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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 컨슈머워치 운영위원, 프리덤팩토리 대표,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
경제활동의 궁극적 지향점은 소비이다. 우리가 뭔가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생산하기 때문에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할 사람이 있기 때문에 생산하는 것이다. 생산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사람들은 필요도 없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피폐에 이르는 길이다.
자유로운 시장에서는 이런 원리가 제법 잘 작동한다. 사람들이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잘 팔리기 마련이고 생산자들은 그런 품목의 생산을 늘린다. 반대로 소비자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은 팔리지도 않으며, 생산도 자동적으로 줄어든다. 미제스 같은 경제학자는 이런 원리를 소비자 주권이라고 불렀다. 소비자가 바로 경제의 통치자, 군주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소비자 주권의 원어는 Consumer Sovereignty 인데 여기서 sovereign 은 통치자, 군주를 뜻한다.
일상생활에서는 소비자 주권의 원리가 제법 잘 작동하고 있다. 이제 웬만한 식당에서 손님은 주인에게 왕처럼 대접을 받는다. 백화점에서도, 마트에서도 고객의 목소리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 고객이 사지 않는 제품은 치워지고 고객이 많이 찾는 제품은 매장의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 아담스미스가 간파했던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이고, 그것은 소비자주권의 원리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유 시장은 소비자를 권리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정치와 정책의 반소비자적 성향
안타깝게도 정치와 정책과 입법의 영역에서는 소비자 주권과는 정반대의 현상들이 만연해 있다. 소비자 주권이 아니라 상인·기업인과 정치인과 공무원이 주권을 가진 세상이 펼쳐진다.
예를들어 과거에는 높은 수입관세로 인해서 소비자들은 비싼 가격을 감수해야 했다. 아예 정부가 나서서 행정지도라는 이름으로 가격 담합을 중재해주기도 했다. 과당경쟁을 방지한다는 명분하에 새로운 기업의 진입을 허가하지 않아 대기업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일도 비일비재했었다. 모두 소비자의 이익을 반하는 정책들이었다.
요즈음은 새로운 정책과 법률이 소비자의 이익을 해치고 있다.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상인과 기업들이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공무원을 움직여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있다. 소비자 주권을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다. 판매품목 제한,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위한 가맹본부 규제, 동반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성공한 식당과 기업들이 더 이상 확장을 못하게 정책 등이 모두 이런 부류에 속한다.
이런 정책들은 상인과 기업들로 하여금 열악한 품질의 제품을 비싸게 팔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 대가로 소비자들은 높은 가격에 저급한 제품을 강요받아야 하지만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은 거기에는 관심이 없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영세상인이든, 또는 노동자든, 생산자들과 판매자들은 소비자의 선택에 순종해야 한다. 어떤 물건을 누가 생산하고 누가 판매할 것인지는 소비자의 선택에 따라야 한다. 소비자가 자신의 지갑을 열어 선택하는 그 상인과 그 생산자가 판매하고 생산해야 한다. 그것이 소비자 주권의 원리이고 소비자 주권이 확립되어야 풍요로운 사회가 된다.
조합주의와 개인의 자유
소비자 주권이 마비되면 사회의 발전도 정체된다. 소비자의 선택은 무력화되고 그 자리를 정부 주도의 카르텔, 담합체들이 차지하게 된다. 거대한 담합의 정치, 담합의 경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장상인들은 상인들대로 협회를 만들어서 담합으로 가격을 정하고 판매방식을 정하게 된다. 개별 상인들은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야 하고 상인 지도부는 또 공무원과 시민단체의 뜻을 반영하게 된다. 식당 주인들도 그렇고, 안경점 역시 카르텔을 형성하게 된다. 모든 상인과 기업들이 힘든 경쟁을 피하기 위해, 소비자 주권의 작동을 막기 위해 조합과 정부의 지시에 따르는 길을 택한다. 창의와 혁신은 사라지고 통제와 지시가 만연하는 사회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이런 국가를 우리는 조합으로 이루어진 국가, 즉 조합주의 국가(Corporatism State)라고 부른다. 조합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결정은 위축되고 결국 사라져 버리고 만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파시즘 전체주의 체제가 모두 조합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소비자 주권은 단순히 소비자의 이익을 지키는 수단만은 아니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소비자 주권은 지켜져야 한다.
소비자는 왜 힘이 없는가?
