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패악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없다는 것"
자유경제원은 6일 개원 19주년을 맞아 서울 마포에 위치한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기념 토론회를 개최했다. ‘끝나지 않는 선전선동, 침식당하는 민주주의–누가 괴벨스의 부활을 꿈꾸나’ 개원기념 토론회는 지난 2008년 온 국민을 혼란에 빠뜨렸던 광우병 사태를 중심으로, 정치적 선전선동을 경계해야 한다는 취지로 열렸다.

발표자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는 “민주주의를 앞세워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민주 과잉 현상을 초래하는 것이 천민민주주의라”라며 “천민이라는 경멸적 표현은 비이성적 대중 또는 군중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비이성적인 대중의 뜻이 매사를 결정하게 되는 민주주의가 천민민주주의라는 지적이다.

신 교수는 “이러한 천민민주주의가 만개한 사건이 바로 광우병 촛불집회”라며 “사이버 공간에서 조작되어지고 왜곡되어진 루머폭탄(rumor bomb)에 의해 확산되었다”고 진단했다. 신 교수는 천안함과 세월호도 마찬가지라며 “루머폭탄은 인터넷 SNS, TV 등 미디어를 활용하기에 확산 속도가 무척 빠르고 허위 사실이 정보로 포장되어 유포된다”고 경계했다. 아래 글은 신중섭 교수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천민민주주의’는 극복될 수 있을까

1.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와 혼란

올해는 자유경제원 개원 19주년이면서, 1987년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를 계기로 이름 붙여진 ‘87년 체제’가 출현한 지 30년을 맞는다. 1987년을 기점으로 한국의 통제 구조와 경제 운용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시작되었으며, 정치ㆍ사회적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와 더불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권위주의적 국가의 소멸로 그동안 누적되어 온 사회적 요구들이 돌출하면서 사회 발전은 지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97년 자유경제원이 설립되었다.

민주화 이후 사회 변화는 경제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정부와 기업이 중심적인 경제 주체였지만, 권위주의 국가의 소멸 이후 여기에 근로자, 소비자, 시민사회가 가세하였다. 민주화와 더불어 노동조합과 시민단체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노사분규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민주정부가 이해 집단의 갈등 관리에 실패함으로써 경제의 불확실성과 자원배분이 왜곡되어 우리 경제는 장기적인 저성장의 시대로 돌입하였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거리 시위가 87년 체제의 출발로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가 집권하면서 체제를 위협할 정도의 운동권의 움직임은 잦아들었지만,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우리 사회는 또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8년 전 광우병 촛불시위가 3개월 동안 서울 중심부를 마비시킨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2008년 4월 19일 한미 쇠고기 협정을 체결하고 10일 지나 MBC의 이 방영되었다. 5월 들어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번지기 시작하면서 시위는 조직화된 세력에 의해 확대되었다. 촛불시위는 반미반정부 투쟁으로 확산되어 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영방송과 언론들도 시위대의 강력한 지원 세력이 되었다. 주요 언론, 전문가, 시민단체, 정치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었다.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하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들이 사실처럼 확산되었고 여기에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동참하였다. 전문지식인, 시민단체, 정치인, 언론 들의 선동에 많은 시민들이 동참하면서 사실은 사라지고, 괴담만 난무하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가 총체적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8년 전 광우병 사태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질서를 바로잡고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국가’는 보이지 않았다. 국가의 총체적 무능과 부실, 무책임이 드러난 것이다.

민주화 이후 광우병 사태와 유사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천안함 폭침’, ‘세월호 침몰’, ‘메르스 사태’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사실’을 불신하고 ‘선전선동’에 취약한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에 유권자들이 동조하여 무책임한 정책들이 채택되는 것을 보았다. 대규모 근거 없는 사실 왜곡이 ‘언론과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을 앞세워 사회 전반을 위기로 몰고 갔지만 이를 막아 사회를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장치들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신을 파괴하려는 세력이나 운동에 맞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행위까지 허용하여 스스로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민주주의의 역설’에 빠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이미 1930년대 나치스에 의해 일어났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정권을 잡은 나치스 당은 1933년 유일한 국가 정당이 됨으로써 히틀러의 신격화 작업이 시작되었고 드디어 1935년에 히틀러는 ‘총통’이 되었다. 이런 현상에 어떤 명칭을 부여해야 할까? 야만적이고 광기어린 폭압 정치를 초래한 ‘히틀러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민주주의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히틀러의 출현에 비견될 수는 없지만, 우리사회에는, ‘사실’이 아니라 ‘허위’에 기초한 ‘선전과 선동’,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버젓이 등장하였다.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는 빈번하게 반복적으로 총체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천안함, 세월호, 메르스 사태와 같은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거리로 사람들이 몰려나오거나 음모설이 난무하고, 정치권은 문제 해결보다 정쟁에 몰두하고, 정부는 무능과 무책임으로 일관하여 국정은 마비된다. 선거에서는 표만 의식한 포률리즘 정책이 난무함하여 경제는 활력을 상실하고 국가 부채는 늘어난다. 

