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번영과 자유의 초석 "한미상호방위조약, 자손만대 복을 누릴 것"
올해는 대한민국과 미국이 동맹을 맺은 지 63년이 되는 해다. 오늘날 우리는 대한민국과 미국의 동맹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1950년 당시 미국이 처음부터 한국과 한미동맹을 체결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설득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극적으로 체결하여 흔들림 없는 안보의 기틀을 놓는데 성공했다. 1950년 6.25전쟁부터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자유경제원은 지난 20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한미동맹-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발제자로 나선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은 “지금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미사일을 발사하며 위협을 해대는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의미를 피부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며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번영이 튼튼한 안보 위에서만 가능하며 그 안보의 핵심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고 지적했다. 권 소장은 “60여 년 전 한 지도자의 혜안(慧眼)과 처절한 노력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과 자유를 이룩하게 한 초석이 됐다”고 평했다.

특히 권 소장은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왔던 우리 역사를 볼 때 60년 넘게 외적의 침략을 당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은 이례적”이라며 “이렇게 장기간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던 터전을 마련한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이행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대통령이었다”고 강조했다. 권 소장은 “우남 이승만의 한미동맹, 그 효과의 크기는 역대 그 어느 대통령이 한 것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크다”고 언급했다. 아래 글은 권혁철 소장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한미상호방위조약 ‘자손만대 복을 누릴지니......’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조치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줄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앞두고 발표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성명서 내용 중 일부이다. 이 성명서의 내용만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의미를 더 잘 표현하는 것은 없는 듯하다. 지금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미사일을 발사하며 위협을 해대는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의미를 피부로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성명서의 내용은 이승만 대통령이 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그토록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는지 그 이유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번영이 튼튼한 안보 위에서만 가능하며, 그 안보의 핵심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60여 년 전 한 지도자의 혜안(慧眼)과 처절한 노력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과 자유를 이룩하게 한 초석이 된 것이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로 시작되는 대통령 취임선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가 원수로서 대통령의 제일(第一)의 책임과 의무는 국가의 보위이다.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왔던 우리의 역사를 볼 때 60여 년 간이나 외적의 침략을 당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장기간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던 터전을 마련한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이행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대통령이었으며, 그 효과의 크기는 역대 그 어느 대통령이 한 것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크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휴전에 결사반대했던 이승만이 휴전 수락 조건으로 제기하여 받아 낸 것이다. 따라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휴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등 초기에는 대한민국이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비교도 안 되는 남북 군사력의 열세 때문이었다. 남정욱은 그 상황을 “전쟁이 아닌 어떤 침략”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6.25는 개전 초기 ‘전쟁’이 아니었다. 미국이 참전을 확정짓고 한반도에 다시 진입하기 전까지 6.25는 일방적인 ‘침략’이었다.”

   
▲ 한미동맹으로 인해 동북아에서는 60년 간 전쟁이 사라졌다. 그동안 동북아는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6.25 등 대규모 전쟁이 연이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3년 한미동맹으로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장기적인 평화가 이루어졌다./자료사진=연합뉴스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켜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바라보기도 했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밀려 수도 서울을 다시 한 번 내주는 상황도 있었다. 평택과 안성을 잇는 37도선까지 후퇴했고, 미국은 한국 정부를 제주도나 사모아로 옮길 것까지도 검토했다. 이승만은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이승만의 확고한 의지에 감격한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나는 여기에 머물기 위해 왔다”는 말로 더 이상 후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 후 38도선을 중심으로 공방전이 계속되었지만, 인명피해만 계속될 뿐 어느 누구도 확실한 승기를 잡을 수 없었다. 미국 등 유엔 참전국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반도에서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어떻게 하면 명분 있는 휴전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 참전국들도 전쟁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 국내 여론이 좋지 않게 형성되고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내 여론의 악화는 정치인들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크나큰 압력이다. 

휴전에 반대하는 인물은 단 한 사람 이승만 뿐이었다. 이승만은 1952년 전미(全美) 시장(市長) 회의에서의 녹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산 침략은 우리가 그것을 패퇴시키거나 우리가 패퇴하던가 둘 중 하나이지 그 사이에 타협적인 해결책은 있을 수 없다......90만이나 되는 공산군이 북한에 남게 된다면 그것은 공산 측의 승리”리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 등 유엔군이 빠지더라도 한국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1953년 4월에는 휴전 반대 항의문을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면서 ‘만일 중공군을 북한에 둔 채 휴전한다면, 한국은 통일을 위해 단독으로 북진할 것이며, 그 경우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해도 좋지만 공군, 포병, 함포지원만은 계속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승만은 서둘러 휴전을 하고 싶은 미국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미국 언론은 이승만을 ‘칼을 품고 춤추는 늙은 고집쟁이’라는 등의 말로 비난했다. 휴전을 원하는 것은 유엔군 측만은 아니었고, 대한민국을 제외한 모든 관련 당사국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우방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물론 전 세계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만 했다.

