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문상진 기자] '5공 실세'로 꼽히는 허문도(76) 전 국토통일원 장관은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해직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는 전두환 정권 때 허삼수·허화평씨와 함께 이른바 '쓰리(3) 허(許)'로 불리며 막강한 권력을 누린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 나치스 정권의 선전장관으로, 교묘한 선동정치를 주도했던 파울 괴벨스에 빗대어 '전두환 정권의 괴벨스'라는 오명을 얻었다. 1989년 5공 청문회에서도 "언론통폐합은 잘한 일"이라고 굽히지 않았고, "전두환 대통령은 난세를 치세로 바꾼 영웅"이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194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허 전 장관은 부산고와 서울대 농대, 일본 도쿄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1964년 조선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도쿄 특파원을 지낸 그는 1979년 주일본대사관 공보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1980년 신군부에 발탁돼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국보위 공보위원 등을 거치며 5공 정권 탄생과정에 참여했다.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때 전면에 나섰고, 보안사가 마련한 대통령 7년 단임 간선제 개헌안 작업에도 주도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통폐합은 전두환 정권이 1980년 11월 전국 64개 언론사를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통합한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언론인 1000명 이상이 해직조치를 당했다.
인위적인 언론사 통폐합에 대해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신군부가 정권 장악 목적으로 언론통폐합 사건을 계획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5공이 무너진 뒤 검찰 수사과정에서 "언론사 난립으로 월급도 못 주는 경영주가 있었고, 사이비 기자가 넘치는 상황에서는 그런 언론사나 종사원은 사회적으로 기생충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생각한다"며 언론통폐합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다.
허 전 장관은 1981년 5월 청와대 정무비서관 시절에는 5·18 민주화 운동 1주년을 무마시키기 위해 정권이 기획한 관제집회인 '국풍 81' 행사에도 관여했다.
당시 그는 김지하, 임진택 등 민중문화운동그룹에 참여를 설득했다 거부당하자 군인과 공무원들을 동원해 서울대 학생으로 위장 참여시켰다.
1982∼1984년 문화공보부 차관, 1984∼1986년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낸 그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인 1987년에는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내며 전두환 정권의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린 뒤인 1989년 일본으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논란이 일자 일본 특파원들과의 기자회견을 자청해 망명이나 도피가 아니며 수일 내 귀국할 것이라고 밝히고 출국 33일 만에 귀국하면서 "나는 5공 비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보통사람답게 살아가겠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이후 5공 비리와 관련한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불려 나왔다가 위증 혐의로 고발당했지만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또 1996년에는 서울지검 12·12 및 5·18 특별수사본부로부터 소환조사를 받았지만, 고소·고발이 없었다는 이유로 사법처리 대상에서는 제외됐다.
1999년 불교 텔레비전 신임 사장으로 선임됐다 노조의 반발 등으로 6개월 여만에 퇴임했고, 2000년 16대 총선 때는 자민련의 공천을 받았지만 불출마 선언을 한 바 있다.
[미디어펜=문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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