   
▲ 오늘날 한국의 천민민주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민주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든 법이든 모든 것을 다수결로 결정하거나, 유권자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이런 천민민주주의의 결정판은 김종인 더민주 대표의 경제민주화이다. 이는 도를 넘은 재분배정책이다./사진=연합뉴스


이런 위기는 우리 사회가, 기본 원리로 채택한 원리들과 어긋나게 작동하거나 오작동하여 발생하였다. 경제자유화, 포퓰리즘, 광우병 파동과 천안함 괴담과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어긋나게 작동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퓰리즘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 광우병 파동, 천안함 괴담은 다수결,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에서 건전한 여론이 선전선동으로 왜곡될 때 나타난다. 우리나라 헌법은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의 기본원리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포퓰리즘과 선전선동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같은 헌법 구절과 민주주의, 언론의 자유를 앞세워 국정을 혼란과 마비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원리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파괴되고 왜곡되는 현상을 보고 자유주의자들은 ‘천민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천민민주주의’는 ‘천민자본주의’처럼 학술적으로 자리를 잡은 단어가 아니다. 아직까지 ‘천민민주주의’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얻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글은 우리 사회에서 ‘천민민주주의’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분석함으로써, 여기에서 벗어나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모색해보려고 한다.

2. 천민민주주의에 대한 여러 주장들

(1) ‘천민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왜 필요한가?

신분상의 귀천이 없는 요즘과 같은 세상에서 ‘천민민주주의’를 거론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천민’은 신분상 천한 사람을 의미하고, 만민평등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는 오늘날 ‘귀족’과 대척점에 있는 ‘천민’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왜곡하고, 오용하고 남용하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를 꼭집어 ‘무슨 민주주의’로 불러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법의 지배’에 도전하거나 직접민주주의를 앞세워 선전선동을 하면서 여론을 왜곡한다. 이렇게 되면 중우정치나 포퓰리즘으로 빠지게 된다. 이렇게 된 민주주의를 ‘천민민주주의’로 부를 수 있다. ‘천민민주주의’는 베버의 ‘천민자본주의’를 연상하게 하는 개념이다.

천민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만민평등사상ㆍ인민주권사상ㆍ다수결주의가 최악으로 결합한 상태를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운명은 정치인ㆍ각종 시민단체ㆍ이익단체ㆍ시민들의 여론과 투표와 같은 정치 행위를 통해 결정된다. 이들의 정치 행위가 정치ㆍ경제ㆍ사회ㆍ교육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들의 영향 가운데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는 주로 민주주의의 타락 형태인 천민민주주의에 나온다. 천민민주주의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포퓰리즘을 선동하는 정치인,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시민단체와 이익단체, 여기에 동조하는 의식 없는 시민이 협력하여 만들어낸 결과이다. 천민민주주의는 여러 요소들이 결합한 결과이기 때문에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2) 민주주의는 본질상 필연적으로 타락하고 천민화될 수밖에 없는가?

자유경제원은 2015년 <세상일침>에서 25명의 필진이 쓴 ‘천민민주주의’에 대한 글을 탑재하였다. 발표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천민민주주의로 타락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민주주의 자체가 천민민주주의이다. 곧 “천민민주주의란 새삼스럽고 별다른 게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이다. 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는 천민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천민이 주인 된 세상이 민주주의다. 그래서 역으로, 민주주의가 지탱되려면 귀족(nobility)이 그 척추를 이루어야 한다. 떼로 하여금, ‘천하고 상스런 떼의 논리’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존재가 귀족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귀족성’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위험성은 이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이 간파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본질적 속성으로 이해하고, 민주주의를 좋지 않은 정치 체제라고 생각하였다. “민주주의는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 낭비하고, 탈진해서 스스로를 죽인다. 지금까지 자살하지 않은 민주주의는 그 어디에도 없다, Democracy never lasts long. It soon wastes, exhausts and murders itself. There was never a democracy that did not commit suicide.”라고 한 존 아담스의 통찰에서 천민주주의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민주주의는 ‘자살 장치’를 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자살론의 효시는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민주정체의 몰락 과정이 수벌 부류가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서 대부분은 자신들이 차지하고, 일부를 민중들한테 나누어 주는 일이 반복되면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부자들도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반격을 꾀할 것이고, 정치는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때  쉽게 동요하는 군중(ochlos)을 거느린 소위 '민중의 지도자’라는 참주(tyrannos) 후보군들이 만들어지고 민주주의는 사라진다.