이승만은 휴전이야말로 한국에 대한 사형집행 영장이자 분단의 고착화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휴전에 결사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의 휴전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자유와 공산주의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 둘은 결합될 수 없다. 공산주의와의 타협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물과 기름을 혼합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판문점에서 시도되고 있는 휴전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 휴전은 세계를 양립할 수 없는 지역으로 갈라놓은 깊은 구조적 균열을 땜질하려는 시도이므로 온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휴전 제의는 6.25가 발발한 지 딱 1년 만인 1951년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인 야코브 말리크가 라디오 방송에서 했다. 말리크는 휴전회담 개최와 양군의 38도선으로부터의 철수를 제의했다. 말리크의 이 제의는 공식적으로 나온 첫 제의였지만, 이러한 식의 휴전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꽤나 나돌고 있었던 것 같다. 이승만은 이 말리크의 제의가 있기 전인 6월 11일 변영태 외무장관의 국회연설을 통해 ‘38선 휴전설’을 강력히 부인했으며, 양유찬 주미대사도 휴전이라는 타협은 유엔의 자살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렸고, 이후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 7월 10일부터 15일 간 진행되었다. 그 사이에도 전선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하고 자국 내에서의 여론의 압력에 시달리던 미국은 휴전을 강행해야겠지만, 그럴 경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는 이승만이 큰 걸림돌이었다. 만일 이승만이 단독 북진한다면, 당연히 휴전은 깨지고, 미국은 다시 전쟁에 끌려 들어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은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상당히 고차원적인 여러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이렇듯 미국의 입장에서 휴전에 결사반대하고 있는 이승만은 큰 골칫거리였다. 이에 미국은 한 때 이승만을 제거하고자 했다. 1975년 8월 3일 「뉴욕 타임스」는 새로 분류된 기밀문서에 근거를 두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장관, 그리고 합동참모본부의 각 군 참모총장들이 이승만을 체포하고 남한을 다시 미군정 하에 두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중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기사를 실었다.

   
▲ 한미동맹으로 과거 동양에서 가장 폐쇄적이었던 은둔국 한국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하는 미국과 맹방이 됨으로써 서구 문명에 완전히 개방되었다. 원래 대륙 국가였던 한국은 이 과정에서 해양 지향의 태평양국가로 탈바꿈했다. 모두 다 우남 이승만의 공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미국은 다른 정책으로 선회한다. 그 이유는 반공주의의 상징인 이승만을 강압적으로 굴복시키거나 제거하는 것은 공산주의 세력과의 열전과 냉전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미국으로서도 상당한 손실과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미국이 택한 다른 정책이란 선거를 통해 미국에 유리하게 행동할 인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1951년 후반기부터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로 장면, 장택상, 김성수, 조병옥 등을 후보에 올려놓고 있었으며, 1952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 때 이승만을 패퇴시키고 미국 측 의견을 잘 따르는 유화적인 인물을 당선시키면 휴전협정이 쉽게 성사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특히 장면은 38도선을 분단선으로 재설정하는 타협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보였다. 또한 이승만의 국내에서의 입지, 특히 국회 내에서의 입지도 불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택한 돌파구는 개헌을 통해 대통령 선출권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에서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여러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그의 평소의 소신이기도 했다.

1948년 제헌헌법의 국회에서의 대통령 선출 방식에 그는 마지못해 찬성을 했던 것이다. 그는 국회 간선제에 동의하면서 ‘한국 국민이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입증되면 반드시 선출 권한을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이기도 했다. 6.25발발 이후 한국인들이 공산침략에 대항해 보여준 불굴의 저항정신을 그는 국민들이 국가 원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와 능력의 충분한 증거라고 보았으며, 이를 근거로 개헌을 추진했던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부산정치파동 등을 겪으며 ‘독재자’라는 비난을 국내외로부터 듣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과 분단 상태의 존속은 기정사실화된 결론이었고, 이에 대해 약소국 대통령인 이승만으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1952년 대선 승리 이후 이승만이 가장 큰 노력을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북진통일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핵심 목표가 달성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유엔 참전국들은 자국 군대가 큰 희생을 치르지 않도록 하면서도 패배를 당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전진도 후퇴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선을 유지시키고만 있었다. 이승만으로서는 이제 휴전협상이라고 하는 상황을 이용해 겉으로는 북진통일을 고집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 있을 것인가에 골몰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승만이 선택한 것 증 가장 큰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었다.

