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파나마 페이퍼스의 경고 ①]역외탈세‧해외투자‧재산은닉 주목적…지하경제 양성화 걸림돌
[미디어펜=이원우 기자]지난 4일 한국인들은 생소한 이름의 실시간 검색어에 맞닥뜨렸다.

파나마 페이퍼스.

이 검색어를 거론하게 만든 것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라는 독특한 이름의 단체다. 미국 워싱턴 D.C에 본부를 두고 있는 탐사보도 전문기관이자 '언론계의 인터폴'이라 불리기도 하는 괴짜들의 집단. 

1997년 창설 이래 100% 기부금에만 의존하면서 비영리 운영되며 정부, 노조, 익명의 기부금은 받지 않는다. 세계 60여 개국의 160여 명 기자가 참여하고 있으며 한국 언론 중에는 뉴스타파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ICIJ는 이미 지난 2013년 봄 '버진 아일랜드'라는 검색어로도 한국인들의 화제가 오른 일이 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2011년, 호주 출신 탐사보도 전문기자인 제러드 라일(Gerard Ryle)은 자신에게 도착한 하드디스크 안에 버진 아일랜드의 역외기업 및 페이퍼컴퍼니 목록과 관계자 정보가 빼곡하게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체 데이터 용량은 260기가바이트. 이에 ICIJ는 46개국 86명의 탐사보도 기자 팀을 구성했다. 2010년의 핫이슈였던 위키리크스보다 커다란 스케일로 데이터 분석이 15개월간 진행됐고, 영국 '가디언'을 통해 차례차례 명단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올랑드 대통령 대선캠프 재무담당자, 탁신 전 태국 총리의 부인,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의 전 남편 등의 이름이 폭로됐다.

   
▲ 충격을 가중시킨 것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 씨의 이름이 명단에 포함돼 있다는 소식이 전파되면서부터였다. 기업인 측근들에 집중됐던 3년 전에 비해 훨씬 더 영향력이 큰 '전 대통령의 장남'이 조세회피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연합뉴스


ICIJ는 한국 역시 폭로의 사정권에서 멀리 있지 않음을 암시했었다.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한국에서도 상당히 많은 액수의 돈이 버진 아일랜드로 흘러간 정황이 있음을 시사했던 것이다. 

명단 제공을 요청한 국세청의 요구는 거절됐다. 대신 ICIJ의 '한국 지부' 역할을 하고 있는 뉴스타파는 버진 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한국인이 최소 245명이라고 밝히면서 이수영 OCI 회장 부부와 조중건 前대한항공 부회장의 부인 이영학씨, 그리고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막내 동생인 조욱래 DSDL 회장 등이 포함돼 있다고 공개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3년 만에 돌아온 '명단 공개' 폭탄

그동안 ICIJ가 파고든 취재처는 파나마 최대 로펌이자 '역외비밀 도매상'으로도 악명이 높은 모섹 폰세카(Mossack Fonseca)였다. ICIJ는 1977년부터 2015년까지 모섹 폰세카의 내부자료 1150만 건을 분석한 결과를 이달 초 공개했다.

3년 전에 비해 명단의 무게감은 훨씬 더해졌다. 국가지도자와 고위정치인‧관료가 각각 12명, 세계적인 갑부가 29명, 한국 주소 기재자는 195명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 푸틴 러시아 대통령, 청렴하기로 소문난 영화배우 청룽(成龍)의 이름도 명단에 올랐다.

충격을 가중시킨 것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 씨의 이름이 명단에 포함돼 있다는 소식이 전파되면서부터였다. 기업인 측근들에 집중됐던 3년 전에 비해 훨씬 더 영향력이 큰 '전 대통령의 장남'이 조세회피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노재헌 씨는 2012년 5월 조세회피처인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 3개를 설립해 주주 겸 이사에 취임했다. 회사 3곳 모두 1달러짜리 주식 1주만을 발행한 전형적인 페이퍼 컴퍼니였다는 설명이다. 

페이퍼컴퍼니 설립 자체가 불법은 아니지만 의심스러운 정황은 조금 더 있다. 특히 노 씨가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 시점이 그의 아내가 2011년 3월 홍콩법원에서 낸 이혼과 재산분할, 자녀양육권 청구소송이 진행되던 중이었다는 점이 도마 위에 올랐다. 재산분할을 피하기 위해 재산을 은닉하려는 의도가 의심될 수밖에 없는 정황이기 때문이다. 