플라톤은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가장 좋은 자’ 곧 ‘철학자’가 지배하는 정부를 ‘가장 좋은 정부’ 곧 이상국가로 생각하였다. ‘가장 좋은 정부’가 타락하면, 명예를 사랑하는 자의 정부인 티모크라시(timocracy)가 된다. 티모크라시는 지도자들의 정신에 패기가 과도하게 넘쳐 발생하는 정부이다. 과도한 기백을 가진 사람은 이상적인 지배자가 아니라 군인이 되어야 한다. 플라톤은 스파르타 군사 정권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사용하였다.

티모크라시가 타락하면 과두제로 전락한다. 과두제란 부자들 곧 소수에 의한 통치이다. 그들의 욕망은 ‘돈에 대한 욕망’이다. ‘돈에 대한 욕망’은 ‘지혜 또는 명예’를 사랑하는 정신보다 열등하다. 과두제는 다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체제 곧 ‘모든 사람에게 욕망의 봇물을 터주는 정권’ 곧 민주주의로 쇠퇴한다. 민주주의는 플라톤이 경험한 아테네 도시국가를 경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가 경험한 민주주의는 분출하는 욕구 가운데 가장 저급한 욕구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체제였다. 이러한 민주주의가 타락의 마지막 단계 곧 ‘지배자가 최악의 저질적인 욕구인 성욕과 술맛에 탐닉하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신민을 착취하는 폭군제(tyranny)로 전락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폭군제 다음으로 나쁜 정치체제로 설정하여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사랑한 지혜로운 스승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어리석은 시민들의 투표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은 현실과 관련이 있다.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렐레스는 정부 형태를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으로 나누고 그것의 타락한 형태를 폭군정, 과두정, 중우정이라 하였다. 그는 민주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민주정에서는 대중이 소수가 가진 부를 보고 시기하거나 분개하거나 선동정치가가 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중우정에 빠질 것이라고 보았다. 곧 극단적인 민주주의에 반대한 것이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왜곡하고, 오용하고 남용한다. 민주주의라는 허명을 내세워 국회가 대통령의 위에 서야 한다고 일갈한다./자료사진=연합뉴스


극단적인 민주주의는 법과 질서를 존중하지 않는다. 따라서 헌법이 올바르게 유지될 수 없다. 극단적인 민주 정치가 진행되면 공공 업무에 자격 있는 시민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참여하여 절대적 평등과 자유를 외치게 된다. 그들은 ‘자유와 평등’을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여 국가에는 규율과 절제가 없고 탁월한 능력자에 대한 일반인의 존경심도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되면 아첨과 선동이 난무하는 ‘폭민 지배’로 기울어지고, 감정으로 들뜬 대중이 정치를 완전히 장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민주주의를 중우정이라 하였다. 그가 말한 중우정은 ‘천민민주주의’의 한 현상이다.

어떤 사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려하던 중우(衆愚)민주주의(ochlocracy)를 ‘천민민주주의’에 가깝다고 했다. 중우민주주의의 어원은 라틴어 오클로크라시(ochlocracy)이다. 이 말은 ochlo(떼거리)+cracy(통치)의 합성어이다. 다른 말로는 mob rule (떼법)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촛불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촛불은 민주주의다’라는 책도 나왔다. ‘촛불 민주주의’는 광우병대책위원회 캐치프레이즈이기도 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천민성, 곧 떼거리 민주주의 '오클로크라시’를 잘 말해준다는 것이다. 합리적 공론의 장을 벗어나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사실을 미신과 허구로 감싸는 민주주의가 바로 천민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이를 대입하면 경제민주화니 무상복지 시리즈를 외치는 사람들이 ‘수벌’에 해당하는데, 무임승차하려는 속성을 가진 합리적 개인들은 이를 방조한다. 집단이익을 추구하는 소수로 구성된 이익집단은 자신들의 공동목표를 위해 집단행동을 달성했을 때 구성원들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크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반면에 이익집단에 속하지 않은 다수는 그것을 막아야 할 유인이 크지 않다. 합리적 개인은 다른 사람이 나서서 그것을 막아주길 원하지만, 자신은 나서지 않고 무임승차하려고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가 공공선에 반하여 지신들의 이익을 달성하려고 정부 권력을 이용하여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자치를 민주주의는 모두 실패로 끝난다.

