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합글자로서 한자를 이해해야한다

책을 쓴다는 것은 고독의 고통이다. 독방(獨房)에 혼자 않아서 자기와 스스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쓸쓸함을 즐기는 일이라서, 아주 괴롭고 지독한 아픔이다. 차라리 굴을 뛰쳐나갔다고 전설처럼 전해지는 호랑이처럼 어슬렁 방문을 열고, 까페에서 음악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다. 나의 호랑이는 다시 곰처럼 웅크리고 지금 여기 펜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

이것 저것 많은 책을 썼었다. 블로그 방문자수 늘리기 책도 써보고, 경제학에 대한 책도 써보고, 한문에 대한 책도 써보고, 개인 수필집도 내보고, 개인 시집도 출판해보고, 언론의 사명에 대한 책도 써보고.... 그 중에서 베스트셀러는 없었다. 호평(好評)보다는 혹평(酷評)이 많았던 것 같다.

나는 천생 글쟁이다. 펜 대신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글쟁이다. 글을 쓰지 않으면 내가 살아있는 것 같지 않고, 심장이 뛰어도 정지한 것처럼 마구 답답하다. 어쩌면 내가 있어야할 공간은 아주 좁은 독방(獨房)일지 모른다. 그래서 혼자 살아가야하는 내 삶에 만족하려고 애쓴다. 생각처럼 쉽지는 않지만...

이번에 쓸 책은 ‘한문책’이다. 누가 나에게 한자를 잘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맞다’라고 말해야하겠지만, 솔직히 거짓말이다. 나는 한자 전문가는 아니다. 도대체 모르는 한자가 얼마나 많은지, 오늘도 한자 공부를 하면서 세종대왕의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글이 없었다면 아마 많은 지식인들이 문맹인으로 살아야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와 한문을 알아야하는 시대적 명분은 분명하다. 지식의 시대가 현재 진행중이고, 18C 산업혁명으로 상품을 팔았던 시대는 이제 일상생활이 되었고, 인류문명을 이끄는 엔진은 바로 ‘정보’다. 누구도 무너뜨릴 수없는 시대적 해일(海溢)이 분명하다. 모든 현대인은 정보의 쓰나미에 흡수돼, 이제는 정보를 먹고 숨쉬는 아가미가 생기고 말았다. 그 정보의 아가미는 바로 ‘핸드폰’이다.

누가 부인(否認)할까 부인하는 자가 있다면 오래전 아주 오래전 유행했던 ‘부시맨’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정보(情報)는 곧 지식(知識)이며, 지식의 기준은 곧 진리(眞理)이다. 정보도, 지식도, 진리도 모두 구체적인 문자로 기록된 유형물이다.

사실, 나도 한자가 아주 싫다. 도대체 누가 한자를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가령 ‘사랑’이라고 한글로 써놓으면 얼마나 편한가 여기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다. 사랑은 진정 사랑이다. 더 이상 토(討)를 달 것이 없다. 한자는 다르다.

한자로 사랑은 ‘愛’이다. 이 글자는 복잡하기는 아주 복잡한 글자이다. 읽을 때는 ‘사랑 애’라고 하지만, 愛가 왜 사랑을 뜻하는지 진정 알지 못한다면 한자를 배우는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참말로 한자를 배우기 힘든 부분이다. 한자해석, 그것이 정말로 한자를 배우기 어려운 대목인 것이다. (愛는 남녀가 포옹하고 키스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애초에 한자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한자가 문화와 문명을 건설함에 있어서 전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한자를 배울 이유가 결코 없다. 한자는 동양권 전체의 문화로서 그 지위는 황제를 초월했다. 황제는 자신이 통치하는 그 시대에만 신하들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통해서만 영향을 미쳤지만, 한자는 수천년동안 모든 인류와 문화와 예술과 작품속에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절대적 문자권력인 것이다.

한글학회에서 “한자의 부활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한 것은 거론의 가치조차 없다. 한자는 지식사회에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차라리 시골에서 옛날 농경사회처럼 농사를 짓고 남은 여생을 살아갈 생각이라면 괜잖겠지만, 정보혁명의 쓰나미속에서 아가미로 숨쉬며 살아갈 것이라면, 한자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문자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내가 다시 한자책을 쓰는 이유이다.

<가장 쉬운 한자 공부 책의 구성에 대해서>

이 책은 크게 2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앞부분은 한자의 합성원리에 대해서 다뤘고, 뒷부분은 한자어에 대해서 해석한 칼럼을 실었다. 이번에 내가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재미없는 한자를 재밌는 한자로 탈바꿈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바로 앞부분이다. 한자의 합성원리에 대해서 자세히 재밌게 공부하면 누구나 한자의 눈이 떠질 것이다.

