겠다’고 다짐했다. 서회장의 다짐이 결실을 본 비결은 일찌감치 구조조정을 실시한 것과 능력있는 차남을 경영전면에 기용한 것에 있다. 1990년대 초반 주력 사업인 화장품 외 건설, 증권, 패션, 야구단, 농구단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이면서 그룹의 수익성이 크게 악화됐다. 1994년 경영 전면에 나선 차남 경배와 함께 서성환 회장은 문어발을 정리하고 화장품을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전면 재편했다.
1995년 창립50주년 기념일에 새로운 출발을 선언한 아모레퍼시픽은 1997년 외환위기가 몰아닥쳤을 때 느긋할 수 있었다. 당시 여러 회사가 쓰러졌으나 한 발 앞서 구조조정을 하고 '화장품’으로 사업을 단순화하여 집중한 아모레퍼시픽은 흔들림 없이 나아갔다. 적절한 시기에 후계자를 지정하고 함께 위기를 극복한 것이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서경배 현 회장이 경영전반에 나선 이후 아모레퍼시픽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중이다.
우리나라 화장품은 K뷰티라는 이름으로 K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이어폰으로 한국 가요를 들으며 가방 가득 한국 화장품을 싸들고 귀국길에 오른다. K뷰티 시대를 구가하게 된 배경에 아모레퍼시픽 서성환 회장이 있다는 건 아무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한독화장품 김신권 회장은 2014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성환 회장에 대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인물”이라고 평했는데 화장품 불모지에서 K뷰티 터전을 만들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2003년 타계할 때까지 60여 년간 국내 화장품 업계를 이끌며 K뷰티의 초석을 놓은 서성환 회장. '소비자를 속이지 말고 소비자에게 더 큰 이익을 주라’는 것이 그의 경영철학이다. 세계적 화장품그룹들이 아모레퍼시픽 제품을 벤치마킹하는 시대를 그가 연 것이다.
2015년 창립 70주년을 맞이한 아모레퍼시픽그룹은 해외 사업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3대 축은 중화권을 포함한 아시아, 미주, 유럽이다. 미주 사업은 프리미엄 브랜드 아모레퍼시픽·설화수와 저가 브랜드 라네즈를 중심으로 유통망을 확장하는 중이다. 2015년 3월, 1대10으로 액면가 분할을 한 아모레퍼시픽의 주가가 더욱 치솟고 있다. /이근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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