민주주의를 앞세워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민주 과잉 현상 초래하는 현상을 천민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천민이라는 경멸적 표현은 비이성적 대중 또는 군중(mob)을 의미하고, 천민민주주의에 가장 가까운 정치용어는 군중에 의한 지배(mob rule, or ochlocracy)다. 비이성적 대중의 뜻이 매사를 결정하는 민주주의가 천민민주주의다. 뿐만 아니라 ‘눈먼 대중이 박수치는 것’을 ‘천민민주주의’로 규정하기도 한다.

국민주권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에 비유하기도 한다. ‘모두의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는 비극은, 경험이 증명하듯, 착취와 낭비를 정당화한다. 즉,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없다는 말과 같기 때문에 모든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천민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천민민주주의로 떨어지기 마련인 민주정에서는 “대리인들은 소유주가 아니기 때문에 온갖 패악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소유권을 갖지 않은 자의 특징은 귀중한 재화를 보존하기보다 착취하고, 알뜰하게 운영하기보다 낭비하는데 더 열중한다. 인기 영합적 매표(買票)정책을 마구 수립하고, 예산을 무작정 늘리고, 권한을 확대하려 한다. 그 다음 선거도 중요하므로 공짜복지 공약은 남발되고, 유권자는 집단에 따라, 지역에 따라, 특혜에 따라 쏠려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정은 필연적으로 ‘입법 과잉’을 초래한다. 무책임한 입법 과잉은 필연적으로 개인 자유의 침해로 이어진다.

(3) 천민주의와 천민민주주의

이 입장은 민주화 시대의 최대의 문제를 ‘바닥을 기는 저질주의’ 또는 ‘천민주의’로 규정한다. 오늘의 우리 정치와 사회를 풍미하고 있는 ‘야비하고 집요하고 간교하며 비루한 천민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 천민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조회수’로 우열을 가리는 인터넷 지식”을 ‘지식의 천민민주주의’라고 불렀다. 

   
▲ 새누리당을 탈당한 유승민 무소속 후보는 지난 3월 23일 기자회견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며 "어떤 권력도 국민을 이길 수는 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공천배제된 것은 민주주의, 정의가 아니며 "자신이 곧 국민의 뜻을 대의한다"고 천명한 것이다./사진=연합뉴스


(4) 거짓ㆍ사기ㆍ루머ㆍ선동ㆍ폭력과 천민민주주의

‘천민민주주의’의 특성을 ‘거짓, 사기, 선동, 폭력’으로 규정하는 입장이 있다. 2008년 6월엔 당시 한나라당의 한 국회의원은 토론에서 촛불시위에 대해 '천민민주주의이며 생명 상업주의’라 불렀다. 주성영은 토론에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를 지휘하는 핵심인 진보연대 인사들은 과거 여중생 장갑차 사고와 평택 미군부대 사건 때 죽창으로 우리 군경을 공격하고, 화염병과 각목을 사용하는데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들이 집단지성을 지배하지 못하고 머물러 있다가 집단지성의 동력이 떨어지는 상황에 전면으로 나서 그때부터 정권타도로 나오고 다시 폭력이 행사됐다. 저는 이게 천민 민주주의라고 본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민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민주주의로 포장하고 있다는 공통성을 지닌다. 

또 다른 사람은 “아무나 지도자가 되니까 선동가가 등장하고 인기만 얻으면 지도자가 되는 천민(賤民)민주주의 경향이 많아지는 것이다.”고 했다. 한 언론인은 ‘천민민주주의’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점차 쓰레기통의 가짜 장미요, 사기꾼들의 선동으로 전락하는 중”이라고 했다. 한국 사회의 거짓말 증후군과 정치권의 사기성을 천민민주주의와 연결시켰다. 

이런 주장들을 종합하면 ‘천민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거짓, 사기, 선동, 폭력으로 집약된다. 천민민주주의가 만개한 사건이 바로 광우병 촛불집회다. 광우병사태, 천안함과 세월호 등에서 보이는 ‘괴담’ 형태의 여론 조작을 천민민주주의라고 하였다. 여론 조작은 고의적인 ‘루머폭탄(rumor bomb)’을 설계, 제조, 운반, 폭발이라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사회적 루머는 사이버 공간에서 여론 조작, 사실 왜곡, 선동에 의해 확산된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음모론’이 판을 치며 선동의 집단행동화, 사회 병리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루머폭탄은 특정한 정파와 정치적 신념을 가진 집단이 자신들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거나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유포한다. 루머폭탄은 고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일부 사실만을 취사선택하며, 허위 사실을 날조하고 그것의 유포자를 익명의 전문가, 권위자로 포장한다는 것이다. 루머폭탄은 인터넷, TV 등의 미디어를 활용하기 때문에 확산 속도가 빠르고, ‘정보’로 포장되는 경향도 있다는 것이다.

