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방민준의 골프탐험(92)-소금이 물에 녹아들듯

PGA선수권 2회, US오픈 4회, 마스터스 2회, 디 오픈 1회 등 메이저대회만 9차례 우승하는 등 PGA투어 통산 57승의 골프영웅 벤 호건은 골프의 집중도를 얘기할 때 단골로 인용된다. 골프사가들은 호건을 골프 자체는 물론, 불굴의 투혼과, 무아지경으로 골프에 몰입하는 자세 등으로 모든 골퍼들이 본받아야 할 전범으로 평가하고 있다.

1954년 마스터스 대회 때의 일이다. 호건이 승부에 결정적인 퍼트를 하려는 순간 그의 다리 사이로 갤러리의 손을 벗어난 강아지가 지나갔다. 그러나 호건은 개의치 않고 퍼트를 해 홀인에 성공했다.
라운드가 끝난 뒤 기자들이 물었다.

“강아지가 퍼트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까?”
“무슨 강아지?”
호건은 전혀 모르겠다는 투로 대답했다.

마스터스 대회가 열리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코스의 파3 12번 홀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홀로 정평이 나있다. 1948년도 마스터스 챔피언인 클로드 하먼과 1951년 1953년도 챔피언 벤 호건이 함께 라운드 중이었다. 클로드 하먼이 먼저 쳐서 홀인원을 하여 갤러리를 열광시켰다. 다음에 친 호건은 버디를 기록했다.
13번 홀을 향해 걸어가며 벤 호건이 입을 열었다.

“클로드, 나는 오거스타 12번 홀에서 처음으로 버디를 해본 것 같애. 자네는 뭐 했나?”
“아 나는 홀인원 했잖아!”
“아 그랬어? 참 잘했네, 축하하네!”

벤 호건은 자기 골프에 집중하느라 완전히 삼매경에 빠져 함께 치는 사람이 홀인원을 한 사실조차 몰랐던 것이다.

1920년 브리티시 여자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19세의 조이스 웨더렛이 보인 집중력은 두고두고 골프사가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상대는 영국 여자선수권 4연승을 달성한 무적의 여왕 세실 리치. 하루에 두 라운드를 도는 결승전이었는데 오전 라운드에서 리치가 6홀을 이긴 상태. 누구도 리치의 5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후 라운드에서 조이스가 맹추격, 드디어 15번 홀에서 올 스퀘어가 되었다.

17번 홀에서 조이스가 5m 퍼팅을 넣기 위해 어드레스를 취한 순간, 그린에서 50m 떨어진 철로로 열차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갤러리들은 당연히 조이스가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어드레스를 취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열차바퀴의 굉음이 그린을 에워싸고 있는 그 순간 조이스의 퍼터를 떠난 볼은 그린 위를 구르더니 홀 속으로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대역전극이 벌어진 것이다. 첫 출전으로 빅 타이틀을 차지한 조이스의 충격적인 데뷔전이었다.

기자회견에서 17번 홀의 퍼트에 대해 질문이 쏟아졌다.
“열차가 지나가는데 왜 다시 어드레스를 하지 않았죠?”
“왠지 모르겠는데요.”
“그때 급행열차가 지나갔지 않습니까. 그 경우 대부분 어드레스를 중지하고…”
“설마? 저는 몰랐습니다.”

   
▲ 스윙이나 구질 등으로 보아 충분히 좋은 스코어를 낼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한 골퍼들은 집중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어딘가 고질병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고 레슨프로를 찾고 동료들에게 원 포인트 레슨을 받지만 고쳐질 까닭이 없다.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삽화=방민준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의 손자로, 옥스퍼드대학을 나와 골프가 좋아 평생 주옥같은 골프관련 글을 써온 버나드 다윈은 훗날 『조이스 웨더렛과의 산책』에서 이렇게 썼다.
“그녀는 정말 급행열차가 지나가는 것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누구든지 볼을 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집중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바로 조이스 웨더렛이다.”

