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문상진 기자]좋은 이름이 그 실체의 본질까지 좋게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아름다운 가게’가 반드시 아름다운 곳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내세우는 ‘참교육’이 반드시 참된 교육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사례에 이제 우리는 ‘국회선진화법(국회법)’을 추가시켜야 할 것 같다. 선진화(先進化)라는 허울 좋은 이름이 무색하게도 국회선진화법은 안 그래도 문제 많은 우리 국회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기에 그렇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법안의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국민들은 19대 국회가 회기 내내 법안 맞바꾸기, 쟁점법안 처리 지연 등의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는 모습만을 봐왔다.

보다 못한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13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선진화법에 대해 일침을 놨다. 박 대통령은 최근 불거진 선진화법 개정 논란과 관련해 “(우리 정치권이) 선진화법을 소화할 능력이 안 되는 결과”라고 말했다. 2012년 5월 이른바 친박계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이 선진화법의 역사였음을 감안하면 동물국회였던 국회가 ‘식물 국회’로 퇴화했다는 대통령의 표현은 뼈 있는 독설이다.

새누리당은 이미 지난 11일 직권상정 요건을 완화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회선진화법이 의장의 직권상정 요건을 지나치게 강화함으로써 쟁점법안 처리가 계속 지연되는 사태를 막아 식물 국회에 생기를 불어넣겠다는 취지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국회선진화법 개정안 또한 현행 선진화법이 규정하는 절차를 밟아 처리될 숙명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떡하니 반대하고 있는 야당의 벽을 뚫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 국회의장은 국가가 ‘비상사태’에 직면했을 때 직권상정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국회가 국회다울 수 없는’ 현재의 상황은 국회의장이 직면할 수 있는 최악의 비상사태라 할 만하다. /사진=연합뉴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면 시선은 한곳으로 몰린다. 정의화 국회의장이다. 김용남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은 지난 12일 정의화 의장에게 선진화법 개정안에 대한 직권상정을 촉구했다. 아이러니한 현실을 뚫기 위해 불가피하게 법이 정 의장에게 부여한 힘을 이용해야만 하는 시점임을 상기시킨 것이다. 국회의장은 국가가 ‘비상사태’에 직면했을 때 직권상정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국회가 국회다울 수 없는’ 현재의 상황은 국회의장이 직면할 수 있는 최악의 비상사태라 할 만하다.

안타깝게도 정 의장의 현실인식은 안이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합’이란 말만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 여야 간에 타협한 것만을 처리할 수 있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그는 선진화법이 끼치고 있는 악영향에 대해 아직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놓곤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만 직권상정 대상이 된다”고 강변하고 있으니 그가 과연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인지 국회(혹은 야당)를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현재 국회에는 시급한 처리를 요구하는 민생법안이 산적해 있다.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기간제법안, 중장년들에게 재취업의 기회를 주려는 파견법안, 중공업분야의 공급과잉과 실적부진을 해소하려는 기업활력촉진법,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한 취업규칙 변경관련법안 등 하나같이 중요한 법안들이다.

지금 국회의 형세는 이와 같이 중대한 법안들이 국회선진화법이라는 ‘병목’에 걸려 답답하게 막혀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 의장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명분에만 사로잡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병목만 붙잡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과감하게 막힌 병을 깨뜨리고 새로운 그릇에 새로운 정치를 담는 일이다.

대국민담화에서 나온 박근혜 대통령의 일침으로 주사위는 다시 한 번 던져졌다. 응답하라, 정의화. 19대 국회가 ‘최악의 국회’로 남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 국회의장의 두 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