한자책은 참 많고도 많다. 많은 한자책이 한자를 미로처럼 만들고 말았던가 한자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한자는 마치 터널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도대체 옛날 조상들은 그 많은 한자의 지식을 어떻게 암기했던 것일까 특별한 방법이 없었다면 3살, 5살 어린이가 어떻게 한자를 읽었던 것일까 무척 그 방법이 궁금하다.

한글은 쉽다. 반면 한자는 어렵다. 그렇다면 한자를 한글처럼 공부할 수는 없을까 내가 나에게 던졌던 물음이다. 물음에는 반드시 답이 있기 마련이고, 만약 한자를 한글처럼 공부할 수가 있다면 우리나라 지식정보는 더욱 고급화될 것 같다. 내가 펜을 든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한자를 한글처럼 쉽게 습득할 수 있도록 방법의 눈을 전달하는 것.

하기사 한자는 수천년을 살아 생존해온 문자로서, 그 성격이 독특할 뿐만 아니라 세월속 풍화작용으로 변모된 모양이 각양각색일 것이 분명하다. 각 시대의 문명과 충돌하면서 한자는 새로운 해석과 모양과 형성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모든 한자의 깊은 뜻을 발견하기란 어렵기 마련이다. 보편적으로 한자의 지도를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내가 쓴 책의 방향이 바로 이것이다.

한자의 형성원리는 4가지다. 중학교 1학년 한문 교과서에 자세히 나와있다. 설문해자를 만들었던 허신의 주장이기도 하고, 본래 문자가 갖고 있는 보편적 특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글도 자음과 모음이 각각 결합해서 새로운 글자들을 만들어내듯이 한자도 그러한 것이다.

상형글자, 지사글자, 회의글자, 형성글자가 존재하는데, 사실 상형글자는 어떤 물체의 모양을 본뜬 것이고 지사 글자는 어떤 추상적 상황을 기호로 나타낸 것이다. 회의글자는 두 글자의 합성이고, 형성글자도 두 글자의 합성이다. 회의와 형성의 구분은 글자속에 ‘소리값(발음기호)’가 들어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한다. 회의글자(會意)는 글자속에 소리가 들어있지 않고, 형성글자(形聲)는 소리가 들어있다.

山 水 目 木 鳥 火 禾 人 弓 象....은 상형글자다. 왜냐면 어떤 물체를 본뜬 글자이기 때문이다. 산을 본떴고, 물을 본떴고, 눈을 본떴고, 나무를 본떴고, 새를 본떴고 불을 본떴고 벼를 본떴고 사람을 본떴고 활을 본떴고 코끼리를 본떴다. 어찌보면 정물화같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추상화같기도 하다.

上 下 中 本 末 失....은 지사글자다. 물체의 추상을 본뜬 글자들이기 때문이다. 上은 어떤 기준점(一)에서 위에 있다는 의미다. 이보다 더 정확한 기호가 어디에 또 있을까 下는 기준점 아래에 있다는 표시다. 中은 어떤 물체의 중간을 의미하고, 本은 나무밑에 표시가 되어있으므로 ‘뿌리’를 의미한다. 末은 나무의 끝이므로 ‘끝’을 뜻한다. 失은 남편 부(夫)에 삐침이 있어서, ‘잃음’을 뜻한다.

회의글자는 이런 것이다. 休 旦 尖 林 明 鳴

休는 사람 인(人)과 나무 목(木)의 합성이다. 쉴 휴(休)라고 하는데, 각각 발음을 살펴보면 인(人)+목(木)=휴(休)가 된다. 즉, 사람 인과 나무 목이 합쳐졌는데, 발음은 ‘휴’가 되는 것이다. 休와 비슷하면서 완전히 다른 것을 예로 들어보자.

沐과 仁을 예로 들어보면 회의글자와 형성글자의 차이를 금방 이해할 수 있다.

목욕할 목(沐)은 물 수(水)+나무 목(木)의 합성이다. 발음으로 비교하면 수(水)+목(木)=목(沐)이 된다. 즉, 목욕할 목(沐)속에 목(木)이 들어있어서, 발음이 ‘목’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仁)도 마찬가지다. 사람 인(人)이 있어서 ‘仁’을 ‘인’이라고 발음하는 것이다. 이처럼 합성한 글자속에 ‘발음기호’가 들어가 있다면 형성글자이고, 발음기호가 없다면 회의글자이다.

아침 단(旦)=태양 일(日)+하나 일(一) / 旦의 발음은 본래 ‘일’로 되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단’으로 발음한다. 전형적인 회의글자이다. 지평선위에 태양이 뜬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뾰쪽할 첨(尖)=작을 소(小)+클 대(大) / 尖도 발음이 ‘소’ 혹은 ‘대’가 되면 형성글자인데, 전혀 엉뚱하게 ‘첨’으로 발음한다. 회의글자인 것이다.

