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우의 컬쳐쇼크-2013년 한국영화 그 기이한 수미쌍관

   
▲ 이원우 문화평론가, 미래한국 기자
1년은 긴 시간이다. 그 근거로 2012년 12월 31일 오후 2시 정각의 실시간 검색창을 들겠다. 그때 한국인들은 ‘안재욱’을 검색했다.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 열연하고도 MBC 연기대상에서 상을 받지 못한 게 대중들의 공분을 샀다. 하지만 그때 MBC 홈페이지에 항의의 글을 남겼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1년 전 오늘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1년은 긴 시간이다.

장르를 바꿔 영화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자. 올해 초 개봉해서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한 영화가 있다. ‘7번방의 선물’이다. 1월 23일 개봉. 누적관객 수 1280만 명. 이 영화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것들을 기억할까? 예쁜 여자아이가 나왔던 것, 조금 부족하지만 한없이 착한 아빠가 나왔던 것, 그가 결국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던 것, 보다가 눈물을 흘렸던 것, 사형제란 무엇일까 잠시 고민에 빠졌던 것.

‘7번방의 선물’이 슬픈 영화라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1년의 시간이 지나 눈물이 마른 상태에서, 이 영화가 관객들의 2시간짜리 눈물을 자아내기 위해 갖가지 무리한 장치들을 동원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 이용구의 뺨을 때리고 발길질 하며 누명을 씌우더니 결국 사형까지 시켰던 것이다. 대한민국 형법은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심신상실자를 사형에 처하지 않으며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심신미약자의 경우 사형을 무기징역이나 30년 이하의 유기 징역으로 감경하는 방침을 따른다.

‘7번방의 선물’은 거짓말을 했다

현재의 한국은 억울한 사형을 마구잡이로 집행하는 나라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10세 여아를 잔인하게 살해한 뒤 시신을 암매장한 김점덕과 20대 여성을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한 오원춘에게조차도 사형선고를 내리지 못하는 나라다.

‘7번방의 선물’은 분명 재미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다. ‘영화니까’라는 한 마디 말로 넘어가주기에는 꽤 큰 거짓말을.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변호인'. 노 전 대통령은 송우석이란 이름으로 등장해 변호사 시절 공산주의혁명을 통해 국가전복을 꾀했던 부림사건 주모자들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 모습으로 나온다. 좌파들은 당시 공안검사가 누구냐에 집착할 뿐, 당시 주동자들이 공산주의자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자들이라는 점은 애써 무시하려 한다.

2014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한국인들은 다시 한 편의 영화를 만난다. ‘변호인’이다. 12월 18일 개봉. 12일 만에 관객 500만 돌파. 이 기세로 조금만 잘 버텨준다면 1000만도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2013년 초와 말에 개봉한 두 편의 영화가 각각 1000만을 돌파하며 수미쌍관(首尾雙關)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영화는 잘 나가던 세무 변호사 노무현이 인권에 눈 뜬 계기가 된 부림사건을 재조명한다. 단, 이것은 영화이므로 주인공 이름은 ‘송우석’으로 한다. 송우석은 자신이 신세를 진 적이 있는 국밥집 아들이 단지 사회과학 서적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고문당하고 처벌을 받는 과정에서 격정을 토로한다. 배우 송강호의 신묘한 연기력은 이 영화를 두 말할 것도 없는 ‘재미있는 작품’으로 만들어 준다.
그런데 ‘변호인’에도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영화라는 장르의 옷을 입는 과정에서 노무현은 ‘송우석’이 됐지만 부림사건은 그대로 ‘부림사건’인 것이다. 실제 부림사건은 (여느 백과사전들의 깊이 없는 서술과는 달리) 무고한 시민들을 아무 근거 없이 기소한 사건은 아니었다.

그들이 국가권력에 의해 고문 받고 고통당한 것은 분명한 비극이지만, 그 이전에 그들이 열혈 공산주의자였음을 지적해야만 우리는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2009년 법원은 부림 사건 피의자들에 대해 일부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국가보안법 위반 등 전체 혐의사실에 대해서는 기존 판결을 뒤집지 않았으며 지난 3월부터 부산지법이 유죄 부분에 대한 재심을 진행 중이다. 왜였을까?

당시 사건의 실제 피의자였던 고호석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감상평을 남겼다.
“우리는 사실 그 당시엔 소위 ‘운동의 대의’에 눈멀어 그분의 힘겨움에 별로 눈길을 보내지 못했거든요.”
아무 것도 모르고 사회과학 책을 읽은 게 전부인 무고한 시민이 품었던 ‘운동의 대의’는 대체 뭔가? 가슴에 손을 얹고 그게 ‘자유민주주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부림사건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면 지지자들은 말한다. “어차피 픽션인데 뭐가 그렇게 심각해?” 재미있는 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이 ‘변호인’에 등장했던 악랄한 공안검사들이 누구인지를 찾고 있다는 점이다. ‘변호인’은 픽션이므로 어느 정도의 왜곡과 은폐는 눈감아줘야 하지만, 악랄한 ‘실제 인물들’에 대해서는 마음껏 분노를 폭발시켜도 된다는 식이라면 그때부터는 이성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지금 ‘변호인’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담론이 딱 이 레벨이다.

‘변호인’을 둘러싼 기이한 담합

흥미로운 것은 대한민국 영화 평론가들의 기이한 담합이다. ‘7번방의 선물’의 왜곡과 ‘변호인’의 은폐에 대해 지적하는 평론가는 한 명도 없다. 마치 자신은 작품의 내재적인 부분에만 천착하는 예술 애호가라는 듯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만 문장력을 발휘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릴 따름이다.

한 가지 몹쓸 가정을 해 보자. 연출력이 매우 뛰어난 영화감독이 있다. 그런데 그가 안타깝게도 일베를 했다. 그래서 ‘1980년 5월의 광주는 폭동’이었다는 기상천외한 전제를 깔고 영화를 만들었다. 연출과 연기는 아주 뛰어나다. 그 때, 대한민국의 영화평론가들은 철저하게 픽션의 관점에서 담담하게 그 영화를 평할 수 있을까? 내재적 관점에서만 머무를 수 있을까?

앞으로 영화와 음악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 대해 칼럼을 쓸 나는 시사주간 미래한국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문화 판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예술가-평론가들보다 잘나지도 못했고 작품을 많이 접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한국 문화판의 기이한 풍경에 대해 몇 글자 적어볼 자유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작한다 - 컬쳐 쇼크. 충격적일 정도로 비틀어진 문화편향의 현실에 날릴 수 있는 내 최선의 반격이 이제부터 시작된다. /이원우  문화평론가, 미래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