자유사회를 유지함에 있어 소비자의 자유로운 선택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정책의 영역에서는 무시당하기 일쑤이다. 5천만 모두가 소비자인데도 왜 우리는 무력할까.
첫째는 소비자 스스로가 자신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산품의 수입을 금지해서 국내산업을 보호하면 소비자는 저품질의 제품을 비싼 값에 강요당하게 된다. 그리고 국내기업이 얻는 이익보다 소비자가 입는 손해가 더 크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소비자들이 수십년간 그 불이익을 감당하며 말 한마디 없었던 것은 자신들의 이익이 국내산업보호라는 목적보다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비자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건전한 산업구조의 형성을 위해서라도 개방경제가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소비자단체들도 이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자의 이익을 해치는 수많은 정책과 법률들에 대해서 소비자단체들이 입을 닫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들과의 싸움에는 열심이지만, 정책과의 싸움에는 소극적인 이유가 이것일 것 같다. 소비자의 이익이 왜 중요한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소비자 주권이 바로 설 수 있다.
둘째는 소비자의 이익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주, 담배, 고등어, 콩나물 등을 마트에서 판매하지 못하게 금지하는 정책을 생각해 보자. 이 정책으로 수많은 소비자들이 불편을 겪어야 하지만 각각의 소비자가 겪는 불편은 반사적 이익을 보는 동네 슈퍼 주인들에 비해서 작다. 그러다 보니 TV 토론과 같은 정책토론장에서 상인연합회 회장과 얼굴 붉히며 맞설 소비자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경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소비자 주권이 무력화된다. 컨슈머워치가 하려는 일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서 소비자를 시장뿐만 아니라 정책과 정치의 중심으로 올려놓기 위함이다. 시장과 기업 활동에 소비자주권의 원리가 작동하게 하기 위함이다. 정치와 정책이 시장에서의 소비자 선택을 방해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대기업의 이익과 소비자의 이익
컨슈머워치는 대기업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좋은 제품을 저렴하게 파는 기업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소비자 주권의 원리이다. 그런 원리를 지지하다보면 약자인 다윗 대신 강자인 골리앗 편을 들게 된다. 하지만 그런 비난이라면 감수해야 한다.
우리는 대기업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규모와 관계없이 소비자 선택의 결과를 지지하려는 것이다. 담합을 통해서 소비자에게 비싼 가격을 받아내려는 대기업은 당연히 우리의 비판 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품질의 제품을 낮은 가격에 팔아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내는 것을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비록 작은 상인들이 피해를 보더라도 말이다. 영세상인의 어려운 처지는 그들의 경쟁력을 높여서 해결할 문제이지 소비자의 선택을 강요해서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대기업도 소비자의 버림을 받으면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없다. 예를들어 세계 최대 기업인 월마트와 유통의 세계적 강자가 까루푸가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들이 원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그런 소비자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리고 경쟁에서 승리한 이마트와 롯데마트를 인정한다. 그들이 대기업이라서가 아니라 소비자들이 그들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도 자신의 힘으로 당당히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낸 기업이라면 우리는 지지한다. 대형 마트에서 반찬을 팔고 있음에도 동네 시장에서 당당히 반찬가게로 성공하고 있는 가게 아저씨를 지지한다. 그러나 마트 탓을 하며 법으로 소비자들이 마트에 가지 못하게 막아달라는 가게 주인이라면 아무리 재래시장 상인이라 해도 우리의 비판 대상이 될 것이다.
소비자 운동의 업그레이드
제품 하자 처리 방식의 기존 소비자운동은 그 동안 제품과 서비스의 수준을 높이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소비자의 이익이 여론과 정치와 법과 정책에 달려 있다. 그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소비자의 이익도, 한국경제의 발전도, 자유민주주의의 보전도 기약하기 힘들다.
이제 소비자운동의 차원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첫째, 모든 경제 정책과 법률을 소비자의 관점에서 감시하고, 소비자를 정책과 법률의 중심에 놓은 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익집단의 이익을 위해 소비자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국회의원과 시민운동가에 대한 시민의 감시도 시작되어야 한다.
둘째, 소비자들이 정당한 소비자운동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지속적인 소통과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새로운 일의 선봉에 서려는 컨슈머워치에 많은 소비자-시민의 참여를 기다린다. /김정호 컨슈머워치 운영위원, 프리덤팩토리 대표,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