숲 림(林), 밝을 명(明), 울 명(鳴)도 회의글자이다. 섬 도(島)는 산 산(山)과 새 조(鳥)가 합성된 것으로, 형성글자에 해당된다. 도(島)의 발음이 조(鳥)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도(島)속에 발음기호 조(鳥)가 들어있으므로, 형성글자가 되는 것이다.

합성된 글자가 형성이냐, 회의냐를 따지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대부분 형성글자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글자를 합성한 다음에 발음기호를 합성한 글자속에 넣어두는 것이 그 문자의 사용가치면에서 필요한 것이다. 휴(休)보다는 목(沐)이 사용가치면에서 더 뛰어난 글자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결합글자의 질서>

나는 회의글자와 형성글자를 합하여 ‘결합글자’라고 부른다. 결합해서 새로운 글자를 창조하는 한자의 능력이 문자로서 탁월하기 때문이다. 明은 해와 달이 결합해서 만든 글자이다. 물론 朋은 달과 달이 결합해서 만든 글자이다.

갑골문자와 설문해자를 추적해보면 明이 해와 달의 결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朋도 그 처음 생김새가 엉뚱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참고서처럼 현재의 글자 얼굴을 이해함에 있어서 도움이 될 뿐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明은 이미 해와 달이 되었고, 朋은 달과 달의 결합인 것이다.

더불어 지금껏 한자가 어려웠던 근본적인 이유 3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왜 한자가 어렵고 따분했는지 이해한다면 누구나 한자를 쉽게 접근해서 이해하고, 사용하면서, 한자를 통해서 국어실력을 팍팍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국민대학교 기계공학과 공돌이 출신도 한자를 깊게 이해하는데, 하물며 누가 못하랴!!

한자가 문자 경쟁력에서 밀린 이유는 개략적으로 3가지다.

첫째, 마땅한 한자 교과서가 없기 때문이다. 한자에 대한 책은 많다. 그런데 한자를 쉽게 설명해주는 책이 없다. 한글에 대해서 자음과 모음, 자음과 모음의 결합을 알려주는 책이 있듯이 한자도 그러한 결합원리를 설명해주는 책이 있었다면 누구나 한자를 습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한자 교습서로 유명한 천자문은 한자라는 문자를 배우는 교과서가 아니고 역사와 문화와 철학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둘째, 한자 해석책들이 칡처럼 난잡했다. 한자에 대한 다양한 책들이 사실 많다. 그러한 책들을 들여다보면 너무 방대하고, 수천자에 해당하는 한자들을 글자별로 해석하고 있으니, 배우는 학생들로서는 질려버린다. 1000자의 한자를 배운다고 하면, 8글자씩 250일을 배우면 된다. 즉, 8달을 배우면 된다는 것이다. 8달이 얼마나 긴 시간인 줄 안다면 8자씩 배우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16글자씩 배워서 4달만 배우면 된다고 한다면 1000자를 배울 수 있을까 이러한 수학적 계산법으로 한자를 배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셋째, 한자의 결합원리를 근원적으로 설명한 책이 없기 때문이다. 한자는 본래 결합글자이다. 상형글자와 지사글자는 사실 별로 안된다. 회의글자도 한정적이다. 모든 글자가 형성글자로서 결합글자인데, 결합의 원리가 두루뭉술하다. 화학반응식처럼 한자의 결합과정을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책이 있었다면 한자가 지금처럼 어려운 문자는 안됐을 것이다.

이 책은 한자의 결합과정에 중심을 뒀다. 보통 책들은 부수글자 중심으로 해서 해당 부수에 해당되는 엄청난 한자들을 모두 배치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한자를 직면하게 한다. 밥도 맛이 없으면 누가 먹을까 맛있는 반찬에 맛있는 밥이 사람의 건강을 책임지듯이 한자에 대한 공부도 적절한 한자단어들의 배치가 필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한글을 배울 때, ‘가’ ‘나’ ‘다’ ‘라’....‘자’ ‘차’ ‘카’ ‘타’ ‘파’ ‘하’를 배운다. 가를 배우고 나서 우리는 갑자기 ‘갉’을 배우지는 않는다. 더불어 ‘갾’을 배우지도 않는다. ‘가’ ‘나’를 배우는 이유는 가장 쉬운 자음과 모음의 결합원리를 배워야만 다른 모든 글자의 결합과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자 역시 그렇다.

한자의 결합과정은 좌우결합, 상하결합이 기본 결합이다. 사람 인(人)을 예로 들어보자.

