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우 기자

농어촌엔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情)이 흘러넘칠 거라는 고정관념. 노인들은 감정 조절에 능숙하고 분노를 지혜롭게 조절할 수 있을 거라는 편견. 그러나 최근의 사건들은 기존의 관념을 부수고 있다.

최근 충남 부여에서 70대 김씨가 30년을 알고 지낸 50대 이웃 최씨를 ‘농약 두유’로 살해하려던 사건이 발생했다. 김씨가 16개들이 두유 한 상자에 무색무취 농약 ‘메소밀’을 넣어 마치 선물처럼 최씨의 집 앞마당에 놓아두었던 이유는 ‘나이도 어린 최씨가 나(김씨)에 대해 험담을 하고 생활용수를 농업용수로 쓰는 것을 보고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경북 상주의 한 마을에선 사이다를 마신 할머니 6명이 숨지거나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해 온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세칭 ‘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의 범인인 82세의 노파 박씨는 이미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녀는 지금도 범행사실을 부인하면서 여전히 노년의 정직성을 믿고 싶어 하는 여론을 흔들고 있다.

일련의 사건 직후, 사람들은 저마다 느낀 충격을 표현하기 위해 ‘이웃사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수십 년씩 알고 지낸 친척 같은 사이끼리 어떻게 죽일 생각을 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범인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한 ‘메소밀’이라는 농약은 오래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가해자들의 살인충동을 전혀 억제하지 못했을 뿐더러 도리어 증폭시킨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진딧물과 담배나방 방제에 쓰는 원예용 농약으로 개발된 메소밀은 체중 1㎏당 치사량이 0.5∼50㎎인 ‘고독성’으로 분류되지만 아무런 색깔도 띠지 않고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는다. 감쪽같이 해충을 박멸할 수 있다는 뜻이지만 바꿔 말하면 감쪽같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2004년 대구에서는 벤치에 놓인 ‘메소밀 요구르트’를 아무런 의심 없이 마신 시민 10여명이 구토 증세를 보이다 일부가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아직까지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

   
▲ '농약 사이다 사건'을 일으킨 박모(82) 할머니가 작년 7월 20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 제1호 법정에 들어가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사람들은 메소밀을 사건의 ‘주범’으로 표현하며 애써 가해자들의 내면에 숨겨진 추악함에서 시선을 돌리려 한다. 누구도 노년의 야만과 폭력성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물론 메소밀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이 농약에 색깔과 냄새를 주입하면 메소밀을 이용한 살인사건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불편한 진실은 농촌 노인들의 내면이 급속도로 빠르게 황폐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중 상당수는 노년층에서, 그리고 농촌 지역에서 자행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2015 한국의료질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지역별 자살률 1위는 충남 지역이었다(인구 10만 명당 30.9명). 충북이 26.6명, 전북이 25.4명을 기록한 가운데 서울은 21.7명을 기록해 15.2명의 세종을 제외하면 전국에서 자살률이 가장 낮았다.

연령별로는 노년층 자살률이 압도적이다. 사실상 한국의 자살률에는 노년층 자살 비중이 거의 절대적이다. 2014년 기준 국내 노인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81.9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독보적인 1위를 기록 중이다. 최근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농촌의 강력사건들을 그저 ‘예외’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 농촌 주민들의 내면이 황무지가 되어버린 것과 일련의 사건들은 분명 연관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賞)이 아니듯, 내 늙음은 내 잘못으로 받은 벌(罰)이 아니다.”

박범신 작가의 ‘은교’에 나오는 문장이다.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들이받은 한국 노년층의 내면엔 이 문장과 결이 비슷한 날카로움이 이미 깊게 스며있는지도 모른다. 선을 넘은 범죄자들에 대한 단호한 처벌을 단행하는 한편 노년의 우울에 대해서도 진지한 시선을 던질 때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