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기에 무릇 성직자란 밖으로는 인간들의 고통을 구제하고, 안으로는 자신을 엄하게 다스려 수행에 매진하는 분들이다. 진정한 수행자는 제각기 옳다고 아우성치는 차별의 세계보다는 영원성과 관련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쉬지 않고 정진한다. 그래서 존경받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현인들은 인간과 사회의 문제가 “그렇다, 아니다!”로 딱부러지게 결론을 내기에는 너무나 복잡다단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어떤 결론에 매이지 않았다. 한번 결론에 붙들리게 되면 사람은 쉽게 광적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좋아 보이는 일도 한참 지나서 보면 불행의 서곡일 수도 있고, 지금 나빠 보이는 일도 나중에 가서 보면 엄청 좋은 일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사다.
본래 사회적 이슈는 옳고 그름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 누가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결론은 극과 극으로 갈라서고 만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 여야의 논평, 보수신문과 좌파신문을 보면 이런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정의구현사제단’이 권위주의 시절 민주화과정에서 일정 부분 기여한 공에 대해 우리는 인색하지 않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후 일탈을 거듭하여 국가의 중요한 현안마다 불나방처럼 뛰어들면서 현실정치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다. 혹시 정의를 자신들의 전유물로 간주해 도에 넘치는 자기과시욕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농부, 대중교통기사, 산업근로자, 집배원 등 이 모든 사람들이 묵묵히 매일 정의를 구현하는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아무 음식점에 들어가 마음 놓고 밥이나 먹을 수 있겠는가. 하긴 정의를 말하는 것까지 시비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분내(分內)의 일과 분외(分外)의 일을 혼동하면 세상만 시끄러워 진다는 데에 있다. 에픽테토스(Epictetos)의 충고이다.
또는 사회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혀 ‘세속적 정치세력’으로 똬리를 튼 것은 않았는지 의문을 금할 수 없다. 문맥을 무시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아전인수하면서까지 아집과 독선이 지나치다. 지금은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을 자행하던 암흑시대 중세가 아니다. 부디 자중자애하시기를 외람을 무릅쓰고 당부드린다.
우리가 보기에 국정원 댓글사건은 이빨이 혀를 잘못 깨문 경우이다. 이는 사태를 안이하게 본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한 극단에 치우쳐 국민들 간에 분열을 조장하고 분수에 넘치는 언행을 자행하는 것은 과연 올바른 일인가. 현 정부와 연루된 사안도 아니고, 다수의 국민은 대선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지도 않는다. 설사 영향을 주었다손 치자. 그렇다면 누가 보았으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검증할 수 있는가? 이른바 실익이나 실효성이 없으니, 국민들이 “됐다마, 고마해라!”하는 것이다. 야당도 이를 모를 리가 없는데 소모적인 정쟁의 불쏘시개로 삼고 있으니, 이는 실로 정치력의 부재를 드러낼 뿐이다.
이런 상황을 침소봉대한 박 모 신부의 시국 미사는 이빨을 뽑아버리겠다고 펜치를 찿아나서는 꼴이 아닌가. 갈등을 치유하기는커녕 조장하고 확대재생산하기 때문에 참으로 지혜롭지 못한 처사로 보인다. 대체 이분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서 나무 한 그루를 심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심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리려고 작정한 사람들인가.
우리 모두는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하나의 일탈된 행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즉각 악영향을 미친다. 박 신부의 무책임한 돌출 행위는 이후 일련의 막말 파동에 불씨를 제공한 것으로 실로 책임이 엄중하다.
어떤 현상의 한 면만 보는 한, 설령 그것이 옳다 할지라도 인간은 결코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반쪽 진실이 거짓 못지않게 위험한 것은 그것이 진실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혹세무민에 다름 아니다. 다시 한 번, 하나를 주장하는 것은 백가지를 놓치는 위험한 일이요, 설사 무엇을 안다 하더라도 아직 모르는 것이 언제나 남아있는 법이다. 심지어 손바닥에 올려놓은 돌조차 그 전체를 볼 수 없지 않은가.
종교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어둠은 직접 공격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빛을 비추면 사라진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3.5%의 염분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직자라면 이렇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서 사회를 정화하고 또 지탱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 한 마음이 맑아지면 온 세상도 맑아진다고 하지 않는가.
일부 성직자들이 신의 겸손한 종의 신분을 넘어 마치 성자가 다 된 듯한 착각에 빠져있지나 않은지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다 평신도가 목자를 염려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참으로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개구즉착(開口卽錯)’, ‘동념즉괴(動念卽乖)’의 기본적 이치를 간과하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네로나 히틀러를 제거하는데 보다 더 열정을 불태워야 한다고 믿는다. 사랑과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야 할 신성한 미사가 증오의 굿판이 될 때 우리 공동체는 바람 앞에 등불이 되기 십상이다. 저주의 굿판 대신에 평화의 종소리가 이 땅에 널리 울려 퍼지기를! /정계섭 전 덕성여대 교수