천민민주주의자들은 국민을 이러한 거짓과 사기 그리고 선동과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 공권력도 인정하지 않는다. ‘천민민주주의’의 주창자들은 정당한 공권력의 행사도 인정하지 않고, 대법원의 판결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법의 지배’도 부정한다. 

(5) 사실 왜곡과 천민민주주의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꾸며’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을 천민민주주의’라 보는 입장도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가 지역감정, 집단이기주의, 계급적 격차의 확대, 매체 권력을 비롯한 사회 권력체의 발호라는 천민민주주의적 양상을 띠고 있다”는 지적과 같이 천민성의 핵심과 천민성을 도입ㆍ확산시키는 주체를 추적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의 원천인 국민일반 또는 대중전체를 천민이나 우중으로 간주할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한국 민주주의에서 천민성은 사실왜곡에 있으며, 그 자체는 국민이 아니라 지식인과 언론, 정치인, 시민단체에 있다고 단정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의 천민민주주의의 발흥의 책임에서 일반 국민을 제외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왜 이들의 근거 없는 선정 선동에 많은 국민들이 동조하는가를 설명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이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고 괴담과 선동에 휘둘리는 현상에 주목하면서 천민민주주의에 주목하는 학자도 있다. 국민 다수는 정보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되풀이해서 듣게 되면, 그리고 정보가 부정적이면 부정적일수록 신뢰하는 경향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외견상의 민주주의는 실제로 중우정치에 빠지게 된다고 하였다. 민주정치를 위해서는 ‘깨인 공중(informed public)’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평균의 눈높이가 성숙한 시민 의식에 도달해야 그때부터 우리는 그 나라를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른다. 모든 국민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에 맞는 민주주의를 갖는다. 멍청한 국민들에게는 싸구려, 일회용, 투표함 민주주의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을 가리켜 천민민주주의라고 부른다.”라고 함으로써 ‘멍청한 국민’을 천민민주주의가 번성하는 터전으로 설정하는 것과 상통한다. 이를 우려하여 John Adams는 오래 전에 “Liberty cannot be preserved without a general knowledge among the people.”라고 하였다.

(6) 포퓰리즘과 천민민주주의

포퓰리즘과 같은 인기 영합적 정치가 바로 천민주주의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민주주의를 “개인 재산권이 보장된 사회에서 납부 세금에 대한 재산권 행사의 연장이자, 통제방식으로 발전한다.”고 보면서 “포퓰리즘으로 불리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미성숙이라는 의미에서 천민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천민민주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은 더 내지 않으면서 남들에게는 세금 부담을 더 부과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천민민주주의에서는 동원되고 집단화된 세력이 당연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공격한다. 너희들이 더 부담하면 우리 모두가 잘살 수 있다는 논리다. 부담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쓰는 사람이 따로 있는 구조다. 따라서 더 많이 가진 자에게 ‘부도덕하다며 채찍질을 가하고 함께 나눠먹자는 사회’에서 천민민주주의가 창궐한다. 그는 이런 천민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세금을 거둬 어려운 사람을 돕고, 공동체 통합수준을 높여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자”는 게으른 사람과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의 세상이 된다고 주장한다. “당신의 돈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 강요되면 그게 바로 약탈이고. 민주주의 타락의 전형이다.” 이것이 바로 천민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일반적으로 다수결 원리로 결정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다수결로 개인의 자유, 인권, 재산권 등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결로 모든 문제를 결정하겠다는 나서는 것이 민주주의의 함정이고, 여기에 빠지면 천민민주주의 사회가 된다. 민주주의의 허점을 악용하는 정치인들이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공익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의 기본 원리를 허무는 포퓰리즘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포퓰리즘이 정치권이 인기에 영합하여 실행한 보편적 복지정책이며, 이런 정책은 국가의 정체성을 허문다. 복지 정책에서뿐만 아니라 공정거래법, 각종 규제 정책도 포퓰리즘이다. 계열사간 부당 내부 거래 금지,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안심전화대출 등과 같은 정부 정책이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모두 시장경제에 어긋나는 정책이다. 천민민주주의는 경제의 활력을 떨어지게 한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핵심 가치인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원칙을 깨는 것이다.

(7) 무제한의 자유와 천민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도 시민들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은 우리나라가 법치국가이며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사회 곳곳에서는 민주주의란 이름 아래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국가 공동체를 부정하거나 국가의 법질서를 무시하는 행태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오늘날 국가공동체에서 구성원으로 살고 있다. 민주국가에서도 무제한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민민주주의자들은  ‘무제한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국가의 법질서를 무시한다.