뉴스타파는 노 씨의 재산은닉이 노태우 정권의 비자금과 연관됐을 가능성, 노 씨의 매형인 SK 최태원 회장이 관련됐을 가능성 등을 살폈지만 아직 확인된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 

'해외투자' 목적의 페이퍼컴퍼니 '불법' 단정 힘들어

조세피난처(Tax Haven)는 각국의 세율이 나라마다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태동됐다. 일반적으로 법인의 실제발생소득 전부 또는 상당부분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않거나, 법인의 부담세액이 해당연도 실제 발생소득의 15% 이하인 국가 또는 지역을 조세피난처라고 부른다.

이미 국내 대기업들은 조세피난처에 상당한 숫자의 역외 법인을 세우고 있다. 재벌닷컴의 조사에 따르면 그 숫자는 33개 대기업 그룹-237개 법인이다(2014년 말 기준). 

이들 33개 그룹이 설립한 전체 역외 법인이 3155개임을 고려하면 약 7.5%가 조세피난처에 세워져 있는 셈이다.

한국은행‧수출입은행‧국세청 자료를 종합해 보면 2007년부터 2014년까지 국내 대기업들이 조세피난처에 송금한 금액은 총 4324억 달러 수준으로 한화 500조원에 육박한다. 반면 이 기간 조세피난처에서 국내로 들어온 금액은 2741억 달러에 불과해 약 1600억 달러(한화 약 200조원)의 자본 순유출이 발생했다.

   
▲ 역외탈세 문제는 박근혜 정권이 출범과 함께 강력하게 추진한 '지하경제 양성화'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청와대


문제는 자본이 유출됐다고 해서 이것을 무조건 범죄행위로 몰아세울 수 없다는 점에 있다. 페이퍼컴퍼니는 상대적으로 기업 설립과 청산 절차가 간편하기 때문에, 해외 부동산 투자에 나서거나 외국 기업과 합작 사업을 벌일 때 편리한 수단이 되는 경우가 많다. 탈세가 아닌 절세(節稅)를 목적으로 하는 페이퍼컴퍼니의 경우 조세피난처에 법인을 세웠다고 해서 처벌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탈세와 절세가 그야말로 '한 끗 차이'라는 지점에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조세피난처에 법인을 세우는 목적으로 '역외탈세'가 첫손에 꼽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를 중심으로 조세정보에 대한 교환 협정이 최근 계속해서 확대되는 추세에 있기는 하지만, 이번에 지목된 모섹 폰테카가 위치한 파나마는 협정에서 빠진 상태다. 이와 같은 제도상의 '구멍'을 귀신같이 파악한 큰손들의 자금은 역외탈세를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움직이고 있다.

역외탈세‧해외투자‧재산은닉이 조세회피 주 목적

마지막으로 해외에 설립한 유령 법인은 불법적인 해외투자의 채널로 이용될 소지도 있다.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조성한 불법 비자금으로 자사의 주가를 조작한 뒤 인수‧합병(M&A)까지 거치는 과정에서 탈세를 저지르는 방식 또한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오래된 수법이다. 자금세탁을 목적으로 조세회피 지역에 주로 투자를 하는 이른바 '검은머리 외국인'들의 사례는 영화 '작전' 같은 작품을 통해서도 세간에 잘 알려졌다.

결국 '큰손'들이 조세피난처를 찾는 이유는 역외탈세‧해외투자‧재산은닉 등으로 정리된다. 이 세 가지 목적은 전부 과세당국의 눈을 피해 최소한의 세금만을 내면서 재산을 굴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비롯된다. 기업과 국세청이 세금이라는 매개를 놓고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를 벌임에 있어 조세피난처는 과세당국의 손이 미치지 않는 '중립지역'이자 '치외법권'의 역할을 수행해 주는 것이다.
 
물론 '추적자' 국세청의 몸놀림도 예사롭지는 않다. 국세청은 지난해 10월부터 6개월간 역외소득‧재산 자진신고기간을 운영했다. 지난달 31일 자진신고기간이 종료됨에 따라 미신고자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분석력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한국 국세청은 지난 5일 "조세회피처를 통한 투자가 정상적 기업경영의 일환인지, 비정상적 역외탈세인지를 철저하게 검증할 것"이라면서 "기업경영과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면서 지능적 역외탈세에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세청이 유독 이번 정권에서 역외탈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역외탈세 문제는 박근혜 정권이 출범과 함께 강력하게 추진한 '지하경제 양성화'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기업가 개인의 관점에서는 '돈 굴릴 자유'일지도 모르지만 나라 전체로 보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세금 누수' 문제로 이어지는 조세회피 문제는 박근혜 정부가 반드시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정권 차원의 어젠다였다. 출범 4년째를 맞고 있는 박근혜 정부는 그동안 '지하'에 빛을 비추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을까? 

지난 4일 갑작스럽게 떠오른 '파나마 페이퍼스'라는 생소한 검색어는 어쩌면 박근혜 정부의 '성적표'가 될지도 모른다. (계속)
[미디어펜=이원우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