그러던 중 1952년 말 유엔총회는 인도 주도하에 이루어진 장기간의 토의 끝에 12월 3일 54:5의 표결로 남북한 양측에 억류되어 있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단에 넘길 것을 규정한 인도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1953년 4월 20일부토 1주일 간 유엔 측은 5,800명, 공산측은 684명의 부상병 포로를 각기 송환했고, 이것이 끝나면서 4월 26일 전쟁의 단계적인 축소를 위한 움직임 속에 본격적인 휴전회담이 판문점에서 재개되었고, 양측 모두 합의에 도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1953년 6월 4일 판문점 협상에서 1952년 말 유엔에서 채택된 결의안에 포함된 방식을 근거로 모든 전쟁 포로의 교환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였다. 한국에 중립국 감시위원단을 설치하고 인도의 장성에게 그 책임을 맡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첫째, 양측은 송환을 원하는 모든 포로를 두 달 안에 송환한다. 둘째,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를 보호하기 위해 비무장지대 안에 중립국 감시위원단을 설치하고 위원단과 포로를 인도군이 수비한다. 셋째, 송환 거부 포로에 대해 90일 간 본국 파견원이 설득하도록 한다.”

이승만은 포로송환 협정에 관한 내용을 보고받고 대노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송환된 소련군 병사들을 스탈린이 모두 숙청한 일이 있었다. 이 협정에 따라 귀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을 억지로 돌려보낼 경우 그들이 희생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반공포로들을 관리할 중립국 인도가 친북한인 것도 큰 문제였다. 정부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6월 8일 포로 교환 협정이 체결되었고, 반공포로들은 중립국감시위원단과 인도군 수비대에 넘겨질 운명이 되었다. 

이승만은 반공포로 문제가 엄청난 폭발력을 지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포로의 강제송환이냐 자유송환이냐를 놓고 휴전회담이 2년을 끌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게 되면 휴전회담이 무효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휴전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큰 대가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이승만은 유엔군 관할에서 벗어나 있는 헌병사령관 원용덕을 불러 반공포로를 석방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이에 따라 1953년 6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대구, 광주, 마산, 영천, 논산, 부평 등지의 유엔군이 관리하던 포로수용소에서 유엔군 초병들을 감금하거나 무장해제시키고 반공포로 3만5457명 중 2만6424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했다. “이것은 우리가 원치 않는 휴전협정을 언제라도 방해할 수 있다는 이승만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에 대해 세계는 깜짝 놀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즉각 반공포로 석방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브리그스 주한 미 대사는 대통령에게 항의하면서 손으로 책상을 치기도 했다. 면도를 하고 있던 처칠 영국 총리는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면도기를 손에서 떨어뜨렸다고 한다.

반공포로 석방에 놀란 아이젠하워는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대통령 특사로 한국에 급파한다. 로버트슨 특사는 “한국은 많은 유엔군 병력의 생명과 피의 대가로 확보하려는 휴전을 방해할 권리가 없다”는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이에 이승만은 과거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배반당했는데(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했을 때와 1945년 한국이 분단되었을 때), 현재의 상황은 또 하나의 배반을 의미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런 미국에 협력하느니 차라리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하였다. 로버트슨은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승만은 빈틈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로 몰고 갈 충분한 능력이 있는 매우 감정적이며, 분별력이 없고, 비논리적인 광신자이지만, 그의 철저한 반공주의와 불굴의 정신은 지원되어야 마땅하다”고 썼다.

   
▲ 이승만의 예언(?)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우리에게 그 값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역대 모든 정부는 한미동맹을 업고 외교에 임하고 있다./자료사진=연합뉴스


이승만은 대한민국 단독으로는 북진통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몰랐을까? 모르고 북진통일론을 주장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점은 서울에 찾아 온 닉슨과의 대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승만은 닉슨에게 “나는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했을까? 역시 닉슨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내가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미국을 도와주는 일입니다.....우리가 함께 가면 모두를 얻을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를 잃게 될 것입니다.”라고.