   
▲ 천민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판을 치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함께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견제를 받지 않는 민주주의는 천민민주주의에 빠진다. 개인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에 대한 권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될 수 없다는 자유주의의 원리 없이 다수의 결정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제한 없는 다수결의 원리가 바로 ‘천민민주주의’이다./자료사진=연합뉴스


(8) 책임 없는 자유와 천민민주주의

우리 사회에서는 납세ㆍ병역ㆍ교육ㆍ근로의 의무는 수행하지 않으면서 국가에 대해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병역 의무를 완수하지 않은 사람이 공직에 임명되거나 선출되는 경우까지 있다. 책임과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요구는 끝없이 많다. 무상보육ㆍ무상급식ㆍ무상교육, 반값 등록금, 실업급여, 공무원ㆍ군인 연금 보전, 기초생활수급, 기초연금 등 총 복지비용 중 61% 정도가 무상이다. 이것이 천민주주의 현상이다. 

국민의 36%, 간이사업자의 1/3, 기업의 52%는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있다. 탈세자도 많다. 우리 사회에서는 국민 개세주의가 무너졌고, 선거철만 오면 소득세를 올리고 고소득자의 세금 부담과 법인세를 올려야 한다는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린다. 뿐만 아니라 시민단체들은 특정 집단이나 정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단체로 전락했다.  

책임과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 요구하고 평등만 주장하면서 심지어 법질서까지 무시하는 국민들의 민주주의가 바로 천민민주주의이다. 천민민주주의에서 ‘천민’은 책임과 의무 그리고 자유와 권리 간에 균형적인 건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시민’과 대칭적인 개념이다. 천민민주주의는 건강한 시민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적이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도록 국민개세주의 국민개병주의를 확립하고, 교육평준화가 아니라 공부하고자 하는 우수하고 창의적인 인재를 지원 육성하고, 무상으로 퍼주는 것이 아니라 일과 복지를 연계하는 근로 촉진형 복지제도를 도입하고, 법질서 유지에 만전을 기해야만” 천민민주주의가 극복되고 건강한 시민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떼거지로 모여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하면서, 촛불을 들고 폭력적인 사회 변혁,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도모하면서 자신들을 민주주의 투사처럼 위장하는 세력들이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현상은 천민민주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민’은 과거 계급사회에서 가난하고 천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돈이 많으면서도 혹은 배운 것이 많으면서도 당연히 해야 할 의무는 하지 않고, 사회 전복을 꾀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천민적’ 이라 부르고, 그들의 ‘주의’, ‘주장’을 천민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천민민주주의를 ‘책임은 없이 자유만이 강조되어버린 왜곡된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책임은 부담하지 않는 천박한 민주주의, ‘내가 주인’이라는 의식으로 무장된 자유는 어디서나 스스럼없이 행패를 부리고, 행여 공권력의 제지를 받으면 ‘주인인 국민에 대한 탄압’을 자행한다며 오히려 호통을 친다. 이런 무책임한 자유는 경찰도, 검찰도, 법원도 안중에 없다. 품격 없는 천민민주주의적 행동은 정상적인 시장 질서를 황폐화시켜 경제 상황을 악화시킨다. 

천민민주주의란 결국 ‘정치의 실패’다. 이에 대한 경제학의 해법은 명확하다. 책임이라는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것이다. 공공재 이론은 편익에 상응하는 비용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 부담하도록 하여 무임승차자 문제해결을 제시한다. “천민민주주의의 핵심이 ‘책임 없는 자유’에 있다면, 자유라는 편익에 대해 책임이라는 대가를 마땅히 치르도록 해야 천박함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9) 국가주의와 천민민주주의

개인이 해야 할 일을 국가가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천민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개인이 먹을 귤 개수를 정하는 것도 개인과 시장에 맡길 것이 아니라 정부가 집합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좌파들의 민주주의를 천민민주주의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적으로 맞지 않고 실천적으로도 실행 불가능하다고 단정한다. 국민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좌파는 자신의 주장을 국민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합리적 설득을 할 수 없어 ‘선전과 선동’을 애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10) 다수결주의와 천민민주주의

“투표함이 우리 국부(國富)를 증가시킬 수는 없다.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딘가에 있던 것을 탈취하여 다른 누군가에 주는 것이다.”라는 바스티아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다수결의 결정으로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민주주의를 ‘천민민주주의’로 볼 수 있다. 특히 “다수결 법률을 통해 다른 사람의 재산을 자신에게로 그들의 동의 없이 자신에게로 이전시킬 수 없도록 하는 것”을 천민민주주의의 특징으로 규정한다.
 
(11) 정파적 이익 쟁취의 수단으로서 천민민주주의

여론 조작이나 왜곡을 통한 영향력 확대, 정파적 이익 쟁취를 노리는 잘못된 행태를 천민민주주의의 한 사례로 제시하였다.