조이스 웨더렛은 1920년 19세 나이로 처녀 출전한 전영 여자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28세에 은퇴할 때까지 9년간 영국을 포함한 유럽대회에서 모두 38번이나 우승했다. 그가 패한 것은 두 번으로, 사상 최강의 아마추어골퍼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녀의 아버지 헨리 뉴턴 웨더렛은 『완전한 골퍼(Perfect Golfer)』라는 명저를 남겼다.

골프코스에 나가보면 “많이 치는 게 남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 이상 샷을 많이 날릴수록 이익이라는 생각인데, 이 생각은 골프를 긴장감 없는 게임으로 만드는 첩경이다.

반대로 샷을 많이 날리기보다는 샷 하나하나가 금싸라기나 다름없는 비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샷을 그렇게 성의 없이 날릴 수는 없을 것이다. 더블보기를 해놓고 타당 원가가 적게 들었다고 자위하는 것은 비겁한 자기위안일 뿐이다.

샷 하나하나를 귀중히 여긴다 함은 바로 샷마다 정성을 쏟고 철저하게 게임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이래야 비로소 골프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많은 골퍼들이 18홀을 돌고 나서 9홀 혹은 18홀을 더 돌았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이 경우 대개는 초반에 몸이 덜 풀려 스코어가 시원치 않았다가 후반에 접어들어서야 리듬을 찾고 몸도 풀려 볼이 제대로 맞기 시작했다는 뜻인데 이것은 그만큼 집중도가 떨어진 골프를 했다는 증거다.

정말로 모든 샷마다 혼신을 기울려 게임에 임한다면 18홀을 돌고 나서 그렇게 맨송맨송 할 까닭이 없다. 게임에 몰입해 18홀 동안 최선을 다하는 골퍼는 날씨와 관계없이 등줄기에 진한 땀이 배고 라운드를 끝내고 나면 절로 “이제야 끝났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내뱉게 된다. 이것이 정상이다.

18홀을 돌고도 자주 성이 안 찬다면 그것은 힘이 남아서가 아니라 골프에 몰입하지 못하고 건성으로 라운드 했다는 증거다.

스윙이나 구질 등으로 보아 충분히 좋은 스코어를 낼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한 골퍼들 역시 집중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어딘가 고질병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고 레슨프로를 찾고 동료들에게 원 포인트 레슨을 받지만 고쳐질 까닭이 없다.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다른 것은 다 좋은데 퍼팅이 나쁘고 그래서 스코어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바로 집중도가 낮기 때문이다. 퍼팅은 고도의 집중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선 성공확률이 매우 낮다.

집중이란 몰입이요, 삼매다. 어느 한 가지에 몰두해 다른 것을 잊는 것이다. 집중도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상념의 진공상태가 좋다는 말이다. 진공은 고도의 집중에서 나온다. 소금조각이 물에 녹아 물과 하나가 되듯, 골퍼가 골프에 몰입해 무아지경에 이르면 스트로크에 흔들림이 없고 걸림이 없다.

골프 교과서들은 기복 없는 플레이를 하려면 두 가지 3C를 갖춰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것은 Confidence(자신) Concentration(집중) Control(자제)의 3C와 Consistence(견실) Composure(침착) Courage(용기)의 3C다. 이중에서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를 꼽으라면 집중을 선택하고 싶다.

매는 한 마리의 들쥐를 잡기 위해 3~5시간을 들판 위 상공을 비행하는 끈기를 갖고 있다. 변변찮은 먹잇감이지만 매는 상공에서 한순간도 한눈을 팔지 않고 들판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살피고 있다가 먹잇감이 사냥하기에 적당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내리꽂히듯 수직강하, 순식간에 먹이를 발톱으로 움켜쥐고 날아오른다.

매의 집중력은 바로 골퍼에게 필요한 것이다. 두 번 다시 같은 샷을 날릴 수 없다. 온갖 상황에서 맞게 되는 모든 샷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샷을 허투루 칠 수 있겠는가. 볼이 어떤 악조건에 놓여 있다 해도 최선을 다해 플레이할 가치가 있지 않은가. 아무리 고달픈 삶이라도 살아갈 가치가 있듯.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