이승만의 이 말에 대해 닉슨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평하고 있다. “나는 이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 불가능성(being unpredictable)’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외교에 능수능란했던 이승만, 또 공산주의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던 이승만은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상대편에게 심어줌으로써 공산세력과 협상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유리한 입장에서, 그리고 상대편은 무언가에 쫓기듯 위축된 입장에서 협상을 하도록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로버트슨과의 2주간의 치열한 협상 끝에 휴전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미국과 한국은 다음과 같은 안건들을 제안하고 동의했다, “1) 정전 후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2) 미국은 한국에 장기적인 경제원조를 제공하며 1단계로 2억 달러를 제공한다.(1954년 당시 우리나라 수출총액은 2400만 달러였다) 3) 미국은 한국군의 20개 사단과 해공군력을 증강시킨다. 4) 양국은 휴전회담에 있어 90일이 경과되어도 정치회담에 성과가 없을 경우 이 회담에서 탈퇴하여 별도의 대책을 강구한다. 5) 한미 양국은 정치회담을 개최하기 이전에 공동목적에 관하여 양국의 고위회담을 개최한다.” 휴전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이런 조건들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전협정 조인 후 유엔군사령관 클라크는 이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싸워서 이기기보다 평화를 얻는 게 더 어려웠고, 적군보다 이승만 대통령이 더 힘들었다.” 이로써 1953년 7월 27일, 3년 넘게 진행됐던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이루어졌다. 

1953년 8월 3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덜레스 국무장관이 서울로 왔고,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을 했다. 덜레스는 가조인 후 “이 조약은 우리 청년들의 피로 봉인되었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끔을 포기하는 대가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면 미국의 자동개입을 보장받고, 70만 대군을 보유하는 아시아의 군사강국으로 부상하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1953년 10월 1일 변영태와 덜레스가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공식 조인했으며, 1954년 1월 15일 한국 국회가, 1월 26일 미국 상원이 비준함으로써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승만의 예언(?)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우리에게 그 값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유영익이 밝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이점은 다음과 같다.

“1. 한반도 및 그 주변의 장기적 평화가 유지되었다.
2. 한미동맹에 따른 미국의 확고한 대한(對韓) 방위보장에 힘입어 한국은 1970년대 전반기까지 GNP의 4%라는 비교적 적은 국방비만 쓰면서 경제개발 우선정책으로써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3. 한미동맹은 국군의 비약적인 팽창을 이루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탄되었을 때 보유병력이 8000명 정도였던 데 비해 한미동맹조약에 따라 한국은 20개 사단을 현대화했고, 70만 대군을 갖게 되었다.
4. 한미동맹은 한국의 민주화를 도왔다. 미국은 남한의 정치적 안정이 동북아권의 안정에 필수적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남한의 민주화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실제로 장기적으로는 정치적 민주화를 후원했다.
5. 한미동맹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게 된 한국은 외교망을 확대했다.
6. 한미동맹으로 과거 동양에서 가장 폐쇄적이었던 은둔국 한국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하는 미국과 맹방이 됨으로써 서구 문명에 완전히 개방되었다. 원래 대륙 국가였던 한국은 이 과정에서 해양 지향의 태평양국가로 탈바꿈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북아에서 60여 년 간 전쟁이 없이 장기간 평화가 유지되는 것도 한미상호방위조약 덕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삼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던 이승만의 심모원려 덕분에 대한민국의 오늘이 가능했다며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한미동맹으로 인해 동북아에서는 60년 간 전쟁이 사라졌다. 그동안 동북아는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6.25 등 대규모 전쟁이 연이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3년 한미동맹으로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장기적인 평화가 이루어졌다....장기적인 평화 덕분에 제일 먼저 일본이 경제발전을 이루어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일어섰고, 이어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으며,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국으로 등장했다. 결론적으로 최근 들어 전개된 동북아의 눈부신 성장은 60년 전 휴전으로 미봉한 채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는 미국의 발목을 붙잡아 한국에 주둔케 한 이승만의 심모원려 덕분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 준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한국인들의 진정한 싼타가 아닐까.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참고문헌

1) 김용삼, 『이승만의 네이션빌딩』, 북앤피플, 2014.

2) 남정욱, 「전쟁이 아닌 어떤 침략에 대한 재구성」,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연속토론회 제2차 <이승만은 6.25가 발발하자 국민을 버리고 제일 먼저 도망쳤다는데?> 토론문, 자유경제원, 2015. (http://www.cfe.org/mboard/ bbsDetail.php?cid=mn20140413051&idx=39413)

3) 안병훈 엮음,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 기파랑, 2015.

4) 올리버, 로버트(한준석 역), 『이승만의 대미 투쟁』, 하권, 비봉출판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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