(12) 법치의 훼손과 천민민주주의

“개인의 자의적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 생명ㆍ신체의 자유와 재산권 보호, 권력의 분립과 견제, 복수정당제와 대의제”와 같은 ‘헌법적 가치’나 ‘자유주의의 원칙’을 훼손하면 민주주의가 ‘천민민주주의’로 타락한다고 볼 수 있다. 

(13) 대중과 천민민주주의

1920년대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제트가 쓴 『대중의 반역』이 예고하였듯이 대중사회가 타락하면 히틀러 파시즘과 같은 정치가 등장한다. 과거 권력층은 개인으로서 권력을 남용하였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들은 집중과 집단화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다. 그와 동시에 대중은 권력을 지향하는 개인과 기관의 조작과 선동의 대상이다. 그 결과로 선동과 괴담, 음모론과 거짓이 난무한다. 대중이 집단적으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권력을 일부 '특권층’, '권력층’이 갖고 있다고 착각한다. 히틀러의 파시즘이 히틀러와 같은 권력자에게서 유래한 것만은 아니다. 그의 출현을 원하고 추종한 대중이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파시즘이 가능했다. 에리히 프롬은 목숨을 걸고 자유를 쟁취한 조상들과 달리 자유로부터 도피 현상이 나치즘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분석했다.

한국에서 괴담과 거짓 그리고 포퓰리즘은 한국의 좌파가 집단화된 대중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회의 주도권과 정권쟁취를 하려고 할 때 그 ‘기본 수단’이 되었다 대중선동과 기만의 무도장에 주류 언론이 합세하면 천민민주주의는 더욱 심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은 정당-언론-시민단체-일부 지식인들에게 이용당한다. 대중들이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면 상황은 역전될 수도 있다. 진정한 민주화의 길은 정치의 주체인 국민의 수준에 달려있기 때문에 국민이 자각하면 천민민주주의는 약화될 수 있다. 

   
▲ 천민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자살로 몰고 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확실한 대안이 없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민주주의를 통제하여 민주주의가 제한적으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사진=미디어펜


3. 천민민주주의는 누구의 책임인가?

천민민주주의는 누구의 책임인가? 그 책임을 정치가ㆍ이익집단에게 물을 수 있지만, 이들의 선동과 선전에 놀아나는 시민이 더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시민들이 거짓선동에 취약하고, 자기 몫을 요구할 줄만 알고, 권리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망각하여 천민민주주의가 창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천민민주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그토록 경계했던 '중우정치’의 다른 이름이다. 이렇게 보면 천민민주주의의 책임이 대중에게 귀속된다. 

그러나 무책임한 대중을 천민민주주의의 주원인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천민민주주의가 흥한 이유는 ‘가진 자’의 책임도 있다는 것이다. ‘가진 자’들은 응당 ‘귀족성’을 지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천민민주주의가 심화된다는 것이다. “대중이 우중(愚衆)으로 전락하고, 그들이 아무리 천박하고 미개(우리나라에서 이 단어 잘못 쓰면 큰일 난다)하게 굴더라도 '귀족’들이 중심을 잡고 있으면 그 사회는 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귀족’은 “교양, 상식, 소신, 애국심, 책임감, 비전, 배려 등 '천민성’과 대조되는 가치(價値)들을 체화(體化)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엘리트를 말한다. 그들은 정치인일 수도, 관료일 수도, 군인일 수도, 기업인일 수도, 학자일 수도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귀족’들이 책임감을 보여주지 않고 ‘천민’들에게 투항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천민민주주의’로 추락하지 않게 하는 균형추 역할을 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이 나라 민주주의를 무저갱(無底坑)으로 끌어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레닌이 일찍이 '쓸모 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라고 칭했던 이런 자들이야말로 '천민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가장 천한 자들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천민민주주의’로 전락해 가는 것은 대중들, 우중들 때문만은 아니다. 체제를 지키기 위해 싸울 의지가 없는 비겁한 ‘가진 자’들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비겁한 '가진 자’들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천민민주주의’로 추락시키는 ‘우중(愚衆)의 공범(共犯)들’이라는 것이다.