仁, 仙. 休, 件, 伏을 보면 좌측에 사람이 있고, 우측에 둘(二), 산, 나무, 소, 개가 결합되어 있다. 이 얼마나 신비한 글자의 결합인가 사물과 사물이 결합해서 어떠한 뜻을 만드는지 가만히 음미해보면 한자가 과연 뜻글자라는 깊은 의미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 仁은 두 사람사이에 필요한 마음으로서 ‘어진 마음’을 말하고, 仙은 산같은 사람 혹은 산에 사는 사람으로서 ‘신선’을 뜻하고, 休는 나무그늘에서 쉬고 있는 사람 혹은 사람 나무로서 ‘쉰다’는 뜻이다. 件은 소가 사람을 뿔로 박아서 ‘사건’을 뜻하거나 혹은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소는 물건중에 물건이었다. 伏은 개가 사람에게 엎드린다는 의미다.

이 책에서는 사람 인(人)이 들어간 글자 중에서 ‘來’ ‘候’는 뺐다. 왜냐면 먼저는 사람과 개, 사람과 소, 사람과 산, 사람과 나무, 사람과 둘이 결합해서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결합원리를 터득한다면 이후에 아주 복잡한 한자도 이러한 결합원리로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2+2=4인 것을 알면 나중에는 22+22=44인 것을 알 수 있는 수학원리와 같다고 하겠다.

그냥 초등학생들도 이 책을 읽으면 한자가 이렇게 쉬운가라고 반문할 정도다. 이 한자 교과서는 필수한자를 중심으로 한 것도 아니다. 그냥 결합원리에 있어서 우리가 아주 쉽게 접하는 것들로서 묶은 것이다. 특히, 각 글자마다 대략 10개, 혹은 15개로서 결합과정을 묶음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글자를 선별했다. 대략 1000글자는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한자를 1000글자를 배우려면 1000개의 글자를 모두 각각 배웠다. 이제는 아니다. 100개의 한자를 배우면 되고, 100개의 한자마다 각각 10개씩 묶음으로 되어있다. 특히 10개는 그 결합과정이 서로 묶여져 있어서 이해하는데도 상호 도움이 된다. 그래서 한자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물론 한자를 한번에 배운다고 해서 송곳이 종이를 뚫듯 이해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지식도 결코 그렇지 못하다. 한글 역시 그 원리를 터득했다고 해도 결국 한글로 된 책은 꾸준한 독서로서 지식을 습득해야만 자신의 것이 되듯이 한자도 이러한 결합원리로서 자신의 문자로서 습득하는데 도움이 될 뿐, 정말로 자기 것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써보면서 노력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묶음 단위로서 써보는 연습을 한다면 열매의 결실이 빠르게 나타날 것이다.

<나의 인생 멘토 정명석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결혼의 결별은 깨진 항아리처럼 과거는 금(線)이 가있다. 항아리는 깨져도 다시 붙일 수 있지만, 사람과 사람의 깨어짐은 결코 그럴 수 없음을 경험자는 수긍할 것이다. 아주 인생이 절망적이었을 때, 정명석 선생님도 그러한 절망의 벽에 갇혀서 고독한 지구에서 태양의 빛줄기를 기다리듯 ‘희망의 방향’을 제시했었다. 가장 불행한 순간, 정명석 선생님은 “나는 행복하다”고 스스로 믿고, 불행속에서 행복을 꽃피운 위대한 실학적 사상가로서 나는 정명석 선생님을 존경한다.

내가 삶의 모델로서 삼고 존중하는 정명석 선생님이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기도 하고, 때론 인생이 너무 괴롭다 보니 고독의 상징과 같은 세상의 유혹이 그리울 때도 없지는 않지만, 그럴 때마다 내 손을 붙잡아준 인물은 정신의 지도자로서 정명석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나의 책은 언제나 내 인생의 멘토 정명석 선생님께 드리고 싶다.

나와 그는 사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함께 인생을 살았던 시절이 너무 부족해서 때론 그가 나를 기억함이 마치 공자와 맹자처럼 시간과 공간의 간격이 너무 많을 수도 있겠다. 정명석 선생님을 향한 나의 존중은 어쩌면 나의 일방적인 마음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나의 젊음이 아름다웠었고, 그 젊음이 낙옆처럼 쓸쓸한 적도 있었고, 겨울이 오랫동안 깊었을 때 나는 정명석 선생님이 외친 설교말씀으로 따뜻한 봄을 맞이했었다. 내 인생의 진솔한 고백이다.

때론 내가 나의 정명석 선생님을 인생의 스승으로서 글에 기록하는 것이 혹시 ‘결례’가 되지는 않을까, 스스로 고민도 된다. 내 삶 자체가 깨어진 항아리처럼 아주 볼품이 없으니, 스승을 위해서 스승의 존함을 기록함이 제자로서 부끄러운 기록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탄생은 다양한 각도의 사초(史草)가 존재했기때문이듯이, 나의 작은 기록이 누군가의 위대한 역사를 위해서 ‘사초(史草)’가 될 수 있다면....


2013년 10월 7일 오후 9시 12분 기록하다

장창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