4. 어떻게 천민민주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동안 표상으로 등장한 ‘촛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헌법 제1조 제1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2항)”를 외쳤다. 자신들은 헌법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촛불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내세우는 ‘헌법 정신’에 반하여 행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헌법’, ‘민주주의’를 외친 것이다. 이런 현상에 우리는 천민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라는 정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첫째, 시민들이 그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곧 민주주의를 완강하게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시민들이 감당하겠다는 의지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 셋째로 민주주의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은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충족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잘 작동하지 못하고, ‘천민민주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높다. 밀이 지적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천민민주주의’가 실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권자들이 자신의 정부에 대해 충분히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공공 이익이 아니라 그저 돈에 눈이 어두워 표를 팔아버리면, 또는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꼬드김에 빠지거나 사적인 이유로 그런 사람의 환심을 사고 싶은 생각에 투표권을 행사한다면, 이런 곳에서는 대의제도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그저 전제정치나 음모의 도구로 존재할 뿐이다. 투표권을 그런 식으로 남용해버리면 투표권은 악정(惡政)에 대한 견제가 되기보다 오히려 그것에 날개를 달아주는 셈이다.”

   
▲ 민주화 이후 사회 변화는 경제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민주화와 더불어 노동조합과 시민단체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노사분규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민주정부가 이해 집단의 갈등 관리에 실패함으로써 경제의 불확실성과 자원배분이 왜곡되어 우리 경제는 장기적인 저성장의 시대로 돌입하였다./자료사진=연합뉴스


오늘날 한국의 천민민주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민주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든 법이든 모든 것을 다수결로 결정하거나, 유권자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이런 천민민주주의의 결정판은 경제민주화이고 도를 넘은 재분배정책이다.

우리가 아무리 관용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존중한다고 하지만, 관용과 민주주의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철학자들은 ‘관용의 역설’, ‘민주주의의 역설’이라고 불렀다. 관용과 민주주의가 소중한 가치라고 하지만, 관용 자체나 민주주의 자체를 허무는 것을 용인하는 수준까지 관용이나 민주주의를 허용하면 역설에 빠진다.

총칼을 들고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수 없고, 다수결로 민주주의를 폐기하려는 민주주의를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아무리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자유 자체를 부정하는 자유는 허용될 수 없다. 

이런 천민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판을 치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함께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견제를 받지 않는 민주주의는 천민민주주의에 빠진다. 개인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에 대한 권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될 수 없다는 자유주의의 원리 없이 다수의 결정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제한 없는 다수결의 원리가 바로 ‘천민민주주의’이다. 천민민주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 헌법과 사회의 구성 원리가 바로 자유주의의 원리라는 것을 모든 시민들에게 확산시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수결주의 민주주의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려는 시도에 맞설 때 ‘천민민주주의’는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천민성을 떨쳐버리려는 시민들의 각성은 자기 자신과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천민민주주의의 확산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필요한 대책을 다양하게 제시하였다. 그 대책에는 다음과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 시민들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국가 역할의 강화
∙ 작은 정부
∙ 언론의 사회적 책임의 강화
∙ 의식 있고 책임 있는 교양 시민의 양성
∙ 사적 자치와 자기책임을 원칙으로 하는 사법의 영역의 확대와 공법의 영역의 축소
∙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도입과 그 정당성에 대한 이해
∙ 주권과 정체성을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체제전복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안보능력
∙ 극단적 주장과 선동에 넘어가지 않을 만큼 높은 국민의 생활수준과 교육수준
∙ 도덕적 규범과 법에 대한 국민과 정치인의 존중
∙ 정치를 사적 이해의 추구가 아니라 공적 영역(res publica)으로 인식하는 공화정신
∙ 자유롭고 공정한 언론과 전문 영역에서 권위 있는 지식의 존재
∙ 헌법 개정을 통해 민주주의가 자유를 억압할 여지를 없앰
∙ 경제민주화와 같은 독소조항을 개정
∙ 정부간섭과 규제, 정부부문, 국가채무 크기의 제한
∙ 법의 지배
∙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 사법부 독립, 대의제와 같은 ‘공화제 처방’
∙ ‘열린 자유 시장 경제’가 온전히 작동할 수 있는 환경 조성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천민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자살로 몰고 갈뿐만 아니라, ‘자유주의’를 타살시킬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긴장 관계를 맺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확실한 대안이 없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민주주의를 통제하여 민주주의가 제한적으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자유주의’를 확산시켜, 천민민주주의를 없애고 민주주의를 통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견고한 믿음을 가진 ‘자유주의 시민’이 사회의 주류를 형성해야 한다. 

참고 문헌

포사이스, M.ㆍ소퍼, M. 킨스, 『서양정치사상입문: 플라토에서 루소까지』, 부남철 옮김, 한울아카데미, 1993. 
밀, 존 스튜어트 , 『대의정부론』, 서병훈 옮김, 아카넷, 2012.
신중섭, “천민민주주의를 극복하는 길”, <세상일침> 2015년 1월 12일, 자유경제원.
자유경제원 홈페이지의 <세상일침>에 나온 에세이 2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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